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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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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이 사랑한 작가 황인찬① “영영 이 시로부터는 탈출 못할지도 몰라”

등록 2020-08-22 21:04 수정 2020-08-23 11:06
류우종 기자

류우종 기자

그의 시는 평이한 일상 언어로 말한다. 반복되는 일상의 이면을 관조적인 시선으로 묘사한다. “쌀을 씻”고 “아침에는 아침을 먹”으며 밤에는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무화과 숲’)을 꾸거나 “무사히 양들이 돌아온 것을 보면” 만족해하며 혼자 사는 “희지의 세계”(‘희지의 세계’)를 담담히 보여준다. “잠들어 기댄 어깨가 종점이 되고/ 늙은 나무는 고향집의 은유가 되는// 그런 것이 우리의 일상이었고,/ 이제는 일상 말고는 쓸 수 있는 것이 없었다”(‘식탁 위의 연설’)고 읊조린다. 고독, 우울, 비애, 죄책감으로 흔들리면서도 먹고 자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의 단면을 새삼 다시 보게 한다. 시는 쉬이 읽히지만 언어의 심연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시 여백도 많아 오래 머물고 여러 번 읽어야 한다. 단조로운 세계에 다층적 의미를 담은 시를 쓰는, 그는 황인찬(32) 시인이다.

스물두 살에 2010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한 그는 등단 2년 만에 첫 시집 <구관조 씻기기>(2012)로 제31회 김수영문학상을 받았다. 이 시집으로 심사위원들에게 “언어에게 옷을 입히는 방식이 아니라 언어를 씻기는 방식을 통해 새로운 시적 경험을 선사”하는 “희귀한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는 ‘시인계 아이돌’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젊고 인기가 많다. 시집이 초판 2천~3천 부가 나가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구관조 씻기기>와 <희지의 세계>(2015)는 각각 2만 부가 팔렸고 <사랑을 위한 되풀이>(2019)는 1만1천 부 넘게 나갔다.

햇볕이 쨍쨍한 여름의 한낮에 그를 만났다. 7월17일 서울의 한 카페, 상아색 에코백을 메고 마스크를 한 그가 저벅저벅 들어왔다.

살아가는 것들과 같이 호흡하기 위해서

최근 ‘코로나 블루’를 앓는 이들에게 보내는 안부와 위로의 메시지를 담은 책 <여기서 끝나야 시작되는 여행인지 몰라>(알마 펴냄, 6월30일 출간)의 공동저자로 참여했습니다. 이 책에 ‘외투는 모직 신발은 피혁’과 ‘인화’ 두 편의 시를 담았네요.

앤솔러지(같은 주제를 다룬 작가의 작품들을 모은 선집) 기획이 재미있으면 어지간하면 다 참여하는 편이에요. 이번에는 코로나19라는 현재 상황을 다룬 거라 기꺼이 함께했어요. 제게 글쓰기는 지금 보고 듣고 살아가는 것들과 같이 호흡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까요.

코로나19라는 위기 상황이 작가들의 창작 작업에도 영향을 많이 끼치나요.

작업환경 측면에서 보면, 제가 카페에서 글을 쓰는데 요즘 카페에 오랫동안 편하게 앉아 있기 어려워요. 그래도 카페를 찾고 그곳에서 마스크를 내내 끼고 작업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우리가 통과하는 코로나 시대를 최대한 예민하게 감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것이 어떤 감각인지는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고 시간이 지나야 무엇인가가 선명하게 나오지 않을까요. 우리가 같이 이 시절을 통과하면 알게 되겠죠, 이게 뭐였는지를.

올해 등단한 지 10주년을 맞네요. 10년이란 숫자가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왜 (등단한 지) 10년인지 당혹스러워요. 10년이면 충분히 성숙한 시인이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여기서 10년이 더 간다 해도 성숙해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등단한 지) 10년이 되니 하네요. 시 쓰는 일을 이렇게 하면 되겠다고 할 만한 생각을 아직 못 찾아낸 것 같아요. 앞으로도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채 항상 당혹스러워하면서 시 쓰기를 하고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해요.

20대 초반에 등단해 여러 매체에 소개될 때마다 ‘젊은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더군요. 시인인 자신을 향한 편견을 마주할 때가 있나요.

