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그거 알아? 2003년 중국에 사스라는 전염병이 돌았대. 그래서 사람이 아주 많이 죽었대. 베이징에 있는 학교들도 다 문 닫고 공부를 안 했대. 그건 좀 부럽더라. 지금은 공기오염 있을 때만 마스크를 쓰지만 그때는 집에서도 밥 먹을 때만 빼놓고는 다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했대. 우리 선생님이 그러는데 사스 걸려 죽을까봐 아주 무서웠대. 엄마는 그때 뭐하고 있었어?”
베이징 집 근처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녀석이 하교 후 집에 오자마자 가방도 안 내려놓은 채 다급한 표정으로 쏟아놓은 ‘긴급 속보’다. 까맣게 잊었던 기억 속 한 장면이 영화 스틸사진처럼 한컷 한컷 뇌리를 휘젓고 다녔다.
2003년 4월1월 ‘시계’가 멈추다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중국에는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라는 아주 무서운 전염병이 퍼졌고 사람들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 자기 방 안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나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종일 베이징 집 안에 처박혀서 밤낮으로 DVD 플레이어를 끼고 살았다. 한국인은 김치와 마늘을 먹고 살기 때문에 사스에 특히 강한 면역력을 보이는 민족이라고 떠들어대는 중국 언론 보도를 본 뒤 날마다 삼시 세끼 김치찌개·김치볶음밥·김치볶음 등 온갖 김치요리를 해먹고, 간식으로 생마늘 두세 쪽을 된장에 찍어 먹으며 살았다. 그 시절 중국에서 살았던 우리는 모두 ‘산다는 것’은 ‘살아남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날도 나는 ‘살아남기 위해’ 신김치를 볶아 생두부에 얹어 먹으며 오늘은 DVD로 무슨 영화를 볼까 고민 중이었다. 그때 마침 걸려온 친구의 전화. “너 뉴스 봤어? 장국영(장궈룽)이 죽었대! 홍콩의 한 호텔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대. 이거 실화냐?”
그날은 4월1일, 만우절이었다. 그렇게 거짓말처럼 장국영이 죽었다. 사스에 걸리지도 않은 그가 왜 스스로 죽어야만 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매일 두문불출, 김치와 마늘을 먹으며 동굴 속 곰처럼 살아가던 나에게 장국영의 죽음은 사스보다 더 치명적인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다 그랬다. 장국영이 죽었다니!
“다리 없는 새가 살았다. 이 새는 나는 것 외에는 알지 못했다. 새는 날다가 지치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잠이 들었다. 이 새가 땅에 몸이 닿는 날은 단 하루 그 새가 죽는 날이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1990)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그 ‘다리 없는 새’는 영화 속에서 ‘아비’로 나오는 장국영이다. 영화 밖 현실의 삶에서도 장국영은 아비와 비슷한 ‘다리 없는 새’였다.
아내가 둘인 홍콩의 유명 재봉사의 열 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장국영은 영화 속 아비처럼 어릴 때부터 늘 ‘사랑’을 갈구해온 외로운 아이였다. 아비는 생모에게 버림받은 후, 사랑하는 여인한테도 버림받을까봐 늘 먼저 ‘버리고’ 떠나는 바람둥이다. 장만옥(장만위)이 연기한 수리진을 꼬시기 위해 매일 오후 3시 그녀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가는 아비.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영화 속 명대사. “1960년 4월16일 오후 3시 1분 전에 너는 나와 함께 있었어. 이 1분 때문에 너는 나를 영원히 기억하게 될 거야….”
어디 그뿐인가. 러닝셔츠와 트렁크팬티만 입은 채 음악 에 맞춰 멋들어지게 맘보를 추는 장국영의 모습은 꿈속에서라도 다시 보고 싶은 애틋한 명장면이다.
장국영이 죽던 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멍한 상태로 종일 신김치볶음에 맥주를 마시며 을 봤다. 어머니를 찾아 필리핀에 갔지만 끝내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로, 두 주먹을 움켜쥔 채 숲 속을 터벅터벅 걸어가던 아비의 뒷모습은 맘보를 추는 장면만큼이나 오랫동안 클로즈업돼 남았다.
장국영이 있는 서점 풍경“날 장국영이라고 부르지 마, 전설이라고 불러줘. 난 전설이 될 거야. 난 전설이 돼야 한다고.” 존 파워스가 쓴 책 를 보면, 장국영은 생전에 전설이 되고 싶어 했다. 정말로 농담이 아니라, 그는 스스로 전설이 되고 말았다. 2003년 4월1일, 한 마리 다리 없는 새가 날다 지쳐 땅에 몸을 눕힌 날. 그의 인생 시계가 멈춘 날, 이후 우리는 장국영을 영원히 기억하게 되었다.
장국영이 그리운 사람들은 홍콩으로 간다. 특히 매년 4월1일 홍콩은 장국영을 추모하는 전세계 팬들의 성지가 된다. 하지만 그를 그리워하는 건 그가 살았던 홍콩의 사람들과 전세계 팬들만이 아니다. 상하이의 옛 프랑스 조계지 거리 사오싱루에도 그를 그리워하는 이가 많다. 상하이에 살거나 중국에 살면서 홍콩까지 갈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사오싱루에 와서 그의 흔적을 더듬고 추모하다 간다.
