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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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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가 된 내 방

한겨울 보일러가 얼어버렸다
등록 2019-01-12 05:00 수정 2020-05-02 19:29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한 장면.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한 장면.


2018년 1월28일 일요일
아침에 일어났는데 입에서 뽀얗게 입김이 나왔다. 보일러가 얼어 고장이 났다.
지난여름에는 미친 듯 퍼붓는 폭우에 물이 새 물난리를 겪었는데, 이번엔 방이 냉장고가 됐다. ‘왜 내 작은 방은 이렇게 모든 계절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걸까?’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려고 마음먹었는데 한순간에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전원을 몇 번 눌렀지만 보일러는 켜지지 않았다.
캠프 갈 때 쓰는 침낭을 꺼냈다. ‘될 대로 되라.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프로젝터와 노트북을 연결해 영화를 찾았다. 침낭 안에 몸을 ‘쏘옥’ 넣고 영화를 봤다. 영화는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었다. 졸려서인지, 추워서인지 정신이 흐릿한 가운데 영화는 기억과 꿈 사이를 오갔다. 여주인공인 케이트 윈즐릿이 너무 매력적인 영화였다.
‘혹시 자고 일어나면 고쳐져 있지는 않을까.’ 영화가 끝나고 잠을 잤다.
해가 기울 때쯤 일어났다. 보일러는 그대로였다. 그제야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에서 ‘언 보일러 수리법’을 검색했다.
냄비 세 개를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물을 끓였다. 보일러실에 언 것으로 추정되는 관 부분에 뜨거운 물을 들이부었다. “파시식~” 차갑게 굳은 관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면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한 시간여를 그렇게 물을 붓고 전원을 다시 켜자 보일러가 “우웅” 하는 웅장한 소리를 냈다. 다시 발화를 시작한 보일러의 심장 소리였다.
보일러를 고쳤다는 뿌듯함에 쾌재를 불렀다. 수리공을 불렀더라면 최소 10만원은 내야 했을 텐데. 뭔가 불로소득을 얻은 느낌이었다. 가까운 편의점으로 가 소주를 한 병 사왔다. 연예인들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을 켜놓고 나도 술을 마셨다. 마치 그들과 함께 같은 공간에서 술을 마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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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똑, 똑….’

매일 아침 출근하기 전, 그리고 밤에 잠들기 전에 수도꼭지를 잡고 한바탕 씨름을 벌인다.

“날이 너무 추우면 수도관이 얼어붙을 수 있으니 물을 완전히 잠그지 말아주세요.” 건물 입구에 붙은 안내문의 안내에 따른 것이다. 지난해 ‘언 보일러 끓는 물 붓기’ 파동을 겪은 나는 이런 공지를 무심코 지나치지 않게 됐다.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도록 하려면 수도꼭지를 완전히 잠그지도, 풀지도 않고 적절하게 조절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어떨 땐 한 번에 척 되기도 하지만 대개 몇 번 물을 틀었다 잠갔다를 반복한다.

물방울이 너무 빨리 떨어지면 물이 아까운 생각이 든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유엔(UN)이 지정한 ‘물 부족 국가’가 아닌가. 하지만 이 물을 완전히 잠그면 수도관이 얼어붙어 ‘물 부족 1인가구’로 전락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한참을 잡고 있다가 물방울이 늘어지는 게 보일 정도로 천천히 떨어지면 그제야 돌아선다. 얼마 전엔 밤에 잠들기 전에 물이 ‘똑, 똑’ 떨어지게 해놓았는데 물방울 소리에 잠을 설쳤다. “수도관이 얼어도 모르겠다. 잠은 자야지” 되뇌면서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물을 잠그고 다시 잤다.

엊그제는 지난달 가스요금 고지서를 받아들고서 “억!” 소리를 질렀다. 지난해처럼 보일러가 얼어서 고장날까봐 약하게라도 늘 켜놓고 지냈는데 지난해 이맘때보다 가스요금이 두 배 더 많이 나온 것이다. 방 한구석에 1년 동안 방치돼 있던 침낭의 존재감이 크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보일러를 끄고 침낭에서 자다 또 보일러가 얼면 어떻게 하지? 겨울은 춥고, 걱정은 끝이 없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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