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은 도통 예상하지 못한 일들의 연속이다. 지구에 사는 모든 인간이 신종 호흡기 감염병에 걸릴 수 있다는 세계보건기구(WHO)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선언은 시작에 불과했다. 공포와 혐오의 기운이 완연했던 봄을 지나 여름에 다다르자 전국 곳곳에선 노래기·매미나방 같은 곤충이 떼지어 출몰한 데 이어 역대 최장 폭우가 사납게 쏟아졌다. 이 와중에 이상기후로 홍수가 난 2098년 초가을 변종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닥친 인류멸망 위기사(‘7교실’)를 읽고 있을 줄이야. 지구 재생을 위한 시민혁명이 성공했다는 미래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은이는 소설가 정세랑(36). 그가 구축한 재난과 유머가 뒤범벅된 세계를 헤매며 키득거리다 울컥하고, 울컥하다 키득거렸다.
‘세랑’이라는 작가의 이름
‘인간 세(世), 밝을 랑(朗).’ 난세에 낙관을 이야기하는 작가에게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이 있을까. 한자에 조예가 깊었던 큰아버지가 지어준 본명이다. 작가 서명(사인)을 자세히 보면, 인간 세(世)자와 종종 악어로 오인당했다는 늑대가 그려져 있다. 랑을 ‘늑대 랑’(狼)으로 바꿔 자신을 ‘늑대인간’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장르소설을 쓰면서 말장난한 거예요. 어릴 때 만든 서명인데 계속 쓰고 있어요.”
대한민국을 넘어 우주를 넘나드는 작가의 상상력은 SF(과학소설), 판타지를 비롯한 장르문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84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2010년 1월 장르문학 전문잡지 <판타스틱>에 발표한 ‘드림, 드림, 드림’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 장르문학과 문단문학을 넘나들며 중·장편소설 7권, 단편소설집 2권 등 모두 9권의 책(단편소설 단행본과 공저 제외)을 출간했다. 처음 소설을 쓸 때만 해도 독자 성비가 엇비슷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여성 독자 비중이 늘었다. 올해 6월 출간한 장편 <시선으로부터,>의 경우, 출판사가 파악한 독자 80% 이상이 여성이다. 20~40대 여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이 책은 출간 두 달 만에 7쇄(5만여 부)를 찍었다. SF단편집 <목소리를 드릴게요>도 장르소설집으로는 이례적으로 2만 부(6월 말 기준)가 판매됐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적인 작가가 되고 싶다”던 바람은 현실이 되고 있다.
8월3일 오후 3시, 집 안 식탁에 앉아 있는 작가와 화상 인터뷰를 했다. 집 안 모든 공간이 곧 작업실이다. 친절한 말투와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랜선을 타고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4층 사무실로 날아들었다. 컴퓨터 모니터로는 순간순간 바뀌는 작가의 감정까지 읽어낼 순 없었지만, 2020년에 어울리는 인터뷰였다. 그가 직접 만나기 어렵다는 뜻을 밝힌 건 코로나19 때문이었다. <시선으로부터,>를 출간할 즈음 잡힌 10개 넘는 인터뷰도 모두 서면으로 했다. “혹시 제가 슈퍼 전파 사건을 일으킬까봐 무서운 거예요. 지병 있는 분들이 감염되면 치명적일 수도 있고요. 마주 보고 오랫동안 인터뷰하는 건 (보건 당국이 자제해달라는) 소모임과 다름없으니 최대한 하지 않고 있어요.”
인터뷰하기로 한 건 6월22일,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죽음을 목격하기 전이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시선으로부터,> 속 문장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폭발적으로 공유될 줄은 짐작조차 못했다. 이 문장은 소설 속에서 ‘거장을 파멸로 몰아넣은 아시아 마녀’라는 오명을 쓴 채 평생을 살아야 했던 20세기 여성 예술가 심시선이 남긴 목소리다. 소설 속 문장이 세상으로 툭 튀어나와 두루 인용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작가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문장을 이어나가던 그는 기사에서 자신의 말이 언급되지 않기를 바랐다.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려운 생각이 말로 기사화되고 그 기사가 인용되는 과정에서 오독되거나 오해받는 일을 여러 차례 겪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안과 묶여 작품 언급이 잦을수록 적대심 가득한 악성 댓글(악플)에 노출될 위험도 커진다. 작가는 악플을 최대한 보고 싶지 않아 자신의 신간 기사가 인터넷에 올라와도 열어보지 않는다. “진짜 싫어하는 정치인에게도 악플러는 안 붙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악플이 심각한 문제라고 느낀다.
