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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이 사랑한 작가 손보미② 디어 ‘어딘가 좀 이상한 여자들’

등록 2020-08-20 19:25 수정 2020-08-22 11:26
박승화 기자

박승화 기자


*21이 사랑한 작가 손보미① “이해할 수 없어도 우리는 함께 살아가니까”에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120.html

작가에겐 규칙이 필요해

드러나지 않는 예민함을 가진 그는 쉽게 지나치는 일상의 장면 중에서 마음으로 들어오는 것을 되도록 오래 담아두다가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되었을 때, 그 마음을 소설에 조금씩 심어두는 듯하다. 손보미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이 ‘설명하긴 힘들지만 좋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무엇이든 빠르게 가져다 쓰는 것에는 소질이 없지만, 불확실한 시간을 묵묵히 견뎌본 사람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진한 여운을 공유한다. 그런 꾸준함으로 10년 동안 성실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온 비결이 따로 있는지 궁금했다.

“저는 변화를 싫어하고 안정적인 걸 좋아해요. 매일 원고를 쓰지만 한 장도 못 쓰는 날이 있더라도 무조건 여기 카페로 출근해요. 그리고 저쪽 구석 자리에서 항상 글을 써요. 아예 못 쓰는 날도 분명 있지만, 저녁 7시가 되면 무조건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갑니다. 집에서는 절대 일을 하지 않아요. 그리고 제가 만든 루틴대로 일상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요. 밤을 지나 새벽까지 글을 쓴 적도 있고, 하루에 8시간씩 꼼짝 않고 앉아서 써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양치하는데 잇몸에서 피가 나더라고요. 건강 문제도 있지만 작가로서 안정적인 삶을 오래 유지하려면 규칙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왜 작가가 되셨나요.

“어릴 때부터 작가를 꿈꾼 것도 아니고,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 국문과에 간 것도 아니었어요. 그저 책 읽기를 좋아했죠. 대학에 다닐 때도 ‘소설가가 되어봐라’는 말은 별로 못 들었죠. 글을 쓰면 ‘독특하다’는 평을 주로 들었어요. 내 정체성에 대해 긴 슬럼프를 겪었는데, 오래전에 써놓고 제일 좋아했던 ‘담요’라는 소설을 한 달 내내 고쳐서 투고해봤어요. 그것으로 2011년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그때부터 스스로 프로 의식을 가지고 소설을 쓸 원동력을 얻은 게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작은 동네>에 등장하는 10살 소녀를 보니 작가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요.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어요. 아버지는 회사에 다니시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셨는데, 시를 좋아해서 시집을 내시기도 했어요. 부유하지도 않았지만 생활이 힘들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집에서 자란 평범한 사람. 그게 저라고 생각해요.”

<그들에게 린디합을>은 스윙댄스에 푹 빠졌던 경험으로 쓰셨잖아요. 요즘은 무엇에 빠져 있나요.

“재작년부터 피겨에 빠져 있어요. 1년을 피겨스케이팅 스케줄에 맞춰서 살고 있어요. 여름에는 작은 대회들을 보고, 10월부터 유럽에서 하는 그랑프리 시리즈를 보는데, 시차 때문에 이때는 밤낮을 바꿔 살아요. 겨울에는 의정부와 목동의 경기장까지 가서 직관을 하죠. 그런데 코로나19로 작은 대회는 모두 취소됐고 그랑프리 시리즈나 월드 경기는 어떨게 될지 알 수 없어서 너무 아쉬워요.”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어디서부터 창작인지

작가님 소설에는 로맨스가 아예 없거나, 남녀 사이가 안 좋거나, 남편이 이미 죽어서 없어요. 혹시 사랑 이야기를 안 좋아하세요.

“잘 모르겠어요. <나의 할머니에게>를 쓸 때도 로맨스를 넣고 싶었고, <디어 랄프 로렌>을 쓸 때도 남녀 주인공 사이의 감정 교류를 부각하고 싶었는데, 잘 안 써지더라고요. 사랑에 대해 쓰려고 하면 조금 간질거려요. 생각해보니 제가 로맨스 영화를 안 보기는 해요. 하지만 격월간 문학지 <릿터>에 쓰는 소설에는 약간의 로맨스가 있고, 흥미롭게 끌고 갈 생각이에요. 기대해주세요.”

<우연의 신>과 <디어 랄프 로렌>의 주인공은 모두 외국에서 만난 낯선 이들 앞에서 자신에 대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요. 작가님도 그런 경험이 있으세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대할 때와 타인을 대할 때 다른 자아가 등장하지 않나요? 저 역시 익숙한 사람과 낯선 이를 대할 때 조금 달라져요. 제가 택시를 타면 매우 사교적인 태도로 시종일관 기사님 대화를 받아줘서 친구들이 놀라거든요. 가족이나 친구처럼 계속해서 관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을 대할 때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는데,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 앞에서는 ‘내가 이런 모습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모습을 용기 내서 표현해보는 거 같아요.”

