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영(39)은 지옥도를 그리는 데 능하다. 그가 종이 위에 펼쳐내는 세상은 자주 끔찍하다. 가정폭력이 아무렇지 않게 휘둘러지는 세계, 이미 멸망을 맞은 이후의 세계, 성폭력 가해자가 말쑥한 얼굴로 피해자 앞에 서는 세계, 돈 때문에 멈추지 못하고 영영 달아나야만 하는 세계. 그게 최진영이 그리는 세계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세계는 아름답다. 끊임없이 허리와 마음이 꺾일 수밖에 없는 삶을 살면서도, 사람과 사랑을, 그리고 끝내 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가 그린 세계 속에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가 머무는 공간은 작품 속 풍경과 달리 고요했다. 비가 끝없이 내리던 7월24일, 단정하고 소담한 충남 천안 자택에서 작가 최진영과 마주 앉았다. 2010년 발간된 소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책날개에는 이런 소개가 있었다. “등단 2년 후부터는 낮에는 글 쓰고 밤에는 푹 자는 생활을 했다.” 올해로 등단 15년차인 그에게, 10년 전 소개글을 돌려주었다.
그냥, 계속 쓰는 삶
2020년에도 여전히 그 생활을 지켜가고 있나요.
“저는 해 떠 있을 때 활동하고 밤엔 자는 게 좋아요. 밤 12시에 자고 아침 9시에 일어나요. 이 생활을 오래 하려면 그런 루틴(습관)을 지켜야 하는 것 같아요. 큰 변화 없이 살아요. 뭘 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러시아가 배경인 <해가 지는 곳으로>를 쓸 때도 책상 앞자리를 굳게 지켰다. 구글어스(위성사진 제공 서비스)를 켜놓고, 드넓은 러시아 땅을 향해 마우스 휠을 열심히 굴리며 ‘도리’와 ‘지나’가 가로지를 땅을 상상한 다음 글을 써내려갔다고 했다. 그의 생활에는 큰 자극이 없다. 넷플릭스나 유튜브도 안 보고, 취미도 딱히 없다. 다만 날마다 꼭 한두 시간씩 걷는다. 걷다보면 여러 생각이 정리되고 스트레스도 풀리기 때문이란다. 단순하지만 규칙적인 리듬으로 하루를 채우는 사람 특유의 내공이 느껴졌다. 생활을 잘 챙기는 비결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어릴 때부터 엄마 아빠가 맞벌이로 늘 바빴어요. 모든 걸 알아서 해야 했어요. 밥도 알아서 먹고 숙제도 알아서 해야 했고. 그때부터 훈련됐던 거 같아요. 삶의 자원 같은 거죠. 가끔은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주는 선물도 있더라고요. 과거에 큰 생각 없이 버텼던 시간 덕에 미래의 내가 덕을 보기도 하는 것 같아요.”
최진영은 2006년 <실천문학>에서 단편 ‘팽이’로 등단했다. 26살 나이, 일찍 등단했지만 청탁도 없고 투고해도 잘되지 않아 불안해하던 차, 그는 본격적으로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장편을 쓰기 시작했고, 첫 장편이 2008년 한겨레문학상 본심에 올랐다. ‘이거 되는 건가’ 싶었다. 2009년 완전히 새로운 걸 썼을 땐 예심 통과도 안 됐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자란 생각으로 쓴 이야기가 2010년 당선됐다. 처절한 삶을 살아내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담은 장편소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이다.
최진영의 소설에는 1인칭 시점이 자주 등장한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에서도, 2020년 초 테마소설집 <몬스터-한낮의 그림자> 속 단편에서도, 그의 이야기 속 인물들은 ‘나’로 시작하는 문장을 발음해낸다. 그래서인지 최진영의 작품을 읽을 때면 조곤조곤 이야기를 쏟아내는 인물과 눈 맞추며 마주 앉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깊고 진한 감정선을 가진 인물들의 서사를 써내는 특별한 방법이 있냐고 물었을 때, 그는 특유의 담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냥 쓰는 거예요.” 마감을 지키고, 정해진 만큼 써나가는 것. 그게 그의 방법이었다.
“제 삶은 온종일 소설을 생각할 수 있는 삶이에요. 눈떠서 잠들 때까지 소설만 생각해도 괜찮은 삶이기 때문에, 장편을 쓸 때는 최대한 빨리 써요. 미루지 않아요. 이야기를 기획하고 나서, 이게 늘어지면 안 좋을 거란 직관이 있어요. 장편을 쓸 땐 소설만 생각해요. 그리고 빨리 끝내요.
저를 늘 비슷한 루틴대로 살게 하는 건 눈앞의 마감이에요. 마감을 지키다보면 책이 나오더라고요. 저는 마감은 꼭 지켜요. 편집자 입장에서 약속을 잘 지키는 저자와 약속에 늦더라도 좀더 좋은 원고를 주는 저자 중 누가 더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하루이틀 원고를 더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고 생각해요. 잘될 거였으면 진작 잘 썼겠지, 싶어요.”
