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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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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이 사랑한 작가 이혁진② 푸른빛이 도는 작은 공

등록 2020-08-19 21:52 수정 2020-08-22 11:26
박승화 기자

박승화 기자


*21이 사랑한 작가 이혁진① 월급 사실주의자에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118.html

복싱에 익은 것처럼 유연해진 권력 관계

복싱에 재미를 붙이며 글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6일. 사람이 덜 붐비는 카페로 나와 4~5시간씩 일하고 2시간씩 운동한다. 물론 일상은 규칙적이되 글은 불규칙하다. “한두 문장이 딱 걸리면서 죽죽 써질 때”는 신이 나다가도 “머릿속에서 (인물이나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생각만 많이 오갈 때”는 한 문단도 써지지 않는다. 그럴 땐 노트북을 접고 샌드백을 치러 간다. 복싱이 몸에 익듯, 생각이 익는 순간을 기다리며.

2019년 출간된 장편소설 <사랑의 이해>는 힘을 줘야만 하는 부위에 자연스럽게 온몸이 따라가야 하는 복싱처럼 유연하다. 회장·사장·임원·팀장·직원까지, 오로지 ‘힘’에 의해 움직이는 회사를 깊숙이 들여다보느라 진이 빠지는 <누운 배>와 달리, <사랑의 이해>는 힘을 반쯤 빼고 봐도 술술 익힌다. 연애소설이 가진 몰입감과 흥미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연애소설이 가진 허세와 진부함을 덜어낸 덕분이기도 하다.

<사랑의 이해>의 긴장감은 <누운 배> 못지않다. 역시 힘이 작용하는 ‘관계’ 때문이다. 힘의 방향은 일방적이지 않다. 늘 위에서 아래로 짓누르는 힘이 아니라, 때로는 아래가 솟구쳐 위와 충돌하는 힘도 그려진다. 유난히 계급이 다단계인 은행이라지만, 사랑은 돈과 욕망을 거스를 수 있는 유일한 힘이므로.

이를테면 모두가 부러워하는 ‘금수저’ 여성 정규직 은행원(미경)은 학벌이 전부인 ‘흙수저’ 남성 정규직 은행원(상수)에게 아낌없이 내어주지만, 그 남자의 마음은 온통 여성 비정규직 텔러(수영)에게 가 있다. 그런데 그 여성의 사랑을 받는 남성(종현)은 몸 누일 방 한 칸 없는 비정규직 청경이다. 그래서 책 제목은 사랑의 이해(理解)이자, 사랑의 이해(利害)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을 대상화하는 것처럼, 자본주의의 계급사회에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어요. 반대로 사랑 같은 감정도 존재해서 충돌이 일어나죠. 그걸 (잘) 보여주기 위해 계급을 생각한 거고요.”

1인칭 기업소설에서 3인칭 연애소설로, 주제와 방식을 한번에 뛰어넘는 이야기를 짓는 일은 어찌 보면 무모한 시도였다. “쓰는 내내 역부족이란 말을 실감했고 고치다 고치다 못해 마지막 3교(세 번째 교정)까지 대폭 고쳐 썼다. 쓸 수 없는 모든 결말을 다 써본 것 같다.” 그 고통을 그는 ‘작가의 글’에서 이렇게 솔직하게 고백했다.

“<누운 배>는 조직 안에서 일반화된 심리, 일반화된 윤리를 구현해나가는 과정이었는데, <사랑의 이해>는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리나 처한 상황, 거기에 내면의 변화까지 있어야 하니 (제가) 인물 안으로 다 들어가야 했어요. 인물이 다 설득력을 가져야 하니까요. 그런 일은 처음이라 어려웠어요.” 그래도 “탁월한 편집자”의 도움을 받은 소설은 완성됐고, 2020년 드라마 판권이 팔리기도 했다.

‘상수야, 너 누군지 알겠는데, 너 어떡하냐’

최종적으로 맞춤법이나 확인하는 ‘3교’에서 글의 3분의 1을 고쳤을 만큼 마지막까지 심리 묘사를 고민했던 인물은 남자주인공 상수다. 좋은 대학을 나와 높은 연봉을 받는 정규직 은행원이지만 학벌과 직장을 빼고는 집안도, 사회적 입지도 보잘것없는 남자. 그래서 출세와 풍족한 삶을 보장해주는 미경과 연인이 되지만 미모의 비정규직 텔러인 수영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남자. 자신이 좋아하는 수영을 시선과 말로 핥아대는 남성 동료들을 혐오하면서도 모른 체하는 남자.

이혁진 자신 같기도, 보통의 한국 남자 같기도 해서 오히려 그려내기 힘들었다고 했다. “저도 상수 같죠. 한국 남자들이 그런 식으로 길러진 면도 있고요. 적극적으로 순응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없고, 그러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요. 군대에서 고문관으로 찍히는 것처럼. 그래서 그런 부분을 더 일깨우고 싶었어요. 다들 ‘나는 순간의 욕망에 충실하다’ ‘솔직하다’고 하는데, (소설로) 자신을 떨어뜨려놓고 보면 진짜 보기 싫은 짓이거든요. 저도 쓰면서 되게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어요. ‘상수야, 너 누군지 알겠는데, 너 어떡하냐’고요.(웃음)”

<누운 배>에선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여성들의 마음에 들어갈 때는 작가 박완서 작품의 도움을 받았다. 이를테면 <목마른 계절>(세계사, 2012). “6·25 전쟁 때 부자들이 피란을 떠난 빈집에 20대 여성이 이불이나 세간살이를 훔치러 들어갔는데 이게 너무 신이 난 거예요. 예쁜 옷도 입어보고 보들보들 비단이불도 만져보고요. 글만 읽어도 그 생동감과 자유로운 감각이 느껴지죠. 제 책도 현실과 속물성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박완서) 선생님 책에 나오는 여성들처럼 다양하고 다채롭게, 동시에 설득력이 있었으면 했어요.”