손보미는 시대와 공간이 모호한 곳에서 이야기를 펼치는 재주가 뛰어나다. 외국인 인물이 자주 등장하고, 실제로 존재하는 소재(조니 워커 화이트 라벨, 랄프 로렌 등)를 가져와 신문 기사나 평론, 인터뷰 등을 배치하기도 한다. 그렇게 구현해낸 세계 속에서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은 기묘한 현실감을 주며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어디서부터 창작이지?’ 하는 혼란에 빠지게 한다.

모르는 사이 몰입하는 이야기

이질적인 풍경이 섞인 공간과 그것이 상징하는 은유는 ‘위대한 유산’에 등장하는 할머니의 집과 ‘이전의 여자, 이후의 여자’에 등장하는 저택에도 묻어 있다. <작은 동네>의 주인공 소녀 역시 그 마을에서 유일한 ‘벽돌집 딸’이니까. 겉도는 공간에 진입한 주인공이 겪는 일들이 풍기는 기묘한 분위기는 특히 <작은 동네>의 소녀가 일부러 길을 잃고 들어가는 짙은 숲에서 고조된다.

“너무 노골적인가요? 이 여름에 읽을 책으로 <작은 동네>를 추천하고 싶어요. 원래 소설을 쓸 때 퇴고를 잘 안 해요. 글을 쓰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고쳐나가기 때문에, 마침표를 찍으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하지만 이 책은 퇴고를 정말 열심히 했어요.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라는 인문학 서비스 사이트에 2018년 겨울부터 연재했던 소설인데, 책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300장 정도를 더 써서 붙인 것이 저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었죠. 연재했을 때는 만족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는데, 이야기를 고치고 보태고 다듬다보니 이 정도면 책으로 만들어서 세상에 내보내도 될 거 같아, 어느 순간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많은 분이 읽어주시면 좋겠어요. 제 책만 추천하긴 좀 그러니까 <깊은 바다, 프리다이버>도 추천합니다.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제임스 네스터가 쓴 책이에요. 프리다이빙이 어떤 종목인지도 잘 모르고 무모하다고까지 생각했지만, 대회를 취재하러 갔다가 점점 프리다이빙에 빠져들면서 직접 배우게 되고, 결국 1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전세계 수많은 프리다이버와 과학자를 만나 바다를 누비게 돼요. 그야말로 ‘덕후’의 글이에요. 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무언가에 꽂혀서 몰입하게 되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이 책을 통해 시원한 바닷속에 들어간 듯한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거예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직 많아서 줄줄이 마감할 책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지 물었다.

“저는 일상의 안정과 행복이 중요한 사람이고, 소수의 사람만 만나고, 낯선 곳에 가면 긴장을 많이 하고 힘들어해요. 하지만 작가는 그러면 안 되지 않나, 사회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두루두루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나, 그런 고민도 해요. 그러나 기본적으로 제 관심사는 ‘변하지 않는 어떤 것’에 있어요. 빠르게 결정해야 하는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는. 저는 그런 사람이에요. 시대가 흐르고 사회가 변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백년 전에도 존재했고 백년 후에도 존재할 감정. 저에게는 이런 게 중요해요.”

이해되지 않아도 좋다는 느낌이 들고, 대답할 수 없어도 괜찮기를 바라는 마음. 여러 작품을 통해 계속 이런 메시지를 전달해온 손보미는 아무래도 수백 년은 거뜬히 버틸 만한 굳건한 믿음으로 소설을 쓰는 것 같다. 차근차근 확장하며 단단해질 그의 세계가 또 어떤 이야기를 내놓을지 기대된다.

최고운 에세이스트

*21이 사랑한 작가들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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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티브이도 잊을 만큼 수많은 플랫폼에서 쏟아지는 영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시대. 그렇지만 문장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은 분명 있다. 글자와 글자 사이를 내가 이어야 하고, 문장과 문장을 직접 연결해야 하며, 단락과 단락을 스스로 건너가야 한다. 행간과 행간 사이에 잠시 멈춰 생각하다보면, 책에 적혀 있지 않고 가본 적 없는 세상까지 누빌 수 있다. 독서는 백년 전에도 있었으며, 백년 후에도 사람들은 책읽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와 헤어진 뒤 이글거리는 태양을 정수리에 이고 시청역으로 향했다. 소공동 골목길 위에 땀을 쏟으며 지나는데, 흰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노년 여성이 잔뜩 격앙된 상태로 허공에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상한 여자다. 아니, 화가 난 여자. 누구 때문일까. 아니면 무엇 때문에 저렇게 소리치고 있을까. 떠오르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오느라 세계가 조금씩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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