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보미(40) 작가는 소설을 쓸 때 퇴고를 거의 하지 않는다고 했다. 쓰는 과정에서 계속 고쳐나가기 때문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마침표를 찍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소설을 완성한 뒤 책 끝에 실을 ‘작가의 말’도 되도록이면 쓰고 싶지 않다고 했다(기어이 <작은 동네>에서 쓰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이 밀려 있어서, 그다음 이야기로 서둘러 떠나려는 걸까? 아니면 소설가들은 때로 무심한 창조주이기에 이미 쓴 이야기는 돌아보지 않는 걸까. 하지만 그의 소설을 읽고 나면 항상 궁금했다. 각기 다른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자들을 불러내어 한 명씩 떠올려보게 되는 것이다. 다정함이 없는 할머니와 무언가를 숨기는 엄마와 어디론가 사라지는 여배우와 친구가 없는 소녀에 대해서, 그를 만나 물어보고 싶었다.
나를 즐겁게 해주자
폭염이 쏟아진 7월21일 오후 2시. 상기된 얼굴로 카페에 들어선 그에게 안부를 묻자 번아웃증후군이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디어 랄프 로렌> 이후 3년 만에 장편소설 <작은 동네>를 세상에 내놓고 새 책을 소개하기 위해 오가는 일만으로도 바쁠 텐데 그는 매일매일 원고를 쓰고, 강의하고, 정신없는 날을 보내고 있었다. 번아웃증후군이 아닌지 의심할 정도로 집중력이 떨어져서 고민인 그에게 유일하게 활력을 주는 건 운동인데, 데드리프트에 대해 말할 땐 정말이지 신이 나 보였다. “저도 제가 이럴 줄 몰랐는데, 무거운 원판을 바벨에 끼우고 들어 올릴 때 희열이 있더라고요. 아무도 저를 압박하지 않는데 혼자 무게 올리기에 집착하면서 막 몰두해요. 운동이 잘 안되거나 지난번보다 무게를 덜 들게 되면 프로 선수처럼 심각해지고. 운동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실력은 아주 초보인데 스스로도 웃기더라고요. 아니야~ 못해도 돼, 잘하는 건 중요한 게 아니야, 내가 즐거워야 해, 계속해서 다독이면서 즐기고 있어요. 근데 무게를 드는 운동이 정말 재미있어요. 해본 사람은 알아요.”
작가의 삶은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혼자만의 시간과 대중 앞에 책을 내놓고 그에 대한 평가를 들어야 하는 일 대 다의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흔히 창작의 고통을 이야기하며 작가들에겐 마감 스트레스가 가장 클 거라 생각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별점을 주고 한 줄 문장으로 호와 불호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시대가 주는 스트레스는 어떻게 처리하는지 궁금했다. “데뷔하고 2년차까지는 리뷰를 찾아봤어요. 지금은 절대 안 봐요. 제 성격 중에 고치고 싶은 부분이고 많이 노력해서 바꾸긴 했는데, 안 하면 안 했지 할 거면 완벽하게 해내자는 욕심이나 책임감 같은 게 있었어요. 제 글에 대한 좋은 이야기는 늘 감사하지만, 아쉽거나 부족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분명 있겠죠. 하지만 누군가 ‘손보미 소설은 이래서 별로야’라고 할 때, 바로 그 지점이 나의 핵심인 경우가 많아요. 그렇다면 이건 내가 버릴 수 없는 건데, 작품을 쓸 때 가장 소중하게 다루는 건데, 그게 별로라고 하면 나는 갈 곳이 없잖아요. 처음엔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굴면서 완벽해지려고 노력했어요. 내 소설에 이상한 점이 있더라도 나머지 부분에서 완벽한 글을 써보자.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계속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죠. 나는 매일 써야 하는 사람인데, 좋은 평이든 나쁜 평이든 남들의 평가를 의식하며 매일을 보낼 순 없잖아요. 결국 글 쓰는 과정이 즐겁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알았어요. 내가 첫 번째 독자가 되어서 나를 가장 즐겁게 해주자 마음먹었죠. ‘즐거운 글쓰기’라는 과정을 생각하니까 자연스럽게 결과에서도 자유로워졌어요. 다행히 작년에 쓴 작품들은 모두 재미있게 썼어요.”
사실이다.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과 <작은 동네> 두 권을 놓고 보아도 과거의 기억을 좇아 현재의 의문을 해소하려는 손보미의 스타일은 가져가면서 <작은 동네>에 이르러 이야기의 얼개는 훨씬 견고해졌다.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여러 인물과 에피소드가 등장하지만, 흥미롭게 그들의 사연을 따라가게 된다. 그렇게 주인공과 함께 과거의 기억을 추적하다보면, 예상치 못한 반전과 먹먹한 여운이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장편소설만이 줄 수 있는 몰입감에 빠져들게 된다. 게다가 <작은 동네>는 그가 소설가가 된 뒤 처음으로 일인칭 여성 화자를 등장시킨 소설이다. 반가우면서도, 의도적인 변화인지 묻고 싶었다.
“제 얘기를 쓰는 것은 잘 못하기 때문에 소설의 주인공은 대개 남자이거나, 제가 살아온 삶과는 별로 상관없는 환경에 처한 인물들이죠. 에세이 청탁이 들어왔을 때는 소설을 쓸 때보다 고민을 많이 했어요. 타인의 사생활이나 연애사에도 별 관심이 없어요. 다만 유독 눈에 잘 보이는 장면이 있어요. 몇 년 전까지 용산에 살았는데, 그 동네엔 서울에서도 손에 꼽게 비싸다는 고층 아파트가 솟아 있고, 바로 지척에 곧 무너져내릴 것처럼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요. 분명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둘 다 들어가본 적 없는 공간이죠. 강남에 가면 평범한 식당을 찾아가는 길에도 고층 건물 꼭대기에 최고급 펜트하우스가 보여요. 저는 이런 풍경의 잔상이 오래 남아요. 거창하게 도시의 주택 계급이나 공간의 불평등을 다루고 싶다는 게 아니라, 이런 기이한 풍경이 눈에 보이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것처럼 군다든가 하는 것에 대해 써보고 싶어요.”