쓰고 싶은 것만 쓸 수 없게 됐다
한국 사회에 깊숙이 놓인 폭력적 현실은 정세랑의 소설 속 세계에서 중요한 화두로 자리잡고 있다. 첫 장편 <덧니가 보고 싶어>에선 스토킹 범죄, 제7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이만큼 가까이>에선 우발적인 살인이 그려지지만 인물들이 우연히 맞닥뜨리는 사건에 가깝다. 그러나 2014년 세월호 참사와 2016년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 2016년 말부터 터져나온 문단 내 성폭력 고발을 거치면서 소설 속 세상에 사회문제가 적극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한다. 그 무렵 출간한 장편 <피프티 피플> 속 주인공 51명은 가습기살균제 피해, 싱크홀(땅 꺼짐 현상)로 인한 추락 사고, 과적이 유발하는 화물차 교통사고 같은 문제를 직간접으로 경험하는 당사자다. <시선으로부터,>에는 제국주의, 전쟁과 학살의 역사,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 폭력에 대한 방관 같은 더 다층적이고 복잡한 부조리가 녹아 있다.
<피프티 피플>이 나온 2016년 무렵을 작가로서 분기점을 맞은 시기로 볼 수 있는지 궁금했어요.
“그렇죠. 현실 인식이 달라진 것 같아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있는지 몰랐어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기억을 잘할 줄 알았는데, 기억을 훼손하려는 시도도 있었고 그런 점이 너무 충격이었어요. 저는 사실 기본적으로 하고 싶은 게 오락문학이거든요. 연애·추리 소설도 좋고, 판타지 소설도 좋고. 그런데 오락문학만 쓸 수 없게 돼버린 거죠.”
그런데도 <피프티 피플> <시선으로부터,> 모두 비극으로 치닫진 않아요. 좋은 어른이 다독여주기도 하고요. “어렵게 찾아낸 낙관을 조심스레 이야기하고 싶다”(<교보문고 북뉴스> 2018년 1월23일)고 말한 적이 있던데, 세상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것 같아도 낙관할 수 있는 힘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학부 때 전공한 것뿐이지만 역사교육을 공부해서 더 낙관하는 거 같아요. 100년 전과 비교하면 너무나 많은 것이 희망차게 변했으니까요. 1900년대에 태어났으면 인종차별도 더 심했을 거고 투표권도 없었겠죠. 부정적인 걸 기억해야 인류 생존에 도움이 되니까 우리 마음이 그렇게 움직이지만, 객관적 데이터로 봤을 때 세상은 나아진다, 믿고 싶거든요. 물론 기후위기는 정말 큰 위기입니다만.”
행복해지려면 시야를 넓혀야겠군요.
“네, 시선을 멀리 던져야 해요.”
아, <시선으로부터,> 제목에 쉼표를 넣은 것도 그런 생각과 연관이 있어 보이네요.
“마침표가 아닌 쉼표, 계속된다는 의미로 쓴 건데요. 힘들 땐 모든 게 다 끝나버릴 것 같잖아요? 절망이 제일 쉬운 감정이니까 절망에 빠지지 말고 쭉 이어지는 부분을 주목하자는 의미예요.”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21이 사랑한 작가 정세랑② 시선으로부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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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이 사랑한 작가들 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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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의 질문
인터뷰를 준비하며 자료 조사를 해보니 매번 반복되는 질문이 있더군요. 답하는 처지에선 지겨울 수도 있겠다 싶어,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하게 될 수밖에. ‘독자에게서 어떤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느냐’고 물었는데, 작가가 직접 세 질문을 꼽아 답을 보내왔습니다.
1. 이 책의 주제가 무엇인가?
“말씀드리면 읽는 재미가 떨어집니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만들고 싶어요. 읽는 사람마다 주제를 달리 파악하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2.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나?
“아주 일상적으로 얻기도 하고, 여러 정보가 머릿속에서 합쳐질 때 작품의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산책도 많이 하고 독서도 많이 해야 하는 것 같아요.”
3. 작가 본인의 삶은 소설 속 인물에 몇%나 들어가나?
“소설에 나오는 사건엔 거의 반영되지 않고 인물이 지닌 삶의 태도 측면에선 많이 들어갈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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