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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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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이 사랑한 작가 장강명② 장강명의 계획표

등록 2020-08-21 01:19 수정 2020-08-22 10:37
김진수 기자

김진수 기자


*21이 사랑한 작가 장강명① “70살까지 집중하려 합니다”에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124.html

3. 윤리

장강명은 <5년 만에 신혼여행>에서 “부자 나라의 부잣집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이 불공평한 세계에 대해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 현금이 아닌 좋은 머리, 아름다운 용모를 물려받은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 사람들이 여유를 누리고 배곯지 않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내면에 도사린 잔인함을 억누르고 선량함을 발휘할 수 있다”고 썼다. 이런 윤리감각이 어디서 오는지 궁금했다.

“제 주인공과 저의 공통점이 진지한 사람들인 거죠. ‘진지충’들인데요, 그런 사람들 요즘 인기 없는데. (웃음)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은데, 그 가치를 밖에서 정해주는 존재는 없는 거예요. 신 같은 건 없고. 그럼에도 가치 있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제가 지금 쓰는 소설에는 얼굴에 반점이 있는 사람이 나와요. 유전자 입장에서 보면 사소한데 그에게는 정말 심각한 고통이죠. 누구는 아름답게 태어나는데, 불공평하죠. 그런 기본적인 것이 윤리라든가 가치를 만드는 것 같아요.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 그 고민을 해야 하는 것 같아요.”

<호모도미난스>에는 개인의 양심이나 신념을 기준으로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윤리체계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역시 지금 쓰는 소설에서도 도발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18세기의 계몽주의 윤리관이 위기에 처하지 않았나 하는 겁니다. 의무적으로 교육하고 왕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도입하면 사람들이 다 자기에게 최선의 것을 선택할 것이고, 인류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믿었는데, 사람들이 정말 그러한가. 회의적이죠. 계몽주의의 큰 단점 중 하나가, 뭘 해야 할지에 대해 말해주지 않아요. 뭘 침해하면 안 된다는 거로 이루어져 있거든요. 자유로운 상태가 되면 알아서 자기에게 제일 좋은 걸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집단으로 방향을 잃고 국수주의 같은 싸구려 이데올로기들이나 아니면 순간적 만족을 주는 SNS나 자극적 유행에 빠진다, 이렇게 주인공은 논리를 펼칩니다.

윤리적 딜레마 아래에도 공리(公理)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하나는 있는 것 같아요. 유발 하라리가 한 말. 고통은 부정할 수 없다. 고통은 실존한다. 신도 부정할 수 있고, 내세도 부정할 수 있는데, 고통이 존재하는 것은 명확하고, 고통을 줄여야 한다는 목표는 있죠. 인간이 놀라울 정도로 잘 고통받는 동물인데, 방향을 모를 때도 고통받습니다.

4. 시스템

장강명 작가의 소설들에는 시스템에 저항하거나 어떻게든 균열을 내려고 노력하는 주인공들이 나온다. <표백>은 모든 게 정해져서 새롭게 더할 것이 없는 세대가 그런 세상을 비판하며 ‘자살 선언’을 하고 죽음으로써 시스템에 부딪히고, <열광금지, 에바로드>에서는 가진 것 없는 주인공이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덕질’을 통해 자신의 숨 쉴 틈을 만들어낸다. 방식은 다르지만 정해진 대로 살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경로를 이탈한다.

시스템이 정해준 대로 살지 않으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요. 작가님 소설 속 주인공들이 맞닥뜨리는 문제들이잖아요.

소설에서는 테크니컬하게 도발적인 걸 하나 던집니다. 자살이라든가 댓글부대 같은. 제 소설의 주인공은 이런 선택은 하지 않습니다. 보통 어떤 고민이 있으면 되게 낭만적인 답을 찾잖아요. 갑자기 인도에 가서 도 닦고 돌아온다든가. 소설 다루는 사람이라면 그런 테크닉을 쓰기 쉬울 거예요. 널 감동시켜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느끼게 해줄게. <죄와 벌> 끝이 그렇죠. 전 그건 싫어요. 끝까지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가치를 만들어내는 게 좋습니다. 제가 피하는 게 몇 가지 있는데요. 낭만적 영적 체험 거듭남을 묘사하는 것. 사랑, 여인, 어머니를 통한 구원. 또 하나는 제가 볼 때는 유아적인 건데, 이건 아니잖아요, 하면서 끝없는 파멸로 가는 것.

작가님이 진행한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재밌었던 게, <호밀밭의 파수꾼> <인간실격> <위대한 개츠비> 등에 나오는 나약한 주인공들을 혐오하더라고요.

