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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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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공간] ‘청풍계’는 간데없고 ‘백세청풍’ 네 글자만

이제는 사라진 장동 김씨 형제의 옛 집과 살아남은 글씨,
시대에 따라 정치적으로 해석돼온 글자와 공간
등록 2020-06-18 12:58 수정 2020-08-07 01:50
권신응의 그림 <청풍계>에 나타난 선원 김상용 집의 모습(왼쪽 그림). 출판사 혜화1117 제공. 김상용 집이 있던 청풍계의 현재 모습(오른쪽 사진). 사진의 원 안 바위에 ‘백세청풍’ 글씨가 남아 있다. 류우종 기자

권신응의 그림 <청풍계>에 나타난 선원 김상용 집의 모습(왼쪽 그림). 출판사 혜화1117 제공. 김상용 집이 있던 청풍계의 현재 모습(오른쪽 사진). 사진의 원 안 바위에 ‘백세청풍’ 글씨가 남아 있다. 류우종 기자

겸재 정선이 그린 <청풍계>란 그림이 있다. 내사산(서울 도성을 잇는 4개 산) 가운데 하나인 인왕산의 북쪽 골짜기로, 현재 청운초등학교 북쪽 길에 있던 계곡인 ‘청풍계’를 그린 것이다. 정선은 이 청풍계 그림을 무려 6점이나 남겼다. 이 가운데 2점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고, 나머지 4점은 각각 국립중앙박물관·고려대박물관·동아대박물관·삼성리움미술관에 있다.

정선 그림 <청풍계>는 김상용 집

현재 서울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일대인 청풍계는 조선 때 인왕산의 명승지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특히 이 일대에 조선 후기의 최대 권력 가문인 장동 김씨(신안동 김씨 가운데 서울 서촌에 살았던 일파)의 시조라 할 선원 김상용, 청음 김상헌 형제 가운데 형 김상용이 살았다. (동생 김상헌은 길 건너편 장의동에 살았다. 장동 김씨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그러나 이 아름답고 역사 깊은 골짜기는 일제강점기에 시냇물을 덮어 길을 내고 주변을 주택지로 개발하면서 이젠 옛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현재는 ‘맑은 바람 시내’(淸風溪)라는 말이 무색한, 범상한 주택가 골목이다.

그런데 최근 정선의 그림 <청풍계>에 나오는 풍경이 김상용의 집임을 확실히 증명하는 희귀한 그림이 공개됐다. 미술역사가인 최열 선생이 펴낸 <옛 그림으로 본 서울>(혜화1117)에 실린 선비화가 권신응의 <청풍계>다. 특이하게도 이 그림은 작품 안에 건물의 이름과 바위에 새겨진 글자를 적어놓았다.

이 그림의 맨 위 능선에는 ‘인왕산’이란 글씨가, 그 아래 바위엔 ‘백세청풍’(영원한 맑은 바람)이란 글씨가 적혀 있다. 바위에 새겨진 이 ‘백세청풍’이란 네 글자가 옛 청풍계와 김상용의 집을 찾는 열쇠다. 왜냐하면 일제강점기 이후 이 일대의 지형이 완전히 바뀌었고, 그림에 나오는 김상용 집의 여러 건물도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현대 서울의 공간적 격변 속에서도 바위 글씨 백세청풍만은 어느 주택 앞 자투리땅에 살아남았다. 바위에 새긴 백세청풍 글씨를 기준점으로 김상용 집을 다시 그려볼 수 있다.

권신응의 그림을 보면, 백세청풍 바위 바로 아래 건물의 용마루 위엔 ‘선원영당’(仙源影堂)이란 글씨가 희미하게 쓰여 있다. 선원은 김상용의 호이고, 영당은 ‘초상화(영정)를 모신 사당’이다. 다시 말해 이 건물엔 김상용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었던 것이다. 현재까지 전하는 바로 그 초상화인 듯하다. 이 선원영당의 마당쯤에 ‘늠연당’(凜然堂)이란 글씨가 적혀 있다. 이것은 선원영당의 이름으로 옛 문헌엔 ‘늠연사’라고도 쓰여 있다. ‘늠연’이란 위엄이 있고 당당하다는 뜻이다. 병자호란 때인 1637년 왕족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란 갔다가 청군이 밀려오자 자결한 김상용의 꿋꿋한 정신을 기린 표현이다.

늠연당의 아래쪽 시냇가(청풍계) 오른쪽엔 짚으로 지붕을 올린 정자가 하나 서 있고, 그 지붕 위에 ‘태고정’(太古亭)이라고 적혀 있다. 태고정은 청풍계의 건물 가운데 가장 소박하지만, 김상용 집 전체의 중심 공간으로 김상용 집 자체를 말하기도 한다. 김상용 집은 조선 후기 서인(율곡학파) 노론(서인 중 송시열학파)의 중심 공간이었고, 그 집의 중심 공간이 태고정이다. 그래서 태고정에는 서인 노론 계열의 대신과 명사들만 방문할 수 있었다. 1790년엔 정조도 이곳을 찾았다.

