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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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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이 사랑한 작가 정세랑② 시선으로부터,

등록 2020-08-22 21:38 수정 2020-08-24 10:54
이정우 선임기자

이정우 선임기자


*21이 사랑한 작가 정세랑① 행복하려면 시선을 멀리에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128.html

지구는 기적으로 가득한 곳

모니터 너머 공간에는 작가 혼자만 숨 쉬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의 휴대전화 카메라를 반대편으로 돌리자 크고 작은 식물 11종이 모습을 드러냈다. 식물뿐 아니라 새도 좋아한다. 가장 행복한 일은 새를 보러 가는 것이다. 2019년 대만에서 청호반새의 아름다운 움직임을 보고 난 뒤, 사후 저작권과 쓰고 남은 재산을 야생동물 보호 재단에 기부하겠다고 결심했다.

새 보는 걸 좋아하는 이유가 특별히 있을까요.

“너무나 다양한 새가 존재해서요. 같은 새라고 해도, 펠리컨과 참새는 아주 다르잖아요. 전 지구가 기적으로 가득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중 생물다양성이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거 같아요. 어떻게 저렇게 진화했지? 어떻게 저렇게 다양하지? 가까운 우주는 다 죽어 있고 아무도 살지 않는데 지구는 정말 생명으로 가득한 게 놀라워요. 지구가 몇 번이나 멸망할 만도 했는데 안 망하고 지금까지 우주 공간을 날아다니며 사는 게 대단한 것 같아요.”

그렇기에 기후위기와 환경 파괴는 작가에게 아주 심각한 문제다. 제주도 앞바다에서 스노클링을 하면서 쓰레기가 늘어나는 걸 체감하고 있다. 일회용품을 최대한 덜 쓰고 옷도 새로 사지 않고 고쳐 입는다. 자신의 책을 어떻게 하면 친환경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고민 중이다.

“23세기 사람들이 21세기 사람들을 역겨워할까봐 두렵다. 이 비정상적이고 기분 나쁜 풍요는 최악으로 끝날 것만 같다.”(<목소리를 드릴게요> 작가의 말)

참혹한 현실이 녹아들어도, 정세랑 소설은 재밌게 읽힌다. 일단, 선하고 명랑한 사람들이 대거 등장한다. 폭력을 휘두르는 악당도 있지만, 이들은 절대 작가가 그리는 세계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세상이 나쁜 사람들 이야기를 너무 잘 받아 적어준다고 생각해요. 연쇄살인범을 미화하는 작품도 많고요. 기왕이면, 시민으로 기능하는 사람들의 말에 집중하는 작품을 쓰고 싶어요.” 작가가 나쁜 사람들에게 판타지와 서사를 부여하지 않는 이유다. 평생을 걸어 하고 싶은 이야기도 ‘평범한 선의’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소설 속 인물들은 대체로 “죽겠다, 힘들다, 피곤하다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사실 의욕에 넘치는”(<보건교사 안은영>) 성실한 직업인이다. 작가가 생명을 불어넣은 존재들은 이름도 거의 겹치지 않는다. 고유한 이름과 직업을 가진 이들은, 현실 어딘가에서 열심히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보이지 않게 자기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매혹되는 것 같아요. 저 사람은 어쩌다 그 직업을 갖게 됐을까, 그런 상상이 늘 재밌어요.”

실패는 남는 게 있다

그 역시 소설가라는 직업을 갖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장래희망은 ‘회사원’이었다. 역사교육과 국문학을 복수 전공하던 대학 시절엔 광고마케팅 관련 인턴을 했다. 2007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어린이책을 만들려 어린이책 전문 출판사에 편집자로 입사했지만, 회사 사정으로 일반 단행본 편집자가 된다. 소설책과 시집을 만들다보니 내 글도 쓰고 싶어졌다. 2년 동안 소설상 공모전 문을 두드렸지만 철옹성이었다. 2010년 장르문학 전문잡지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뒤 4년간 ‘투잡’을 뛴다. 생계 때문만은 아니었다. “회사일을 좋아했어요. 다른 사람과의 협업도 즐거웠고요. 한편으론 전업 작가가 되면 혼자 다 책임져야 하는데 그런 점이 두렵기도 했죠.” 되도록 회사일과 글쓰기를 병행하려 했지만 체력이 받쳐주지 않았다.

그렇게 10년차 소설가로 안착한 그는 다시 신인이다. 넷플릭스에서 공개될 예정인 <보건교사 안은영> 드라마 극본을 맡았다. 지치지 않고 글을 써내는 작가는, 회사에 출퇴근하듯 규칙적으로 생활한다. 오전엔 원고를 쓰고 오후엔 칼럼 같은 짧은 글을 쓰거나 전날 쓴 글을 고치는 ‘루틴’(매일 반복하는 행동)을 유지해왔다. 인터뷰하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어떤 글을 썼나요.

“오전에 드라마 대본 마감이 있었어요. <보건교사 안은영> 다음 작품인데 아직 초반 작업 단계예요. 영상도 많이 좋아해서 드라마도 계속 쓰고 싶어요. 소설은 저 혼자 하지만 드라마는 협업이라 다른 매력이 있더라고요.”