소설을 쓸 때 끝까지 기획해두고 쓰는 편인가요.
“기획해도 소용없어요. 문장으로 쓰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나가는 방향이 따로 있어요. 저는 최대한 느슨하게 해놓고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다는 주의로 쓰는 편이에요. <해가 지는 곳으로>에서도 생각했던 지나보다 소설 속 지나가 더 진하게 나왔어요. 쓰다보면 개연성이 부여되는 순간이 있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요. 미소 같은 캐릭터도 도리의 동생이다, 정도로만 생각해두고 시작했는데 쓰다보니 미소의 영역도 커지더라고요. 좋은 방향이죠. 강화가 되는 거니까.”
그래서인지 그가 만든 인물들은 주·조연을 막론하고 늘 살아 숨 쉬는 듯하다. 누구를 위해 살아 있지 않고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품고 살아가는 인물들이 늘 최진영의 세계를 채우고 있다.
‘좋아요’는 아이러니하고 친한 척도 싫어요
쓰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원고를 보여주거나 의견을 묻기도 하나요.
“언제나 편집자가 첫 독자예요. 물론 내가 쓰는 방향이 맞는지 모르니 두렵고 확인받고 싶죠. 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 친구가 조언한다고 해도, 사실 제가 그 말을 들을까 싶기도 하고요. 누구 말 듣는 사람도 아니고. (웃음) 원고를 보내고 나면 번뇌가 시작되죠. 나한테는 말이 되는 이야긴데 남들 보기에도 말이 되나 하는 두려움이 늘 있어요. 어릴 땐 눈치를 덜 봤던 거 같아요. ‘그냥 하면 되는 거 아니야?’ 하고 썼는데 나이 들수록 내가 놓치는 게 있을 거 같단 걱정이 커요. 내가 잘못하는 거 아닐까, 무언가를 놓치고 오해하는 거 아닐까 하는 불안이 있어요. 매번 내 인생의 망작을 쓴 것 같고. (웃음)”
책이나 작가에 대한 감상도 유튜브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표현하는 게 자연스러운 시대다. 하지만 최진영 작가는 SNS를 하지 않는다. 공개된 블로그나 트위터도 없고, 인스타그램 계정도 없다. 이른바 ‘에고 서치’(SNS에서 자기 이름을 검색하는 행위)를 해본 적 있냐고 다소 짓궂은 질문을 던졌더니 의외의 답이 빠르게 돌아왔다. “당연히 해봤다”고. 누군가 나쁘게 말하더라도 그것 역시 꼭 들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최진영은 스스로를 설명했다.
SNS는 왜 안 하나요. 요즘엔 홍보하기 위해서라도 하는 작가가 많은데요.
“뭔가 계속해야 하는 작업이잖아요. 나를 전시하고, 사진 찍고 멘트를 하려면 정성이 드는데 그걸 계속할 자신이 없어요. 술 마시고 실수할까봐 안 하는 것도 있고요. 일기장에 쓴 건 정신 차리고 찢으면 되는데 인터넷에 쓴 건 찢을 수 없으니까요. 내가 지금 고통스럽고 아프다는 걸 올리면 거기에 ‘좋아요’를 누르는 게 아이러니하고 이상하기도 해요. 관심을 표현하는 방법이 ‘좋아요’밖에 없는 거잖아요. 나는 차마 ‘좋아요’를 누를 수 없는데, 좋지 않은데… SNS로 친한 척하는 것도 싫었어요. 우린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그곳에선 관심과 좋아요로 친한 사이가 되는 거잖아요. 잘 모르는 존재들인데, 우리는 서로가 전시한 어떤 것을 본 사이일 뿐인데. 그런 방식으로 ‘친하고’ 싶지 않았어요.”
천다민 유튜브 <채널수북> 운영자
*21이 사랑한 작가 최진영② ‘지옥도’와 루틴으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123.html
*21이 사랑한 작가들 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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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의 편애
혼술을 즐긴다. 밖에서 취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술을 마실 때만 순간 친해지는 느낌이 싫어 낯선 이들끼리 모여 노는 술자리엔 잘 가지 않는다. 20대에는 아예 술을 가까이 두지 않다가, 30대 들어 보드카에 입문했다고. 건강을 위해 점점 약한 술로 옮겨가다 지금은 맥주를 즐겨 마신다.
우주와 심해 공간을 좋아한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글을 쓸 때 더 편안함을 느낀다. 언젠가 우주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써보고 싶다. 공포소설, 퇴마 이야기에도 도전하고 싶다.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사랑과 글쓰기다. 둘 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글쓰기를 고를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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