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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이 사랑한 작가 이혁진① 월급 사실주의자

등록 2020-08-19 21:46 수정 2020-08-22 11:26
박승화 기자

박승화 기자


*작품 결말을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 기사에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그는 푸른빛 도는 작은 공을 이따금 만지작거렸다. 왼쪽으로 빙글, 오른쪽으로 빙글. 그가 집중해서 말할수록 파란 공은 손안에서 신나게 움직였다. 4~5개월 전쯤 그냥 사본 ‘스트레스 볼’이라 했다. 여러 공 가운데 가장 저렴하지만 가장 맘에 들었던 공. 평소 작업할 때는 책상 위에서 통통 튕겨보기도 하고, 오른손으로 글을 쓰며 왼손으로 주물럭거리기도 한다고 했다. 생각이 엉킬 때는 ‘공아, 내 머릿속도 좀 주물러봐’ 하는 주문과 함께. 그러면 신통하게도 휴대전화와 담배 생각은 사라지고 집중이 잘된다고 했다.

커피 대신 ‘민트 블렌드 티’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대신 파란 공을 주무르며 스트레스를 푸는 작가 이혁진(40)을 8월4일 오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인터뷰는 오락가락하는 빗속에서 4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중간에 중국집으로 자리를 옮겨 자장밥과 짬뽕밥을 대화에 곁들여야 했을 만큼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도 자신의 책에 서명하며 “장마 중의 긴 대화를 기억하며”라고 썼듯이.

‘작가님’이라 불릴 때마다 이혁진은 머쓱해했다. 작가와 저자 사이, 어디쯤 자신이 있다고 했다. “책도 쫙 있고 남들도 인정해줘야 작가라 할 수 있는데, 책 한 권 냈다고 (자신이) 작가라 불리는 게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라고 했다. 그래도 5년 전처럼, 사람들에게 ‘저자’라 불러달라고 부탁하지 않는다. 작가 대신 ‘선생님’이라는 소리를 들은 뒤로는.

무대 위의 스토리텔러들

작가가 무엇이길래 그토록 불리길 부끄러워할까. 그에게는 ‘이야기를 잘 만들어내는 이’가 작가다. 이를테면 넷플릭스 오리지널의 스탠드업에서 혼자 1시간 넘게 단막쇼를 선보이는 코미디언들. 특히 흑인 데이브 셔펠,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트레버 노아, 인도 이민자 2세인 하산 미나지 같은 소수자 코미디언이 인종차별을 당한 경험 등을 날카롭고 재밌게 풀어내는 ‘스토리텔링’에는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한마디, 한마디를 엄청 계산해서 (관객에게) 던지잖아요. 그래서 한 문장, 한 문장이 의미 있는 칼럼 같기도 해요. 무대 위니까 관객이 지루하면 안 되잖아요. 관객을 속일 수도 없고요. 그렇게 한마디 한마디로 층을 만들어가며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놓고, 다시 (앞의 이야기를) 일깨워서 카운터펀치를 날리기도 하고요. 그런 구성을 하는 이 사람들이 작가죠.”

이야기의 힘이 ‘구성’과 ‘배열’에 있다는 생각을 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2013년 잡지사, 조선소, 또다시 잡지사로 이어진 5년간의 직장 생활을 접은 뒤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그는 남들이 안 쓰는 단어를 찾아내 쓰고 문장을 꾸미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책 한 권을 채울 수 없었다. 내용보다 표현이 중요한지에 대해서도 회의가 들었다. 그래서 최대한 걷어냈다. 더 쉽게 더 잘 읽힐 수 있도록. “작가 김훈의 작품이 죽여주는 것은 순서잖아요. 머릿속에 그려지는 게 전혀 다르죠. 배열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에요.”

그래서일까. 2016년 봄, 첫 장편소설 <누운 배>에는 그럴싸한 표현 하나 없이, 차가운 조선소의 언어들이 건조하게 등장해 처음에는 무척 당혹스럽다. 그러나 읽다보면 마치 내가 중국의 조선소 안에서 일하는 듯하다. 신입사원 ‘나’를 따라서, 어느 날 갑자기 바다에 쓰러진 거대한 배 앞에서 황망하기도 하고, 회장의 지시로 기어이 썩은 배를 들어올렸을 때는 허무하기도 하다. 어느 직장인의 감상 후기처럼 “회사 일 끝마치고 들어와서 책을 폈는데, 다시 회사 일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 느낌을 평론가들은 “리얼리즘이라고 부르기에 아까울 정도”(소설가 백민석), “몸집이 크면서도 섬세한”(문학평론가 황현산) 이야기라 표현했다. 한겨레문학상에 선정하면서다. 압도적 사실성은 그가 조선소에서 3년간 일한 경험의 재구성에서 나온다.

“자전적 요소를 소설에 많이 녹여냈던 것은 제가 미숙해서였어요. 기억력에 의존해서 쓸 수밖에 없었거든요. 또 소설이니까 상관없다고도 생각했고요.(웃음) 회사원이었을 때, 어떤 때는 불합리했고 어떤 때는 답답했고 어떤 때는 이득을 봐서 괜찮아 보이기도 했던 일이 있었어요. 각각 떨어진 사실들로 이야기를 만들다보니 어떤 흐름이 생겼어요. 또 그 흐름에 비춰 다시 현실을 보니 무엇이 옳고 그른지 하는 것들이 생겨났고요.”