상하이 사오싱루 27번지에는 ‘장국영 서점’이라는 작은 독립서점이 있다. 중국의 유명 사진작가이자 역사연구가인 얼둥창이 1996년 사오싱루에 문을 연 한위안(汉源) 서점이다. 이곳이 ‘장국영 서점’으로 더 유명한 이유는 장국영이 상하이에서 가장 사랑했던 서점이기 때문이다.
얼둥창은 장국영보다 3살 어린 1959년생으로, 주로 중국 도시의 변천사를 사진으로 찍고 중국 근현대사를 연구했다. 특히 상하이 도시 변화사를 기록사진으로 촘촘히 담아 사진집을 냈고, 미국 시사주간지 에도 여러 차례 소개된 세계적인 사진작가다.
1996년 얼둥창은 사오싱루에 한위안 서점을 열었다. 한위안은 카페와 서점을 겸한 ‘북카페’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에선 커피 등 간단한 음료와 주류를 파는 서양식 카페서점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위안은 서점과 카페가 공존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독립서점이었다. 전세계를 다니며 역사를 연구하고 사진을 찍은 얼둥창은, 중국에 돌아와서 자신이 찍은 사진과 출판물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중국에서는 받아주는 출판사가 없어 주로 홍콩과 외국에서 자신의 저작물을 출판했고, 급기야 직접 국내에 출판사를 차려서 수많은 도시역사 서적을 펴내기도 했다. 서점카페를 연 이유는, 자신이 출판한 책들과 도시역사 관련 책들을 비치해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위안에는 유난히 역사책과 사진집이 많다. 서점 한켠에는 얼둥창이 직접 고른 책들을 모아두기도 했다.
한위안이 유명해진 것은 상하이 최초나 마찬가지인 카페서점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독립서점이란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장국영의 영향이 더 크다. 장국영이 다녀갔고, 한때 그가 상하이에서 가장 사랑했던 서점이 바로 한위안이기 때문이다.
상하이에서 공연이 있으면 장국영은 가끔 한위안을 찾아와 한나절을 보내곤 했다. 주로 공연이 없는 낮에 혼자 와서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은 채 한참 동안 책을 읽고 갔다. 그러다 우연히 거리를 지나가던 눈 밝은 팬들에게 ‘발견’돼 유명해진 한위안은 순식간에 장국영 팬들의 성지가 되었다.
한위안 곳곳에서 장국영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가 앉아 책을 읽던 소파에는 그 시절 홀로 독서에 몰두하던 장국영 사진이 놓였다. 보면 볼수록 마음이 아리고 애틋해지는 사진들이다.
“오늘 저녁에 공연만 없었더라도 좀더 오랫동안 머물며 책을 읽고 싶은데 말이죠….” 공연 시작 시간이 되어 서둘러 서점을 뜨면서 못내 아쉬워했다는 장국영은 한위안에 놓인 사진 속에서 ‘영원히’ 책 읽기에 몰두하고 있다. 상상해보라. 한 작은 서점에서 코 박고 독서에 빠져 있는 우리의 영원한 아비, 장국영의 모습을.
그 시절 우리는 모두 장국영을 사랑했다. 하지만 저마다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조금씩 다를 것이다. 내가 장국영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직도 선명한 두 장면 때문이다.
1997년 1월4일 홍콩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장국영은 8만여 명 앞에서 ‘고백’을 했다. “이 노래는 내 어머니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탕허더 선생에게 바칩니다.” 말을 마친 그가 부른 노래는 (月亮代表我的心)다. 영화 에서 덩리쥔이 불러서 유명해졌지만, 나에게 이 노래는 장국영의 목소리로 기억된다. 1987년 이후부터 장국영은 자신이 양성애자임을 공개했고 평생을 같이할 동성의 반려자가 있다고 자주 암시했지만, 그날 처음 수많은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두 번째 장면은, 아직도 중화권 매체에서 회자되는 ‘이번 세기 가장 감동적인, 두 사람의 맞잡은 손’으로 알려진 사진이다. 그가 죽기 두 해 전인 2001년 8월 어느 날, 장국영은 홍콩의 한 쇼핑몰에서 동성 연인과 쇼핑하고 나오다 파파라치들에게 사진이 찍혔다. 그는 회피하거나 찌푸리지 않고 일부러 보란 듯이 웃으며 당당하게 연인의 손을 잡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다정히 걸어갔다. 그 모습은 파파라치들의 사진기 속에 고스란히 기록돼 지금까지도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세기의 사진’으로 전해진다.
또 하나, 내가 장국영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장면이 있다면 상하이 사오싱루 27번지 한위안 서점에서 독서에 열중하는 모습이다. 그 사진을 본 사람들은, 설령 장국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를 사랑하지 않을 재간이 없을 것이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장국영은, 상하이의 그 서점을 사랑하고 있었다.
새장은 비워지고 철새들은 떠나네덧붙이는 말. 한위안 서점은 2017년 12월26일 문을 닫았다. 그날 서점 문 앞에는 이런 내용의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 “이번 겨울에는 철새들도 서식지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요즘은 거리에서 신문을 파는 가판대도 보기 힘들더군요. 새장을 비우고 새를 바꾸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21년간 문을 열어온 이 서점에는 우리의 굳건한 노력과 정성이 녹아 있답니다.
상하이(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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