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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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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이등병의 죽음

병사에게 필요한건, 친구야!
등록 2018-11-24 15:40 수정 2020-05-03 04:29

2008년 10월20일 월요일

어제 오전 4시50분, 같은 사단 55연대 원모 이병이 탄약고 근무 중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쏴 세상을 떠났다.
서울에 사는 부모님은 5시간 뒤쯤 현장에 도착했다고 한다.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사고 현장에 도착한) 유가족 중 한 명이 발작 증세를 보이며 쓰러졌고, 이마가 찢어졌다고 했다.
부대는 발칵 뒤집혔다. 상부에서 부대 정밀진단 명령이 떨어졌다. 추계 진지공사에 군단 위생 검열, 전투장비 지휘 검열까지 겹쳤다. 부대원들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우리는 일단 군단 위생 검열 준비를 위해 주둔지 정리를 했다. 라디오를 켜고 작업을 시작했다. 이문세 아저씨가 진행하는 라디오인데, 월요일이라 어김없이 전제덕 아저씨가 진행하는 재즈 프로그램이 흘러나왔다.
뒷마당을 청소하는데 기도(고양이 이름)와 기도의 새끼 고양이들이 훼방을 놨다. 기도는 뒷마당 가운데서 잠을 잤다. 새끼들은 쉬지 않고 앞발로 서로를 때리고, 도망가고, 물어뜯고를 반복했다. 그러다 지쳐서 엄마 고양이 젖을 물고는 새근 잠이 들었다. 귀여웠다. 고양이 구경과 마당 쓸기를 반복하던 나는 네잎클로버를 발견했다. 200일 남짓 남은 군생활에 어떤 행운이 깃들려 함일까?
이번 자살 사건의 파문은 컸다. 부대 전체에 대대적인 조사가 있었는데 22사단 수색대대장이 업무를 태만히 하고 다른 간부의 돈을 빌려 카지노에서 도박한 사실이 드러나 바로 옷을 벗었다. 원 이병이 목숨을 끊은 55연대장은 별을 달지 못할 거라 했다. 자살 사고로 조바심 난 간부들이 병사들을 괴롭히고 나섰지만 나는 ‘병사들에게 필요한 건 간부의 관심이 아니라, 친구야’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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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군인의 죽음 이후 일상이 어떻게 이토록 평화로울 수 있었는지 떠올려보려 했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언론 보도를 찾아보니 강원 지방방송의 보도 두 건만이 그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다.

나도 총구를 물어본 적 있다. 원 이병이 목숨을 끊고 두 달 뒤, 혹한기 훈련 중이었다.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 구역의 겨울은 추웠다. 텐트 말뚝을 박을 수 없을 만큼 땅이 얼어붙었다. 텐트를 겨우 치고, 침낭 안에 몸을 넣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끌어안은 총이 너무 차가웠다.

실탄은 없지만 총구를 입에 물었다. 정신이 또렷해졌다. 이렇게 추운 곳에서 허리가 아플 정도로 떨면서 잠을 청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했다. 군대에서 내가 겪은 부조리들이 떠올랐다. 대한민국의 평화를 지키는 군대는 왜 이렇게 폭력적인가. 민주주의 국가의 군대가 민주적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군인들이 총으로 적을 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야기는 너무 자주 들었다. 원 이병이 숨진 55연대에선 아군을 쏘는 사건도 있었다. 2014년 6월 임아무개(26) 병장은 수류탄과 총기로 군인 다섯 명을 숨지게 하고, 일곱 명을 다치게 했다.

지난 11월16일 오후 강원도 양구의 21사단 지피(GP·감시초소)에서 김아무개(21) 일병이 총상으로 숨진 사건을 보고 이 일기를 꺼내 읽어봤다. 김 일병의 죽음은 남북의 지피 철거 기간과 맞물리면서 여러 추측을 낳았다. 군은 “대공 혐의점은 없다”며 타살 가능성은 작게 보고 있지만, 의혹은 잦아들지 않는다. 의혹의 대부분은 북한에 우호적인 정부가 북한을 돕기 위해 무장해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일병이 숨진 다음날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 반대’ 집회가 열렸다. 이들은 국가 안보에 대한 우려를 외쳤다.

옆 부대 병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날 발견한 네잎클로버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국가 방위에 대한 우려는 대치 상황의 종결로만 사라질 수 있다. 자기 삶을 유지할 동기도 없는 청년에게 총을 쥐여 전선에 보내는 ‘자해 강요’야말로 가짜 안보다.

글·사진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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