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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방역본부] 스승이시여, 510쪽이 다 흐뭇합니다

대만 탕누어 선생의 명예, 부, 권력에 관한 96편의 사색
등록 2020-07-20 22:46 수정 2020-07-24 19:35
명예, 부, 권력에 관한 사색 탕누어 지음,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펴냄

명예, 부, 권력에 관한 사색 탕누어 지음,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펴냄

남편은 무슨 책을 그렇게 히히거리며 읽느냐고 한다. 꺾쇠 두 개로 그리는 스마일 표시를 웃길 때마다 그려넣었는데 한두 쪽마다 웃음을 짓고 있다. 아, 스승이시여. 510쪽이 다 흐뭇합니다.

탕누어 선생은 명예, 권력, 부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하는 소책자를 만들자는 데 동의하고 질문을 만들고 사색하고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소책자를 만드는 것에는 실패한다. 6년간 쓴 책은 500쪽이 넘었다. 하하. 단순하게 쓰자, 쉬운 말로 쓰자는 원칙이 있었기에 인용도 웬만한 사람들이 알고 있을 <몽테크리스토 백작> <80일간의 세계일주> <월든> 이런 곳에서 찾았다. 짧은 주제로 엮은 96편의 사색은 자본 축적과 부의 확대 과정, 권력이 그 부에 포획되는 과정, 명예 소멸을 현실의 사례와 문학적 용어로 풀어냈다. 대만 사람인 탕누어 선생은 노자, 공자, 자로, 안연, 한무제를 자연스럽게 예로 든다. 그의 시야엔 중국도 일본도 한국도 들어 있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사색의 깊이가 내 양팔에 힘의 균형을 주고 나는 마음껏 노 저어 이곳저곳을 음미한다. ​

사색의 시작은 ‘소멸 중인 사후 명예’다. 식별 능력이 좋아져서 살아 있을 때 다 알아주기 때문에 없어지는 걸까. 이미 ‘사후 명예’라는 것을 취소하고 포기해서다. 그것의 허망함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체호프의 인생은 드라마 30부작으로 보면 29부 내내 고생만 하다가 30부에서도 마지막 5분을 남기고 겨우 행복을 얻는다. 시청자는 분노한다. 이러면 누가 좋은 인물이 되려 하겠는가? 발터 베냐민이 죽어서야 명예를 얻은 데 한나 아렌트는 분노한다. 생전에 돈 몇 푼이 없어 궁벽한 산골에서 자살로 마무리한 뒤에야 세상은 그를 떠받든다.

‘절대 수요’(인간의 본성에 의한 수요로, 상대 수요와 대비된다)는 공자, 자로, 안연을 빌려 설명한다. 공자는 ‘절대 수요를 해결하면 시간과 지혜 같은 유한한 삶의 자원을 다른 곳으로 돌려 삶의 효용가치를 극대화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명예는 전달되지 않는데 돈은 아주 잘 전달된다.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점원에게 블랙카드(VIP용 카드)를 꺼냈다. 절대 수요 이상에서 수요는 한계가 없고 만족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우월과 자존을 느끼려 한다는 케인스의 의견과 다른 사람과 같아지려는 욕구라는 알렉시 드 토크빌의 해석이 있단다. 토크빌은 남과 같아지려는 욕구가 부의 경계에서만 생긴다고 봤는데 이제는 바뀌었다. 이제 부는 누구나의 목표이다. 그러니 명예는 부와 싸워 이길 수 없다.

권력과 부는 인류 세계를 지배하는 양대 축으로 연합하기도 하고 끊임없이 다투기도 한다. 하지만 명예는 거기에 어울리지 못하고 그럴 만한 힘을 가져본 적도 없다. 그래도 선생은 낙관한다. 부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인류는 자기 구속과 희생을 치르면서 와해·붕괴되겠지만, 인간의 생명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근성은 끝까지 유지될 것이라고. 그래서 명예는 현실 논리가 지배하는 이 무미건조한 세계에 조금이라도 당위적인 것을 남기려 노력한다. 그것이 명예의 방식이다.

탕누어 선생은 편집자와 작가의 명예로 좁혀서 책을 마무리한다. 출판인은 명예와 부, 동시에 그 둘에 대해 충성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명예와 부, 지식의 전승과 시장 법칙 혹은 좋은 책과 잘 팔리는 책의 분별이다. 우연히 이 두 가지가 결합해 좋은 책이 잘 팔리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선물로 여기란다. 이 책은 능히 그럴 만하다.

최영화 아주대 감염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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