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이 사랑한 작가 장류진① 계산기 두드리는 여자 귀한 껍데기의 남자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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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비밀이 아닌 소설을 쓰는 일
연봉계약서에 서명하던 그 순간, 씁쓸한 감정이 들 것 같았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나는 정말이지, 진심으로, 기뻤다. 방송국이고 피디고 뭐고 지긋지긋했다. 대신 4대 보험이 어쩌고 하는 말들과 상여금, 특근수당, 연차와 실비보험 같은 단어들이 그렇게나 따뜻하고 푹신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탐페레 공항’)
내 이야기 같고, 내 주변인 이야기 같은 소설 속 인물 중에 장류진과 가장 닮은 인물은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장류진은 모든 인물이 자신과 조금씩 닮아 있지만, ‘탐페레 공항’ 속 주인공이 피디 대신 ‘건실하다고 알게 모르게 소문난 식품회사’에 취직하고 기뻐하는 모습이 자신과 닮았다고 했습니다. “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한 언론사에 합격해서 수습기자 생활을 하기도 했고요. 그러곤 다시 취업 준비를 하고 IT 회사에 들어갔죠. IT 업계에 별생각이 없었는데도,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는데도 취업한 게 너무 좋았어요.” 사람 일은 정말 알 수 없는 걸까요. 기자를 꿈꿨던 장류진은 IT 업계에서 일하게 됐고, 정작 등단하고 싶었다거나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은 없었는데도 지금은 전업작가가 됐으니까요.
소설을 쓰는 일, 그건 내 오래고 오랜 비밀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이상하게 부끄러웠다.(작가의 말)
장류진은 절친한 친구나 가족에게조차 소설을 쓴다는 사실을 숨겨왔다고 했습니다. 자초한 일이면서도 한없이 외로웠다고 해요. 소설을 쓰는 일은 자신에겐 너무나 중요한 일부인데 아무도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회사 생활을 하면서 바쁜 시간을 쪼개가며 이런 비밀을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의외로 ‘마카롱’이라는 단어가 그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등단하고 싶다는 욕심은 없었어요. 사회학도 글을 많이 쓰는 전공이라 대학 다닐 땐 글을 많이 썼는데, IT 업계에 오니 글을 쓸 일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마카롱 만들기를 배우면 마카롱을 집에 들고 올 수 있는 것처럼, 소설 쓰기를 배우면 내 소설을 하나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그래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소설 강좌를 들었고 그때부터 쓰기 시작한 거예요.”
장류진은 요즘 연말 연재를 목표로 장편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 조금이라도 힌트를 얻고 싶었지만 “제 소설은 이런 이야기다 이 자체가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라, 그거 까면 다 까는 느낌”이라며 스포일러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장류진의 첫 장편소설이 기대됩니다. “그게 무엇이든, 계속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작가의 말’에도 쓴 것처럼 저는 장류진이 정말, 계속 써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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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언시생’(언론고시 준비생) 시절, 기억에 남는 글이 하나 있습니다. 한겨레문화센터 언론사 입사 아카데미 수업의 첫날로 기억합니다. 당시 선배 기자였던 선생님은 수강생들에게 다른 언시생이 쓴 글이라며 ‘모범 답안’을 복사해 나눠줬습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현실을 꼬집으면서도 발랄하고 재밌게 잘 쓴 글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언시생에게 묘한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똑같은 언시생일 뿐인데 어떻게 이런 글을 썼을까 하면서요. 이후에도 종종 그 글을 떠올렸습니다. 이렇게 쓰고 싶다, 이렇게 쓰면 언론사에 들어갈 수 있겠지 생각하면서요.
거의 10년 전에 읽었던 그 글이 하나의 장면처럼 머릿속에 선명히 떠오른 건, 엉뚱하게도 장류진 작가와의 인터뷰에서였습니다. 장류진은 ‘나를 작가로 이끈 책을 한 권만 꼽는다면?’이라는 질문에 김애란 작가의 <침이 고인다>에 실린 ‘성탄특선’을 꼽았습니다. “소설은 아니지만 제가 쓴 A4용지 한 장 반 분량의 짧은 글을 국문과 언니한테 보여줬는데, ‘성탄특선’과 연관이 있다며 읽어보라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침이 고인다>를 읽었다가 한국 단편소설에 빠져들었죠.”
그 짧은 글의 내용이 무엇이었냐고 물었습니다. “어린 대학생 커플이 모텔 갈 돈이 없어서 섹스를 못하는 내용이었는데, 모텔촌 불빛이 청춘의 대합실 같다는 내용이었어요. 모든 걸 유예해야만 하는 88만원 세대의 애환을 담았죠.”
앗, 이거 어디서 읽은 글 같은데? 몇 초간의 혼란 끝에 밑도 끝도 없이 “그 글, 언론사 입사 준비반에서 쓴 글 아니냐”고 물었더니, 맞다고 합니다. 바로 장류진 작가가 그때 그 언시생이었던 거죠.
장류진 작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당시 함께 언론고시 공부를 했던 동료 몇몇에게 연락했습니다. 예전에 그 글 생각나냐며, 알고 보니 그 글을 쓴 사람이 장류진이었다고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어렴풋이 그 글을 기억하는 이도 있었고, 전혀 기억하지 못한 이도 있었습니다. 저만큼 그 글을 인상 깊게 읽은 이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저는 장류진이 소설가가 아닌, 20대 언시생 시절에 썼던 글도 좋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때도 장류진의 글은 재미있었고 발랄했으며 현실에 대한 통찰력도 있었으니까요. 이상으로 장류진 작가와 나를 엮어보려는 노력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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