중국의 한국 조선소에서 일하며

노동의 감각을 가지고 이야기를 포착하고 풀어내는 이혁진은 ‘월급사실주의자’라 불릴 만하다. 역시 기자 출신인 작가 장강명이 자신과 이혁진·정세랑·심재천 같은 작가를 묶어 “다 월급을 받아 생활했던 작가들이고, 꼭 ‘문학 덕후’를 지향하진 않는다”(<월간 채널예스> 2016년 9월호)며 만든 표현이다. “(작가 장강명의 뜻은) 회사에서 현실감각을 충분히 익힌 사람들이 글을 썼다는 거잖아요. 그건 맞아요.(웃음) 그런 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불합리하고 이상하고 슬프다고 느낀 이야기를 쓰는 게 글이잖아요.”

일로 현실감각을 얻는다는 건 자신의 본모습을 잃거나 감추며 부자연스럽게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 존재를 가난하게 만드는 노동의 고달픔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드러난다. “월급이란 젊음을 동대문시장의 포목처럼 끊어다 팔아 얻는 것이다. 월급을 받을수록 나는 젊음을 잃는다.”(<누운 배>) “은행 생활이 너절스럽게 느껴졌다. 5만원권, 1만원권도 못 되는 일, 기껏해야 5천원짜리나 될까 말까 한 일이나 하고 있는 것 아닌가.”(<사랑의 이해> 중)

한때 이혁진도 젊음을 팔며 5천원짜리 일을 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방 출신으로 서울의 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처음에는 잡지사에서 “좋아하는 선배들과 합을 맞춰 일하며, 가끔은 일하는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좋아하는 일만 할 수는 없었다. 하루 벌이로 뒷바라지해준 부모님 덕에 겨우 대학을 졸업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좀더 안정적인 직장으로 이직했다. “외국 생활에 대한 동경과 한국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선택한 곳이 중국에 있는 한국 조선소였다. 그러나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아 3년 만에 그만뒀다. “어떤 건지 모르지만 아무도 쓰라고 한 적 없는 거, 내가 쓰고 싶고 진짜인 거 같은 걸 써보고 싶어”라며 조선소를 때려치운 <누운 배>의 주인공처럼. “일하면 우리의 가능성이 줄어들어요. 그래서 우리 가능성을 더 가치 있는 일에 써야 하는 것 같아요. 내가 뭘 원하는지,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하고요. 그런 계기와 기회, 시간과 여력을 누군가에게 요청해야 한다면 요청해야 하고, 제도적으로 보장받아야 한다면 보장받아야 해요.”

첫 소설과 둘째 소설 사이, 3년이 걸렸다. 출판사의 제작 기간을 빼도 2년이다. 처음 1년은 가족 이야기로 장편소설을 준비했지만 “내가 부족한 부분이 많구나” 하는 생각에 출판을 접었다. 앞으로 무얼 해야 하나 막막할 때 복싱장으로 갔다. “한 번도 안 해봤고 앞으로도 안 해볼 것 같은” 일을 해보고 싶었다. 근력운동으로 다져진 몸에도 복싱은 버거웠다.

잠시 글을 잊고 싶었으나 글만 떠올랐다. “루틴(일상적으로 반복함) 하고 자기 체력만큼 할 수 있는” 복싱은 글과 같았다. “처음에는 뻣뻣하게 거울을 보며 따라하는 정도밖에 안 되는데 계속하다보면 몸에 배는 것이 있어요. (몸에) 익고 익으면 되기 시작하는 것들이죠. 몸에 힘을 뺀다든지, 하체 힘을 상체로 전해준다든지. 약간 글을 쓰는 일과도 닮았어요.”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21이 사랑한 작가 이혁진② 푸른빛이 도는 작은 공으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119.html

*21이 사랑한 작가들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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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진의 웹소설

피식 하는 웃음이 자주 새어나오는 작품들은 아닙니다. “나는 유머 감각이 없다”(<누운 배> ‘작가의 말’)고 스스로 고백했듯이, 이혁진 소설은 진지하고 무거운 편입니다.

꼽아보니, 그의 작품을 읽으며 서너 번 실실댔더군요. 적어서 더 귀한 유머였습니다. <누운 배> 주인공은 백수가 되자마자 사고로 뒤통수가 깨져 기절했습니다. 이후 정신을 차리고 든 첫 생각은? “사지 멀쩡해야 하는데, 산재도 안 되고.”

<사랑의 이해>에서는 술에 약한 상수가 연인 미경의 아버지를 처음 만나 죽을 둥 살 둥 술을 마신 뒤 이런 장면을 떠올립니다. “산악 영화에서 보던 밧줄을 떠올렸다. 올이 하나하나 끊어지며 가늘어지는 밧줄. 자기 정신줄이었다.”

2017년 친구의 웹소설 플랫폼에 올린 세 편의 초단편 ‘둥근 술잔 위에 비치는 밤의 불빛들’ ‘여왕뱀’ ‘그날 밤 우리에게 온 것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혁진은 “읽고 나서 입맛이 개운하도록” 웹소설을 썼다지만, 역시 저는 웃기보다는 긴장했습니다.

특히 어느 날 뱀떼가 아파트 단지에 출현하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 ‘여왕뱀’은 특유의 사실적 묘사로 보는 내내 소름이 돋았습니다. “상상력은 두려움을 먹을 때 가장 무럭무럭 자란다”는 이혁진의 말이 맞았습니다. 그날 밤, 저는 역대 최고로 무서운 뱀꿈을 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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