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이 사랑한 작가 황인찬① “영영 이 시로부터는탈출 못할지도 몰라”에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126.html
퇴고는 없어요
시가 써지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나요.
안 써질 때는 방법이 없어요. 될 때까지 앉아 있을 수밖에 없어요. 썼다 지웠다 그 수밖에 없어요. 스스로 어떤 것을 찾아낼 때까지 들여다봐야 하니까. 갑자기 영감이 번뜩여 모든 게 해결되는 일은 없어요. 계속 고민하고 다듬고 조율하면서 만들어내는 것이라서요.
시 한 편 완성하기까지 몇 번의 퇴고 과정을 거치나요.
퇴고를 못해요. 그 전에 스스로 못 만질 때까지 만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못한다, 더 이상 지금 나로서는 다듬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그 시에서 나와요. 보통 시 한 편을 쓸 때 2주 정도 걸려요. 2주 동안 여러 편의 시를 품고 있어요. 한글 창 여러 개를 열고 이거 봤다가 저거 봤다가 그런 과정이 반복돼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열심히 하고 낭독회 등 다양한 행사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독자들과 만남을 자주 갖는 것 같습니다. 현재 배우 김새벽과 EBS 오디오 방송 <김새벽 황인찬의 시로 만난 세계>를 진행하고 있고요. 오디오 방송으로 독자를 만나는 시간은 어떤가요.
내가 쓴 시를 이 사람들이 읽어주는구나 확인하는 시간이에요. 그게 오디오 방송을 하며 얻는 가장 큰 수확이에요. 그 사람들을 첫 번째로 염두에 두고 시를 쓰는 건 아니지만, 독자를 확인하고 같이 호흡하는 게 시 쓰기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오디오 방송뿐 아니라 다양한 자리에서 시를 낭독하는 행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낭독하며 만나는 시는 쓰면서 만나는 시와 다른가요.
시는 기본적으로 혼자 속으로 읽는 묵독을 하는 장르예요. 시 자체가 소리 내어 읽히는 걸 염두에 두고 쓰이지도 않고요. 그래서 소리 내어 읽으면 전혀 다른 호흡으로 다가와요. 예를 들어 제 시를 혼자 읽을 때는 깨달을 수 없었던, 느낄 수 없었던 것을 포착해요. 묵독이 아니고 낭독이 되면 소유에서 공유로 바뀌는 거잖아요. 그런 면에서 낭독은 시를 특별하게 활용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 흥미로워요.
‘낭독 장인’이라던데 낭독을 잘하는 비법이 있나요.
별다른 것 없어요. (웃음) 제 시를 읽을 때는 낭독 연습을 하지 않아요. 그러나 남의 시를 읽을 때는 연습해요. 속으로든 작게 소리 내어 읽어요. 시의 행과 연을 그대로 따라 읽으면 안 되거든요. 시의 행이 끊겼다고 끊으면 귀에 잘 들리지 않아요. 시 자체가 잘 들리도록 만든 구성이 아니라서 어떻게 읽어야 자연스럽게 들릴지 생각해요.
시의 ‘쓰잘데기’란 뭘까
<창작과 비평> 2020 봄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시가 어디 ‘쓰잘데기’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습니다. 시가 이 세상에 어떤 ‘쓰잘데기’로 남았으면 좋겠나요.
그 ‘쓰잘데기’가 무엇인지 계속 고민해요. 시가 기본적으로 불투명하고 부정확하고 쓸데가 없는, 돈도 안 되고 명확한 언어도 아니에요. 그럼에도 시는 존재하고 시와 함께 살아가는 걸 선택한 제가 있고요. 이 시가 쓸모 있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항상 살면서 개인적으로 내 삶에 이게 무슨 소용일까 고민하고 혹은 공동체에 시라는 게 어떤 특별한 기능을 할 수 있을까, 어떤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예전과 달리 시의 기능에 대한 믿음이 약해졌으니, 그렇다면 이제는 새로운 쓸모를 다시 한번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시인으로 살아가며 시에 관한 생각이 변했나요.
