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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방역본부] 코로나에 필요한 ‘호기심을 위한 과학’

원하는 연구를 하기 위해 80시간씩 일하는 과학자 <랩걸>
등록 2020-11-21 14:25 수정 2020-11-22 01:23
랩걸-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호프 자런 지음, 김희정 옮김, 알마 펴냄, 2017년

랩걸-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호프 자런 지음, 김희정 옮김, 알마 펴냄, 2017년

실험실 연구원을 ‘랩걸’이라고 불렀다면 그것은 존대의 호칭은 아니다. 랩걸에는 온종일 랩(lab)에서 일만 하고 다른 것에는 관심도 없고 할 줄도 모르는, 화장기 없는 외골수 여자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꼭 그렇게 살아야겠느냐는 비아냥이 곁들여 있다면 과도한 상상일까? 그런 단어를 책 제목으로 했을 때, 나는 저자가 그런 랩걸이 얼마나 훌륭한지 보여주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고 생각했다.

지은이는 1969년생으로 과학을 가르치는 아버지의 실험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학 때 병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정해진 레시피에 따라 행동한 다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다릴 뿐’인 의과대학에 가느니 무엇이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자신의 성향을 아는 과학교수의 요청에 따라 연구원이 되었다. 무엇을 발견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거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레시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조교를 하고 교수 채용에 도전하고 실험에 드는 돈과 연구원 인건비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고 계획서를 작성하고 학회에 가서 자신을 알리고 정년을 보장해주는 자리를 찾아서 동료 연구원과 옮겨다닌다. 연구과학자의 삶은 싹틔우기를 기다리고 뿌리로 정착할 자리를 찾고 온갖 적과 싸우는 식물의 투쟁과 비슷하다. 그해 생산량을 맞추지 못하면 전년에 자신이 차지했던 공간을 경쟁자에게 빼앗기는 낙엽수처럼, 과학자도 정해진 기간 예산의 지배를 받는다. 일에 지친 저자는 정년을 보장받는 정교수가 되면 ‘난 네 엄마가 아냐’라고 쓴 티셔츠를 입고 출근하겠다는 엉뚱한 다짐도 한다.

저자가 기후변화가 있을 때 고구마는 어떻게 성장할까 궁금해하고, 돌처럼 단단한 팽나무 열매 성분이 아름다운 보석 오팔과 같다는 것을 발견하고, 북극권에서 낙엽침엽수들의 잔해를 파헤쳐 해 없는 석 달(극야)을 어떻게 견뎠는지 풀어보고,(이런 쓸데없는 학문을 고생물학이라 한다) 식물도 광합성을 하면서 땀을 흘리는데 더울수록 땀을 많이 흘리는지 궁금해하고 답을 구하는 과정을 신기해하며 읽었다. 식물에도 뿌리에서 뿌리로 전달되는 신호체계가 있고 휘발성 유기화합물을 분비해서 위험을 경고하고 배아 시기를 기억해서 움을 일찍 틔우기도 한단다. 공상과학소설 같다.

책을 쓴 해에도 지은이는 주 80시간을 일했다. 40시간은 돈이 되는 폭발물 분석기 연구를 하고 다른 40시간은 진정 하고 싶은 식물학 실험을 했다. 미국도 연구비는 지식을 위한 과학이 아닌 전쟁을 위한 과학에 몰려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를 공부하다보니 아는 바이러스학 교수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는 전공이 코로나바이러스였는데 국내로 돌아와서는 그 연구를 지속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한 게 생각났다. 메르스가 유행하기 전에는 연구비를 지원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지은이의 과학은 호기심에 이끌려서 하는 연구다.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제품이나 유용한 기계, 처방할 수 있는 약, 무기, 이런 직접적인 물질적 이익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호기심을 위한 연구에 지원하는 것, 이것이 과학 인프라다.

어떻게 식물이 그토록 오래 성공적으로 번창했는지 이해하고 4억 년간 지속된 생명체인 식물을 목재·의약품·식량으로만 분류하는 비극에 누군가는 걱정하고 있다는 증거를 남기는 게 지은이의 식물학 연구 이유다. 정말 필요한 건가 싶은 주제이지만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징검다리가 될 것을 믿는다. 호기심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자에게 과학이 열린다.

최영화 아주대 감염내과 교수·<감염된 독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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