싫어합니다. (웃음) 사실 모두 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다자이 오사무가 살아 있을 때 누가 봐도 자기 얘길 썼네, 할 거잖아요. 결기가 대단한 작가다 생각합니다. 저는 주인공이 좀 똑똑했으면 좋겠어요. 자기가 처한 상황을 알고, 어떻게든 시스템에 균열을 내보려 시도하는 거요. 마담 보바리처럼 한없이 욕망에 휘둘리다가 파멸하는 것보다는 계나처럼 자기를 감당하면서 위험을 피해 가는 쪽이 나아요. 한없이 희생양이 되는 주인공도 싫습니다. 개츠비나 홀든 콜필드나 오바 요조 모두 어떤 면에선 자기가 정말 원하는 걸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 같아요. <호밀밭의 파수꾼>은 이것도 저것도 다 싫어, 하면서 문제에 더 안 들어가고. 전 이십대 때도 싫더라고요. <위대한 개츠비>도 여러 번 읽었는데, 저한테는 너무 확실한 게 개츠비가 데이지를 안 좋아하는 거예요.

5. 계획

장강명 작가는 어떤 인터뷰에서 인생의 세 가지 목표를 말한 적이 있다. 1. 행복한 결혼생활 2. 소설가로서 성공 3. 공동체에 공헌하는 것. 작가와 이야기하다보니, 좋은 소설을 쓰는 것이 결국 이 세 목표를 충족하는 방법인 것처럼 보인다. 만 9년간 13권의 책을 써내고 역사와 문화, 사회 곳곳에 깊고 넓은 관심을 가진 그는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쓸까.

“전 더 나은 소설가가 되고 싶어요. 좋은 소설가가 되고 싶고. 고전문학 보다보면 걸작이 되려면 거의 필수 조건인 게 작품이 나온 다음 얻어터져야 해요. 당대에 지독한 논란의 대상이 되거나 금서 정도 돼야 하죠. <분노의 포도>는 출간 직후 많은 도서관에서 금서로 지정됩니다. <보바리 부인>이 공동체에 공헌한 소설인데, 나왔을 땐 부인들의 타락을 부추기는 소설이라 욕먹었죠.

소설가도 분명 필력이 정점에 이르렀다 떨어질 때가 있더라고요. 육십대 중반쯤? 바둑기사들은 이십대, 수학자는 십대, 소설가는 그 와중에 느려서 50, 60대에 생산적인 시기를 보냅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을 썼을 때는 59살, 존 스타인벡이 <불만의 겨울>을 썼을 때는 59살이었어요. 지금은 평균수명이 늘었으니까 제가 65살이나 70살이 정점이라 치면 한 20년 남았거든요. 지금 속도로 장편을 쓰면 한 20편 쓸 수 있어요.

그럼 넌 뭘 쓰고 싶냐고 하면 대박 나는 대중소설은 쓰고 싶지 않은 거예요. 예를 들어 어떤 작품을 보고 너무 감동받아서 이 정도면 팔 한쪽을 떼어줄 수도 있다 싶어요. <블랙 달리아>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 <악령> <서부전선 이상 없다> <앨저넌에게 꽃을> 등. 실험적이지 않고 하드보일드(현실의 냉혹하고 비정한 일을 간결한 문체로 묘사하는 수법)하죠. 주인공이 강력한 의지를 갖고 역경을 헤쳐나가는 고전적 스타일의 소설들입니다.

제가 되게 천부적 재능이 있는 것 같지 않으니까 있는 재능을 한곳에 초점을 맞춰야 할 거 같습니다. 그래서 가욋일을 되도록 줄이고, 집중하려 합니다. 제가 공들여 썼는데, 독자든 평론이든 상업적으로든 반응이 안 좋을 때 타격 입지 말아야지. 기름진 거 먹으면서 튼튼하게 뚝심을 키워놓자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21이 사랑한 작가들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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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장강명 작가는 약속 시각에 정확히 도착했다. 메릴린 맨슨(미국 록가수)이 그려진 티셔츠에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다. 질문에는 자주 “모르겠습니다”로 운을 떼고는 막힘없이 술술 정리된 생각을 이야기했다. 오래, 깊이, 많은 생각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기자가 사진 찍을 때는 쑥스러운 기색 없이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2시간 예정이던 인터뷰가 시간을 넘겨 길어지는데도 서두르는 기색 없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3시간 만에 녹음 종료 버튼을 누르자, 그는 곧장 일어나 인사하고 돌아갔다. 마감 중인 소설을 써야 한다고 했다. 목적한 바를 열심히 정확히 하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관상은 1도 모르는 내가 봐도 바로 이런 얼굴이 대작을 쓸 상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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