10년 전에는 시의 새롭고 아름다운 것을 많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아름다움, 새로움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이 세상에 많다는 것을 더 생각해요. 예전에 저한테는 세상에 시밖에 없었고 시가 제일 중요했다면, 이제는 시 자체가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니고 시가 제일 아름다운 것도 아니라는 걸 더 깊이 느끼죠. 물론 시는 지금도 아주 중요한 내 삶과 같이 가는 것이고요. 시만큼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이 세상에 많아졌다는 걸 더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 시는 겨울에 생각하는 여름밤에 대한 시/ 출출한 밤이 오면 생각나는 시,// 똠은 끓이고, 얌은 새콤하고, 입맛 없을 때 아주 좋은 시// 놀 거 다 놀고, 먹을 거 다 먹고,/ 그다음에 사랑하는 시// 상상만 해봤어요”(‘레몬그라스, 똠얌꿍의 재료’)
깊이를 향해 움직이고 싶은 적은 없어요
올해 남은 시간 동안 그는 무엇을 할까. 그는 “일단 시를 열심히 쓸 거고. 그리고 원래 올해 산문집을 내야 하는 데 못 쓰고 있어요. 계속 미루고 있네요. 큰일이에요. 시가 항상 우선순위에 있으니 산문은 뒤로 밀리나봐요”라고 말했다.
그는 그의 중심에 있는 시로 세상과 접촉면을 넓히고 싶다. “등단했을 때 ‘웅숭깊은 상처가 없다’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요, 저는 깊어질 수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고요. 제 시가 깊이를 향해 움직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요. 깊은 것보다는 레이어(층위)가 많은 그것이 제 시가 하고 싶은 일인 것 같아요.”
더 많은 층위를 담은 시로 다가가고 싶은 마지막 말끝에 그의 시가 맴돈다.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이 이 시에 담겨 영영 이 시로부터 탈출하지 못한다면 좋겠다”(‘그것은 가벼운 절망이다 지루함의 하느님이다’)
허윤희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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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3년 전이었다. 2017년 여름, 퀴어 작가들의 사랑시를 모은 시집 <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큐큐)를 엮은 황인찬 시인을 인터뷰하려다 못했다. 그때 마침 그는 군대에 입대했다. 시간이 흘러 2019년 제대하고 세 번째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를 내고 활발히 활동하는 그를 2020년에 만날 수 있었다.
“<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 나왔을 때 인터뷰하려 했어요.”(기자)
“아, 네. 하하하. 그때 그걸 마지막으로 하고 바로 군대에 갔어요. 그 시집 관련 행사를 하나도 못했어요.”(황인찬 시인)
사회에 복귀한 그는 오디오 방송, 강의, 출판 행사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시 쓸 시간이 없을 정도로” 외부 일정이 많다. 대학에서 시 창작 강의도 하는데 코로나19로 온라인수업을 준비하느라 진땀 뺐다. “온라인강의를 준비하느라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없어 여러 일정을 미뤄놨어요. 원래는 방학 기간에 좀 놀아볼까 했는데 미뤄놓은 일을 하느라 그러지 못하네요.”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준 그는 솔직하고 겸손했다. “간접화, 아니 형상화. 이게 정확한 표현인가.” 인터뷰 중간중간 자신이 한 말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했다. 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귀찮을 수 있는 부탁도 흔쾌히 들어주었다. 서재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사진 찍을 때 밤에 빨간빛이 나을까요, 노란빛이 나을까요? 아니면 낮에 자연광이 나을까요?”라고 사진 조명까지 꼼꼼히 체크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주말에 대청소를 해야겠다”는 그는 독립을 못하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책이 많은 그가 집에서 가장 넓은 방을 쓰고 있단다.
서재에 아끼는 물건을 놔두냐고 물었더니, 그는 물건에 “애착이 없는” 편이라고 했다. 대신 “밀착하는” 물건은 있다고. 그의 밀착 물건은 포켓몬, 동물 인형이다. “인형은 예쁘고 귀엽잖아요. 그래서 좋아해요. (인형을) 끌어안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책 읽을 때 인형을 안거나 발꿈치 받침용으로도 써요. 그 인형도 찍어서 보내드릴게요. (독자들이) 인형 사진이 나오면 ‘이게 뭐지’ 하겠네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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