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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독서방역본부] 모든 이가 무사했던, 어떤 ‘실패’ <인듀어런스>

나는 어떤 쓸모로 다른 이의 생존에 기여할 것인가
등록 2020-04-13 23:41 수정 2020-05-03 04:29
인듀어런스: 어니스트 섀클턴의 위대한 실패
캐롤라인 알렉산더 지음, 프랭크 헐리 사진, 김세중 옮김, 뜨인돌 펴냄, 
 2002년

인듀어런스: 어니스트 섀클턴의 위대한 실패 캐롤라인 알렉산더 지음, 프랭크 헐리 사진, 김세중 옮김, 뜨인돌 펴냄, 2002년

어니스트 섀클턴과 탐험대는 1914년 유럽에 제1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 때 인듀어런스호를 타고 남극 횡단에 나선다. 이들은 밀가루와 설탕에는 환호하지만 양파와 호두에는 신음하는 남자 어른 스물여덟 명이다. 인듀어런스호는 남극권 부빙에 갇혀 수개월을 떠돌다 결국엔 침몰하고 대원들은 목숨을 건 행군과 보트 항해 끝에 돌아온다.

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대원들을 이끈 이 탐험대의 대장 어니스트 섀클턴의 리더십을 대원들의 일기와 탐험대 사진사 프랭크 헐리의 사진을 배경으로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1914년 범선은 어떻게 생겼는지, 타이타닉처럼 큰지 사진으로 비교할 수 있다. 뒷산 우면산에 가더라도 갖출 것은 다 갖추는데, 1914년 남극에 갈 때 그들이 무엇을 입었는지 볼 수 있다. 스물여덟 명이 부빙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15소년 표류기처럼 떠돌다 대장과 함께 살아남은 이야기를 사진이 증명한다.

당시의 소소한 일상도 엿볼 수 있다. 한 젊은이는 친구와 같이 선원 면접을 보는데 친구만 선원이 되자 결국 밀항을 한다. 선원이 되려면 밀항 정도는 해야 하는 것이다. 젊은이는 나중에 식당 보조가 되는데 대장은 그에게 말한다. 식량이 떨어져 굶게 되면 제일 먼저 너를 잡아먹을 거야. 극한 상황에서는 썰매를 끌던 개를 먹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일상이 되면 위기 상황이 아무렇지 않아진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심지어 농담도 할 수 있다. 얼음 위에서 지내는 동안 어느 과학자는 틈만 나면 펭귄 껍질을 벗기고 해부하는데, 대원들은 그가 동물 위장에서 금을 찾는다고 놀린다.

나는 오래된 이 책을 지금도 펼쳐 본다. 병원의 코로나19 유행 대응을 지휘하며 지치고 압박받는 상황 속에서. 장엄한 남극의 자연과 거지꼴이지만 절망하지 않은 20세기 초 탐험가들을 보고, 극적인 생존투쟁과 구조라는 드라마를 한눈에 살펴본다. 위기의 공동체에서 되새길 수 있는 질문들도 있다. 영하 30도 추위에서 슬리핑백이 모자란다면 고급선원과 하급선원 사이 어떻게 나눌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나눌 것인가? 제비뽑기, 나이순, 직급별? 선원 중 여섯을 선발대로 뽑아 혹한과 높은 파도를 넘어 포경기지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누구를 데리고 갈 것인가? 누구에게 후발대 지휘를 맡길 것인가? 남는 자와 먼저 가는 자를 위해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가? 이런 질문도 던져본다. 나라면 무엇을 했을까? 펭귄과 물개를 사냥하고 껍질을 벗기고 기름을 보관하며 배를 손질하고 조개를 줍고 하는 중에 나는 어떤 쓸모로 28명의 생존에 기여했을까?

그리고 남은 질문들. 남극 횡단에 성공하지 않았는데 왜 어니스트 섀클턴이 위대해 보이는 것일까? 남극 횡단이라는 기록보다 목표를 포기하고 누구나 다 절망하고 포기하고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한 명의 대원도 잃지 않고 돌아왔다는 것, 그의 말대로 지옥을 헤쳐 나왔다는 것이 남극 횡단보다 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어니스트 섀클턴은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

감염관리 의사로서 그의 면모를 내게도 적용해본다. 병원의 위기에서 대원들을 이끌고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수천에 이르는 직원·환자와 함께 코로나19에 점령당하지 않고 무사히 이 시기를 돌파하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내가 가야 할 여정이다. 우리 모두가 가야 할 길이다. 언젠가는 우리도 구조될 것이다.

최영화 아주대 감염내과 교수

*독서방역본부는 최영화 아주대 감염내과 교수가 감염병 전문가의 시각으로 책을 읽는 칼럼입니다. 최 교수의 저서로 (글항아리 펴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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