드라마와 소설 쓰기는 완전히 다른 작업이라 적응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적응하는 데 1년 이상 걸린 것 같아요. 시간과 공간을 쓰는 법이 완전히 달라서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느낌이었어요.”

그런데도, 결국 하셨네요.

“새로운 경험에 열려 있는 편이에요. 하고 후회하는 게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나은 거 같아서. 실패는 그 자체로 남는 게 있어요. ‘아, 이게 나와 맞지 않는구나’ 확인할 필요는 항상 있거든요. 예를 들어 가사를 잘 쓰는 사람인데 장편소설을 쓰고 있으면 난감하겠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작가는 먼 미래에 ‘한국문학에서 가장 엉뚱한 일을 많이 벌인 소설가’로 기록되고 싶다.

정세랑 제공

정세랑 제공


인생의 예상 못한 감정을 소설로

글을 쓰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늘 읽는 독자다. “쓰다 멈춰질 때는 ‘쓰는 게 문제가 아니라 덜 읽었구나 싶어’ 정말 책을 많이 산다.” 그는 좋은 책을 발견하면 남들에게 권하는 ‘프로추천러’이다.

읽는 행위가 주는 선물은 무엇일까요.

“체가 촘촘해지는 느낌을 주는 건 독서밖에 없는 것 같아요. 몰랐던 사회적 사건이나 역사, 문화를 알아갈수록 평소 느끼는 게 달라지듯 놓쳤던 것을 놓치지 않게 촘촘함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큰 즐거움이자 살면서 목표이기도 해요.”

그렇다면, 소설은 어떤가요.

“김영하 작가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는데, 표현력 좋은 사람이 여러 감정을 잘 이겨내는 것 같아요. 모국어로 된 소설을 많이 읽어두면 예상하지 못한 복잡미묘한 감정이 찾아왔을 때 이를 잘 넘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인생은 예상하지 못했던 감정으로 가득하니까, 대비를 소설로도 하는 거죠.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소설 속 표현이 도움될 때가 있거든요.”

정세랑 작가의 책을 한창 읽던 7월 말부터 인터뷰 기사를 마감하는 8월11일까지 줄곧 비가 내렸다. “비가 오면 지렁이는 익사를 피하기 위해 땅 위로 올라와요. 땅이 물에 찼으니, 익사했을 거예요.” 작가가 일러준 이야기다. 거대한 지렁이가 과잉생산과 소비로 얼룩진 인류 문명을 갈아엎는 ‘리셋’을 쓸 당시 참고했다는 <지렁이, 소리 없이 땅을 일구는 일꾼>(달팽이, 2005)에 따르면, 지렁이는 땅을 비옥하게 하고 음식물 쓰레기와 분뇨를 정화해준다. 이상한 폭우가 내리는 동안, 성실하게 일하던 생명들이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21이 사랑한 작가들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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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정세랑 작가의 시선을 훔쳐보고 싶었습니다. 소설가에겐 같은 걸 보아도 다른 걸 감지해내는 촉이 있을 것 같았거든요. 성희롱과 접대문화가 일상인 회사의 옥상(‘옥상에서 만나요’), 홍익대 앞 랜드마크 청기와 주유소(<청기와 주유소 씨름 기담>), 기억을 잃은 할머니에게 3시간만이라도 정보를 전하고 싶었던 순간(‘리틀 베이비블루 필’)처럼 익숙한 공간과 경험을 시작으로 이야기가 꿈틀꿈틀 자라나니까요. “늘 어떤 신호에 열려 있는 것 같아요. 시내에 큰 행사가 있어 버스가 원래 가던 길로 가지 않고 돌아가는 상황처럼 일상이 조금만 달라지면 그런 것들이 재미있어지는 거죠.”

무엇이 그렇게나 재밌을까요? 얼마 전 길에서 운동화 끈을 묶고 있는데, 푸들 한 마리가 갑자기 달려와 아는 척을 하더랍니다. ‘아, 이 푸들의 사연은 무엇인가. 왜 나에게 아는 척하는 건가.’ 살펴봤더니 푸들을 산책시켜주는 분은 할아버지였습니다. 연세가 많은 할아버지는 천천히 걸어야 하지만 태어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은 푸들은 에너지가 너무 넘쳐, 길에서 만난 사람마다 놀아달라 한 겁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삶의 속도란 무엇인가’ 생각에 빠졌다는군요.

그런데 촉만으로는 이야기 확장이 어렵답니다. <시선으로부터,>에는 심시선의 딸 명혜가 하와이에서 훌라(하와이어로 ‘춤춘다’는 의미)를 배우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이 글을 쓰기 위해 작가는 하와이에서 직접 훌라를 배웠습니다. “소설 쓰는 건, 정말 수지타산이 안 맞는 것 같아요.” 작가는 푸념하면서도 ‘굉장히 기분 좋았던’ 체험담을 나눠줍니다. “요가랑 비슷한, 영적인 경험인 것 같아요. 하와이 가시면 한번 해보실 만해요.”

정세랑 제공

정세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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