어느 주택 앞 자투리땅에 남아 있는 바위에 새겨진 ‘백세청풍’ 네 글자. 백이숙제의 이야기에서 유래했고, 주희의 글씨로 알려졌다. 류우종 기자

어느 주택 앞 자투리땅에 남아 있는 바위에 새겨진 ‘백세청풍’ 네 글자. 백이숙제의 이야기에서 유래했고, 주희의 글씨로 알려졌다. 류우종 기자


푸른 단풍나무가 맑은 바람으로

태고정 오른쪽으로 3개의 네모난 연못이 보인다. 맨 위는 ‘조심지’(照心池)인데, ‘마음을 비추는 연못’이란 뜻이다. 그 아래는 ‘함벽지’(涵璧池)인데 ‘옥을 적시는 연못’으로, 인재를 가르치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맨 아래 ‘척금지’(滌衿池)는 ‘옷고름을 씻는 연못’으로, 새사람으로 만든다는 뜻이다.(이성현, <노론의 화가, 겸재 정선>, 들녘)

이 세 연못의 오른쪽에 청풍지각(靑楓池閣 또는 淸風池閣)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있다. 권신응의 그림에도 이 건물 이름은 적혀 있지 않은데, 1766년 김양근이 지은 책 <풍계집승기>(楓溪集勝記)에서 함벽지 옆에 청풍지각이 있다고 한 것으로 미뤄 알 수 있다. 청풍지각은 김상용 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로 ㄱ자 모양이며, 마루 4칸과 방 2칸으로 돼 있었다.(최완수, <겸재의 한양 진경>, 동아일보사)

세 연못과 청풍지각 아래에 3칸으로 이뤄진 솟을대문이 서 있다. 그 아래쪽에 김상용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권신응의 그림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정선의 <청풍계>를 보면 청풍지각과 솟을대문 사이에 담장과 쪽문이 있었다.

정선 <청풍계> 간송미술관 소장.

정선 <청풍계> 간송미술관 소장.

김상용 집이 들어선 ‘청풍계’라는 이름은 이 골짜기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공간임을 잘 보여준다. 애초 이 골짜기의 이름은 ‘푸른 단풍나무 시내’라는 뜻의 ‘청풍계’(靑楓溪) 또는 ‘단풍나무 시내’라는 뜻의 ‘풍계’(楓溪)였다. 김상용이 사용한 호 풍계도 바로 이 ‘단풍나무 시내’였고, 1766년 김양근이 지은 책 <풍계집승기>의 제목도 ‘단풍나무 시내’였다.

이 ‘푸른 단풍나무 시내’는 선조가 내렸다는 청풍계(淸風溪)라는 현판 이후 다른 뜻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선조가 써준 ‘청풍’(淸風)은 ‘푸른 단풍나무’가 아니라 ‘맑은 바람’인데, ‘좋은 기풍’이란 뜻으로도 널리 쓰인다. 특히 옛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잃지 않은 백이와 숙제를 ‘백세청풍’(영원한 맑은 바람)이라고 기리면서 ‘청풍’은 충절이란 뜻으로도 쓰였다. 선조도 이 뜻을 염두에 뒀을 것이다.

그러나 17세기 들어 김상용·상헌 형제가 이름을 드날리면서 백세청풍 뜻은 조금 달라진다. 병자호란 때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형 김상용은 강화도에서 자결했고, 아우 김상헌은 남한산성에서 항복을 거부했다. 김상헌은 뒤에도 청나라의 파병 요구를 반대해 선양(심양)에 끌려갔다가 6년 만에 풀려났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오랑캐에 굴복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점 때문에 이 형제는 조선 후기 대의명분의 화신이 됐다.

선원 김상용의 초상화. 위키피디아

선원 김상용의 초상화. 위키피디아


영원한 집권을 상징하는 말

이 형제의 결사항전 신화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만든 이가 조선 후기 서인 노론의 200년 집권을 열어젖힌 우암 송시열이었다. 김상용의 늠연당 뒤 바위엔 주희가 쓴 ‘백세청풍’이, 늠연당 앞 바위엔 송시열이 쓴 ‘대명일월’(大明日月)이 새겨졌다. 대명일월은 ‘명나라는 해와 달(영원하다)’이라는 뜻이다. 백세청풍과 대명일월은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영원한 충성을 다짐하는 말이 됐다.

그러나 송시열 이후 서인 노론의 200년 집권기에 백세청풍의 의미는 또 한 번 바뀌었다. 바로 서인과 노론, 그리고 장동 김씨의 영원한 집권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김상용·상헌 형제의 결사항전 신화 이후 그들의 집안에선 무려 15명의 정승과 35명의 판서가 나왔다. 이것은 조선 역사상 한집안에서 낸 가장 많은 정승, 판서다. 이 형제를 드높인 송시열은 공자, 맹자, 주자에 이어 ‘송자’가 됐다. 200년 서인 노론 집권 기간에 60년은 장동 김씨 한집안이 집권했다.

이제 장동(궁정동·효자동)과 청풍계(청운동), 옥류동(옥인동) 일대에서 대대로 살며 조선을 쥐락펴락하던 장동 김씨는 이름을 잃었다. 청풍계의 아름다운 골짜기에서 서인 노론의 성지 노릇을 했던 김상용의 집도 사라졌다. 송시열이 김상용 집 바위에 새긴 ‘대명일월’도 묻혀버렸다. 오직 ‘백세청풍’ 네 글자만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백세청풍 네 글자 바로 위로 20세기 후반 기업가 신화를 만든 정주영 현대 회장의 집이 들어섰다. 일제는 상류의 청풍계를 참고해서 도성 안 개천에 ‘청계천’이란 이름을 붙였다. 과연 이 골짜기엔 ‘영원한 맑은 바람’(백세청풍)이 불었던 것일까?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김규원의 역사 속 공간’은 역사와 정치적 사건의 배경이 되고, 현재도 그 자취가 깊이 밴 공간을 찾아가는 칼럼입니다. 3주에 한 번씩 여행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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