‘이렇게 젊은 사람이 시인인 줄 몰랐다’ 이 말을 10년째 듣고 있어요. (웃음) 사람들은 시인이라고 하면 너무 나이 많은 어른이거나 죽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기억하나봐요. 어떤 분들은 시인이라고 하면 윤동주 아니면 이상만 떠올려요. 지금 시인들은 지사(志士)도 아니고 광기에 사로잡힌 천재도 아니거든요. 다만 특별한 방식으로 삶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시인인데. 여전한 편견을 깨기 위해 앞으로 (시인들이 독자에게) 더 많이 다가가야겠죠.

평이하게 읽히면서 들키지 않는 시

당혹스러운 1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한해 한해 그의 고민이 쌓여간다. 대체 좋은 시란 뭘까, 우리에게 필요한 시는 뭘까, 좋은 시가 되는 데 필요한 것은 뭘까. 그것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없다”고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대신 그걸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한다. 세 번째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에 시 창작에 관한 ‘메타시’가 많은 것도 그의 끊임없는 성찰과 반성에 기인했을 테다.

그는 처음부터 시인을 꿈꾸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배수아 작가의 소설 <철수>를 읽고 무감하고 무정한 사람의 무감각한 이야기에 매혹됐다. 이 소설을 계기로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 진학 뒤 우연히 보게 된 신대철 시인의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1977)를 읽고 시를 사랑하게 됐다. 그는 이 시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와, 아름답다”고 느꼈다. “이 시집이 가진 아주 연약하고 또 매우 예민한 감각들”에서 시의 아름다움에 눈뜬 그는 시와 가까워지고 시를 썼다.

<나는 매번 시 쓰기가 재미있다>(2016)에 실린 글을 보면 “시는 오지 않는다. 영감을 믿지 않는다”며 “메모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메모에서 시가 시작되나요.

다른 작가들도 그럴 텐데 항상 메모해요. 갑자기 떠오른 말, 지나가다 본 것, 들려온 말을 적어요. 그것에서 시가 출발해요. ‘화면보호기로서의 자연’의 경우 군대 훈련소에서 들었던 말에서 탄생했어요. 군대 훈련소에서 밥을 먹으려고 줄 서서 기다리는데 앞에 두 명의 병사가 “저 나무 멋있지 않아요?” “무슨 나무 말씀하시는 거예요?”라고 하는 거예요. 그 장면, 그 말이 인상 깊었어요. 그땐 휴대전화에 메모할 수 없으니 밥 먹는 내내 그 말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기억했다가 나중에 적어두었어요.

그러면 일상 언어 중 시어가 되고 안 되는 기준이 있습니까.

모든 게 시어가 될 수 있어요. 정확하게 쓰일 수 있으면 무슨 말이든 가리지 않고 쓰는 편이에요. 친구와의 대화, 농담도 시에 들어가요. 정확하게 쓰여야 하니까 관념어는 멀리하고 일반명사를 자주 사용해요.

시를 쓸 때 나만의 원칙이란 게 있나요.

평이하게 읽히면서 들키지 않는 시를 쓰려고 해요. 그게 시를 빨리 소진하지 않는 길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과 폭넓고 깊게 오래 소통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쉽게 접하고 그 안에서 계속 이게 무엇이었을까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이, 말하자면 시를 오랫동안 살려두는 일인 것 같아요. 저는 일종의 ‘투 트랙’ 전략을 써요. 두 개의 치밀을 만드는 겁니다. 누구든 기본적으로 쉽게 들어오고 감각하고 즐길 수 있는 층위를 만들고 그다음에 더 깊은 소통이 가능한 층위를 그 안에 같이 배치해요. 저는 보고 배우고 생각할 여지를 만들어주는 게 문학의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사람이 있구나’ ‘이런 일이 있구나’ ‘이런 감각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우리가 몰랐던 감각이네’를 느끼게 하는 거죠. 스스로 아는 걸 다시 볼 수 있게 하고 생각할 수 있게 하고.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마주했을 때 새로움도 있을 수 있고요.

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

그의 시는 건조한 언어를 반복해 배치한다. “멍은 멍이고/ 멍하면 멍 짖어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작은 새가요//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멍하면 멍’) 한다든가, “슬픔은 인생의 친척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인생은/ 슬픔의 친척이 되는 것이겠지요”(‘죄송한 마음’)라고 시는 말한다. 그러면 무엇을 잘못했다는 걸까, 슬픔과 친척의 관계는 어떻게 맺어지는 걸까. 시는 메시지를 직접 말하지 않고 읽는 이가 그 메시지를 찾도록 한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 있는 “백자”(‘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교탁 위에 놓여 있는 리코더”(‘레코더’)라는 시적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택하며 독자들도 함께 그 대상을 조망하게 한다.