그 수만큼이나 다양한 여성들
손보미는 앤솔러지 형식으로는 큰 성공을 거둔 페미니즘 소설집 <현남 오빠에게> 참여 제안이 들어왔을 때 거절했는데, 스스로 사회적 현안을 바로바로 캐치해서 쓸 수 있는 순발력 있는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편 ‘임시교사’도 여성주의 소설일 수 있다는 편집자의 설득에 생각을 바꾸어 ‘이방인’을 썼다. 함께 수록된 소설들이 맨스플레인이나 가부장제 등을 통쾌하게 드러내는 방식을 선택했다면, ‘이방인’에는 폐인이 된 여자 경찰의 위태로운 모습이 등장한다. 동료들의 경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착적으로 사건에 달려드는 주인공의 모습은 누아르에서 익숙하게 봐온 남자들과 다를 바 없기에 신선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그의 소설 속 여자들은 어딘가 이상하다. 다정함이 전혀 없거나, 거짓말하고, 분별력을 잃은 채 사라지거나, 가능성 없는 일에 몰두한다. 남편으로부터 “당신, 요즘 진짜 이상한 거 알아?”라는 불평을 들어도 멈추지 않고 자기 마음이 이끄는 대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런 여자들의 이야기에 붙들려 소설에 빠져드는 순간, 사실은 이들이 ‘이상한 여자’가 아니라 각자의 결함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여성의 모습은 그 수만큼이나 다양하게 존재하는데, 사회적으로 고착화된 성역할이나 여자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편견을 은연중에 내면화한 결과 그 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이상하다’고 쉽게 말해온 건 아닐까.
손보미는 그렇기 때문에 소설을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여자들을 자꾸 만나보라고 권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알지 못했을 땐 상상할 수 없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 순간 이상하다고 생각한 구석도 이해할 수 있고, 그러다보면 나 역시 타인에게서 나의 부족함을 이해받을 수 있는 작은 여지가 생길 거라고 했다. 그가 ‘고양이의 보은’에서 “고양이들과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이 고양이들의 삶을 내가 가질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 아마도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절대 이해할 수도 없고 서로를 절대 가질 수도 없는 방식으로 우리는 함께 살아가게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듯,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나 아닌 누군가를 완전히 안다거나 전부 다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서로 사랑도 하고 같이 살아갈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휘트니 휴스턴의 영상을 자주 보는데, 한때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잘나가던 여자가 시간이 흘러 필요 이상의 관심과 비난을 받는 게 너무나 불공평하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어릴 때 브리트니 스피어스도 유명했거든요. 그도 엄청난 인기 후에 지나친 비난을 받았어요. 일거수일투족을 파파라치에게 찍히면서요. TV에 호명돼 사생활이 전시되는 여자들을 보면서, 페미니즘이라는 거대한 의제에 닿기도 전에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해? 생각이 들죠. 소설 주제로 가져올 수 있다고는 생각 못했지만, 계속 제 마음에 남아 있던 것이 소설에 조금씩 드러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봐요.”
최고운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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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의 평행우주
손보미의 작품들에서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방금 읽은 소설에서 만난 인물이 어딘가 달라진 모습으로 다른 소설 속에 이미 존재한다는 것. 마치 마블 영화의 인물들이 여러 시리즈에서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각자의 사연을 새로이 보여주듯, 손보미 유니버스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숨겨진 과거가 있거나 아예 다른 세계에 각각 존재하며 ‘혹시 저이가 그 사람 아닐까’ 하는 기시감이 들게 한다.
가령 <우연의 신>에 나오는 민간조사원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조니 워커 화이트 라벨을 찾으러 떠난 여정에서 함께 기차에 갇히게 된 여자의 개를 맡게 되고 결국 ‘분실물 찾기의 대가’(맨해튼의 반딧불이)가 된 것일지 모른다. 평일 오후 항상 윗집에 맡겨지는 10살 소녀(‘크리스마스의 추억’)의 엄마는 사교모임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여자에게 섬뜩한 경고를 하고(‘사랑의 꿈’),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했지만 해고 통보를 받은 임시교사(‘허리케인’)는 P부인의 집에서 일하면서 미묘한 계층 갈등을 겪는다(‘임시교사’). 상자에서 걸어 나온 수상한 사나이(‘상자 사나이’)는 불쑥 초인종을 누르는 세일즈맨이 된 듯하고(‘침묵’), 손녀를 향한 다정함 같은 건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엄격한 할머니(‘위대한 유산’)는 어쩌면 1930년대에 지어진 저택에서 줄곧 섬뜩한 모습으로 머물고 있는지 모른다(‘이전의 여자, 이후의 여자’).
손보미는 결코 힌트를 주지 않으며 이에 대해 질문할 때면 언제나 천연덕스럽게 자신도 의도한 게 아니라고 반응하기 때문에, 소설을 읽다 그의 세계관을 알아차리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그가 만든 소설은 개별로 완전하게 존재하지만, 그 안의 인물들이 작품에서 걸어 나와 자유롭게 오가는 바람에 독자들에겐 동선을 추적하는 재미가 보너스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계의 퍼즐을 완벽하게 맞추기 위한 방법은 단 하나. 그의 모든 소설을 읽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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