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일반화된 편견

등록 2019-06-07 03:01 수정 2020-05-02 19:29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두 경찰이 취객을 진압하는 과정을 찍은 이른바 ‘서울 대림동 여경’ 동영상에서 논란이 된 장면은 화면이 꺼지고 음성만 나오는 대목이다. 한 남성이 “(수갑) 채워요?”라고 묻고 여성 경찰이 “채워요!”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녹음된 이 부분은 여성 경찰이 제 역할을 못하는 동안 시민이 취객을 제압한 것으로 오인됐다. ‘여경이 취객 하나 제압 못해 시민에게 위험한 일을 시켰다’는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정확한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얼마 뒤 밝혀진 사실은 달랐다. “채워요?”라고 말한 사람은 시민이 아니라 교통경찰이었다.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교통경찰은 “여경이 취객의 상체를 완전히 무릎으로 제압하고 있었다”고 증언했고,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무술 유단자인 남성 경찰도 한 사람의 취객을 혼자 제압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말을 종합하면 남성 경찰도 혼자 제압하기 힘든 취객을 여성 경찰이 제압했지만 이 사건은 ‘여경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비화했고 ‘여경 무용론’이라는 주장이 등장했다. 대중은 경찰에게 폭언과 폭행을 하는 취객에게 분노하는 대신 경찰청장이 “침착하고 지적이었다”고 평가한 현장의 여성 경찰에게 분노했다.

이 사건은 두 가지 오류를 보여준다. 첫째는 경찰 업무에 대한 몰이해다. 전문가들은 경찰 업무에서 육체적 물리력이 필요한 것은 일부분이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주요 업무는 지력이 필요한 수사 능력과 민원인·피해자에 대한 소통 능력이다. 성폭력 피해자의 조사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2차 피해 방지, 강력범죄 피해자의 다수인 여성에 대한 보호와 조사 등에서 여성 경찰의 역할 중요성도 이 논쟁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여성에 대한 일반화된 편견’이라는 두 번째 문제다. 애초에 논쟁은 ‘여성 경찰이 취객을 제압하지 못했다’는 잘못된 사실에서 촉발됐다. 그러나 현장 대응에 문제가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여전히 해당 경찰과 여성 경찰 전체를 한 덩어리로 묶어 비난하는 이들에게 정확한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편견, 즉 ‘여성(경찰)은 무능하다’는 전제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여성의 전문성과 능력에 대한 편견이 공고한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자격을 증명하더라도 편견 자체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저 ‘보기 드문 여자’가 될 뿐이다. 이것은 업무 능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소비하는 여성이 ‘된장녀’로 불릴 때, 아기와 함께 공적인 장소에 나타난 여성이 ‘맘충’으로 불릴 때, 운전하는 중년 여성이 ‘김여사’로 불릴 때, 여성들은 자신이 된장녀·맘충·김여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한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증명해내면 ‘개념녀’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개념녀든 능력녀든 부당한 편견 속에 스스로 검열하고 증명해서 평가받는 것 자체가 불평등한 위치에 놓인 것이다.

반면 버닝썬 사건에서 보다시피 남성 경찰이 성폭력 카르텔과 유착 관계를 맺어도, 고 장자연 사건에서 보다시피 남성 언론인이 성상납을 받아도, 그것은 경찰이나 언론의 문제일 뿐 남성 문제로 치환되지 않는다. 남성 정치인의 무능은 정치집단의 무능이지만 여성 정치인의 무능은 여성의 무능이다. 여성에 대한 비판은 언제나 성별에 대한 비판이다.

남성과 여성 정치인의 무능 차이

일각에서는 이 사건이 성별 대립 양상이 되는 것을 우려한다. 그러나 이것은 ‘동등한’ 대립이 아니다. 대림동 사건의 본질은 취객이 경찰을 때릴 수 있는 공권력 경시 풍조지만, 이미 수많은 사람이 이 영상을 여성혐오의 근거로 오용해 확산했기 때문이다. 관성적인 혐오와 비하는 언제나 진실에 대한 판단을 앞지른다.

하재영 작가
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이 기존 구독제를 넘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은 1994년 창간 이래 25년 동안 성역 없는 이슈 파이팅, 독보적인 심층 보도로 퀄리티 저널리즘의 역사를 쌓아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진실에 영합하는 언론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투명하면서 정의롭고 독립적인 수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의 가치를 아는 여러분의 조건 없는 직접 후원입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아래 '후원 하기' 링크를 누르시면 후원 방법과 절차를 알 수 있습니다.
후원 하기 http://naver.me/xKGU4rkW
문의 한겨레 출판마케팅부 02-710-0543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