시를 읽으면 교실이나 지하철, 공원 등 일상의 여러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독자들이 시를 읽었을 때 그림이 비교적 잘 그려지게 애쓰는 편이에요. 일단 그림이 그려지면 그다음엔 그 그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충분히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거든요.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최대한 넓혀둬요. 하나의 장면, 하나의 공간이 중심이 돼서 넓어지거나 연장되거나 하는 방식으로 시를 만들어내는 편이죠. 그렇게 하는 방식이 시를 읽는 분들이 편하게 들어온다고 생각합니다.

시집에는 ‘구조’ ‘말종’ ‘개종’ ‘구원’ 등 짧은 명사형 제목의 시가 유독 많습니다. 그중 교실에 리코더가 있던 장면을 회상 방식으로 보여주는 시의 제목은 ‘레코더’라고 지었네요.

두 글자 한자어를 시 제목에 많이 썼어요. 한자어는 여러 뜻을 담을 수 있잖아요. ‘레코더’의 경우 리코더가 있는 풍경을 거리를 두고 관찰하듯이 심지어 시간을 두고 회상하듯이 이뤄진 시잖아요. 그래서 ‘리코더’가 아닌 ‘리코더’에 관한 ‘레코더’이기에 제목을 ‘레코더’라 지었어요. 이런 식으로 말이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엇나가는 것이 재미있는 게 많아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면/ 이것은 아름다움이 아니군요// 이 시는 군대에 있는 동안 다시 써낸 시입니다/ 이 시는 군대에 있는 동안 발표할 수 없던 시입니다” 시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라는 각주가 달린 유일한 시입니다. 각주에서 2017년 4월에 열렸던 성소수자 촛불문화제의 슬로건인 ‘변화는 시작됐다,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에서 이 시의 제목이 나왔다고 명시했습니다. 이 시에 각주를 단 의미는 무엇입니까.

어지간하면 각주를 안 달아요. 굳이 밖에 테두리를 쳐서 각주를 다는 게 시의 텍스트에 끼어드는 것 같으니까요. (각주를 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는 그걸 명확하게 이 시의 재료가 된 것을 지시하는 편이 맞는 것 같았어요. 이 시는 예외적으로 각주를 달았어요.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뿐 아니라 ‘무화과 숲’ ‘떡을 치고도 남은 것들’ 등 동성애를 은유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표현했습니다. 2017년에는 퀴어 시인들의 사랑시를 모은 <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의 엮은이로 참여했고요. 시라는 장르로 ‘퀴어문학’을 만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퀴어라는 성정체성은 나를 이루는 요소예요. 한국 사람이고 남성이고 30대라는 것과 동일한 수준으로요. 그 성정체성이 창작에도 자연스럽게 반영되겠지요. 퀴어 독자한테는 자신을 위한 글이 별로 없어요. 언제나 자신의 것이 아닌 이야기에 몸과 마음을 맞춰야 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퀴어 텍스트가 전면에 나오는 <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 앤솔러지 작업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참여했어요.

허윤희 <한겨레> 기자

*21이 사랑한 작가 황인찬② ‘언어 씻기기’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127.html

*21이 사랑한 작가들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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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의 교실

황인찬 시인의 시에는 ‘교실’이 유독 많이 나온다. “섬망도 망상도 없는 교실”(‘레코더’)이거나 “학교의 난방시설이 온통 고장 나는 바람에 입을 열면 하얀 김이 허공으로 흩어지던 저녁의 교실”(‘겨울 메모’), 혹은 “앞으로 벌어질 마음 아픈 일들을 알지 못하는 방학 직전 어느 날의 교실”(‘재생력’)이 그려진다.

그가 시 속으로 교실을 부른 이유는 “모두가 경험한 공간이자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공간”이어서다. 그러기에 “적게 말해도, 넓게 말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교실이 품은 의미도 많다. 천편일률적인 교육, 권위의 구조, 수평적이거나 수직적인 관계들, 성장, 결핍 등 다층적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

시의 교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시인 12명이 십대 시절을 주제로 함께 엮은 시·산문집 <교실의 시>(2019)에서 그는 “나는 내가 겪은 교실의 풍경보다는 영화나 애니메이션, 만화 등에서 재현되는 교실의 이미지를 다시 재현하기를 선호한다”며 “그편이 다른 이들에게 교실을 더욱 쉽게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교실은 곧 모두의 십대 시절을 소환하는 매개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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