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 나는 정치부 기자였다. 국회 기자실에서 석간신문인 를 훑어보다 정치면이 아닌 문화면에 눈길이 꽂혔다. 제1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 기사였다. 문화 관련 시민단체인 문화연대와 가 공동주최하는 대안적 의미의 음악상이라 했다. 기존 가요상들이 인기도, 방송 출연 빈도, 음반 판매량 등을 따져 상을 주는 데 반해, 이 상은 오로지 음악적 성취만 보고 수상자를 선정한다 했다. 그 나물에 그 밥인 기성 가요상에 식상해하던 내가 딱 원하던 상이었다.
한겨레가 공동주최사로 나서기도수상자 면면을 보니 더더욱 끌렸다. 밴드 더더 4집이 올해의 음반상을, 러브홀릭의 이 올해의 노래상을 받았다. 올해의 가수상은 휘성, 이상은, 빅마마에게 돌아갔고, 올해의 신인상은 정재일의 품에 안겼다. 아는 음악은 반가웠고, 잘 모르는 음악은 궁금했다. 훗날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의 존재를 안 것도 수상자 명단을 통해서였다.
그해 4월 국회의원 총선거가 치러지고 인사이동 때 문화부에 지원했다. 운 좋게 희망사항이 받아들여졌고, 더 운 좋게 대중음악 담당 기자를 맡게 됐다. 물 만난 고기처럼 음악가들을 만나고 공연장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대중음악 담당인 이승형 기자에게 제안을 받았다. “너,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들어올래?” 경쟁사라 할 수 있는 다른 신문사 행사인데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럼요. 영광이죠.”
선정위원회에는 평론가, 음악방송 피디, 음악 담당 기자, 학자, 시민단체 인사 등이 두루 있었다. 연말이 되면 한 해 동안 나온 음반을 놓고 투표해 후보를 정하고, 최종 수상자를 정한다. 단순히 투표로만 정한다면 간단한 일일 텐데, 막판에는 반드시 대면 회의를 열어 토론을 펼쳤다. 각자 지지하는 후보작의 우수함을 설파하고 치열한 토론을 거쳐 비일비재하게 재투표를 했다. 언젠가는 올해의 음반상에서 팽팽히 맞서던 두 후보를 두고 밤새 토론하고는 새벽녘에 최종 투표로 결정한 적도 있었다. 당시 단 한 표 차이로 당락이 갈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몇 년 지나 한국대중음악상은 문화연대와 로부터 독립해 선정위원회 이름으로 독자적인 시상식을 열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권 시절, 정부 지원이 갑자기 끊기면서 재정 위기를 맞자 내가 다리를 놓아 가 공동주최사로 나서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독자적으로 시상식을 꾸려나갔다. 문화계 인사 블랙리스트로 흉흉하던 시절, 정부 지원은커녕 기업 후원도 따내기 쉽지 않았다. 어느 해는 돈이 없어 시상식도 열지 못하고 수상자만 선정해 발표하려 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지금은 정부 지원이 재개되고 기업 후원도 따내면서 안정적 운영이 가능하게 됐다.
쉽지 않은 일을 격려하는 자리지난 2월26일 제16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이 열렸다. 이 상의 가장 큰 특징은 수상자를 절대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보자들이 웬만하면 다 참석한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인들이 모여 서로 인사를 나누고, 수상자를 축하해주는 훈훈한 분위기가 이제는 전통처럼 자리잡았다. 이날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은 양희은은 최우수 포크 노래 부문 시상자로 나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경쟁하는 게 아니라 축제처럼 즐기는 자리잖아요.”
이날 올해의 신인상을 받은 싱어송라이터 애리의 수상 소감에서 나는 한국대중음악상의 존재 이유를 곱씹었다. 수상을 전혀 예상치 못한 듯 놀란 표정으로 무대에 오른 애리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음악을 시작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했고, 처음 공연 다니고 앨범 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며 많은 일을 겪었어요. 힘든 일도 있었고, 고마운 일도 있었고, 다들 어떻게 음악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어요. 다들 쉽지 않구나, 너무 답답했는데 힘을 얻고 갑니다. 이 상을 받지 않았더라도 힘을 받았을 거예요.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다른 음악가들 마음이 느껴졌어요. 후보에 오르지 않은 다른 음악가들도 수고 많으셨고요. 나의 가치나 꿈이 평가절하되거나 힘든 순간이 있더라도 계속 함께 서로 용기를 주면서 (음악을) 하고 싶어요.” 이 얘기를 들은 음악가들 모두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이날 시상식에선 방탄소년단이 올해의 음악인, 올해의 노래, 최우수 팝 노래 등 3관왕에 올랐다. 애초 다른 시상식 일정으로 참석이 힘들다 했던 방탄소년단은 앞선 일정을 마치고 뒤늦게 합류해 트로피를 직접 받았다. 방탄소년단 리더 RM은 ‘올해의 음악인’ 트로피를 받은 뒤 “양희은 선생님께서 공로상을 받으셨다고 들었다. 제가 살아온 기간보다 더 오랜 기간인 45년 동안 한 노래를 부르셨는데, 그 덕에 저희가 이 자리에 있는 것 같아서 감사드린다”고 했다. 이어 “사실 이 상이 가진 권위와 품격에 비해 저희가 지난해에 (시상식에) 불참해 너무 죄송하고 한이 컸는데, 올해는 직접 뵙고 감사의 말씀을 드릴 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덧붙였다. 슈가는 ‘올해의 노래’() 트로피를 받고는 “제가 아이돌 한다고 했을 때 같이 음악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도대체 왜? 왜?’ 이런 반응이 많았다. 성별, 국적, 나이 구분 없이 그냥 음악을 하고 만들고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 상의 의미가 어떤 건지 너무 잘 알고,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류와 비주류, 장르 간 경계를 넘어 음악적 성취를 인정하고 축하해주는 이 상의 취지에 어울리는 수상 소감이었다.
“함께 걱정해달라”는 장필순마지막 순서로 올해의 음반 트로피를 받은 주인공은 장필순이었다. 그는 수상 소감 중 “콜트를 비롯해 보이지 않는 곳에 소문나지 않은 힘든 일들이 많이 있다. 여러분들의 관심에서 시작되는 일들이 많다. 함께 걱정해달라”고 당부했다. 2007년 기타 생산업체 콜트·콜텍에서 해고된 뒤 지금까지 복직 투쟁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 얘기다. 이날 해고 노동자로 구성된 밴드 ‘콜밴’의 이인근 금속노조 콜텍지회장은 최우수 포크 음반 부문 시상자로 무대에 올랐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회 특별상을 수상한 지 어느덧 7년이 흘렀습니다. 정리해고로 쫓겨나고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거래 희생양이 돼 거리에 선 지 어언 13년째입니다. 이 자리에 오니 더욱 간절해지네요. 저희가 만든 기타가 다시 한번 여러분들에게 연주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음악이 음악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와 함께 흐르는 ‘숨결’임을 새삼 깨달았다. 올해 시상식에 가길 참 잘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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