수영이 그렇다. 은행지점장이 축축한 손으로 자신의 손을 쥐어도 수영은 자연스레 손을 빼고 고개를 숙인 뒤 밖으로 나온다. 만만한 비정규직에게 가해지는 성희롱이라 생각하면 스스로 견딜 수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꼭 하고 싶은 업무를 맡기 위한 인내이기도 하다. 또 안정적인 미래를 원하면서도 정규직 은행원 대신 무일푼 비정규직 청경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다. 그렇게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과 끝내려 가장 잔인한 방식을 선택하는 것도 수영 자신이다.

회사에선 나의 능력과 비전이 힘에 압도당하고, 계급이 신경 쓰여 사랑도 맘껏 할 수 없는 처지지만, 정작 나를 가장 괴롭히는 존재는 나일지도 모른다. <몬스터: 한밤의 목소리>에서 이혁진의 괴물은 ‘거울 속의 나’(단편 ‘달지도 쓰지도 않게’)였다. 또다시 장인어른에게 3천만원을 주느니 차라리 돈을 도둑맞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놓고선, 결과적으로 스스로 장인어른에게 3천만원을 건넨 뒤 억장이 무너지는 나의 마음 같은.

가난 말고 다른 걸 생각하게 해준 것

그는 2~3개월 전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엔 처음으로 노트에 펜으로 이야기를 꾹꾹 눌러 쓴다. 만년필 촉의 단단하고 긴장된 느낌이 좋아져 글을 쓰는 조바심은 줄고 즐거움은 늘었다. 노트의 원고를 컴퓨터로 옮기는 과정에서 감상적이거나 뻔한 문장을 덜어내느라 시간이 낭비되긴 하지만.

좀더 소설다운 소설을 써보는 중이라 했다. 그건 어떤 소설일까. “오스카 와일드가 그랬어요. ‘가난한 사람의 가장 큰 비참함은 가난밖에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제가 가난 말고 다른 걸 생각할 수 있게 해준 것이 소설이었거든요. 사람들이 생각해볼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하게 해서, 그 사람의 인식을 다른 방식으로 확장해주는 것이 소설이라 생각해요. 그러려면 설득력 있고 매력적인 이야기여야겠죠?(웃음)”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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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의외로 작가 이혁진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희망’이었습니다. 일도 사랑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시대라면서 희망을 가져야 한다니, 이건 또 ‘무슨 희망고문 같은 소리인가’ 하고 눈으로 따졌습니다.

그런데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떠올리며 희망을 이야기하는 이혁진의 눈은 정말 반짝였습니다. 퓨리오사를 비롯한 젊은 여성들이 녹색의 땅으로 갈 수 있도록 할머니 전사들이 자신을 희생하는 장면은 볼 때마다 운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들이 씨앗을 남겨주면서 죽잖아요. 그 씨앗은 당연히 (여성의 배 속에 있는) 아이들이고요. 그걸 심기 위해 모든 두려움을 이겨내고 (다시 싸우러) 가는 거죠.”

그는 영화든 드라마든 소설이든 예술은 계속 희망을 이야기해야 존재의 가치가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 듯 보였습니다. “소설가가 보여줄 것은 현실이 아니라, 더 나아져야 하는 현실, 가치 왜곡이 없는 현실, 자유로운 현실이에요. 희망을 이야기해야 하는 거죠.” 아무리 터무니없고 이기적이고 추상적인 희망이라 해도, 우리에게 그마저 없으면 사람답게 살아가기 어려운 것처럼요.

그 말을 듣고 다시 떠올려보니, 양육강식의 일터에서 인생을 허비하지 않으려 홀연히 떠나는 것, 사랑을 이루지 못했으나 사랑에 대해 배운 것도 또 다른 일과 사랑을 위해 씨앗을 뿌린 거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의 눈은 ‘윤리적이지 못한 희망’을 이야기할 때 다시 한번 번쩍거렸습니다. 최소한의 옳고 그름에 대한 선을 넘은 영화, 드라마, 소설은 어떤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확고했습니다. 이혼 뒤 아들과 함께 살기 위해 아들을 학대하는 엄마를 주체적 여성으로 그리고(드라마 <부부의 세계>), 또래를 성폭행한 손주를 고발한 할머니는 죄책감에 극단적 선택을 한 것처럼 암시하며(영화 <시>), 또래 여학생에게 성매매를 알선한 고등학생은 반전 매력이 있는 것처럼 묘사하는(드라마 <인간수업>) 작가의 태도는 무척 불편하다고 했습니다. 그 작품들을 재밌게 본 저는 순간, 뜨끔했습니다. 질문을 더 던지고 싶었지만 인터뷰를 5시간은 해야 할 것 같아 다음 기회로 미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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