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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수리공의 인건비, 의사의 인건비

진짜 저평가된 노동은 무엇인가
등록 2019-05-08 01:15 수정 2020-05-02 19:29
민주노총의 노동절 129주년 기념대회가 5월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박승화 기자

민주노총의 노동절 129주년 기념대회가 5월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박승화 기자

2018년 12월26일
“이번주에는 ‘일기 쓰는 남자’를 쓰자”고 편집장이 말했다.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일기장 상자를 보관하는 창고 열쇠를 찾을 수 없었다. 인터넷에서 출장열쇠 연락처를 찾았다. 전화를 걸어 집주소를 알려준 뒤 집으로 향했다. 문득, 옷장 속 옷들을 뒤져보면 열쇠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가을 즐겨 입던 옷 안주머니를 뒤지니 열쇠가 ‘딱’ 있었다.
열쇠수리공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출발하셨나요?” “네, 지금 가고 있어요.” 이때라도 “열쇠를 찾았으니 안 오셔도 된다”고 했어야 하는데, 문 여는 데 얼마나 들겠나 싶어 취소하지 않았다.
공구상자를 들고 서울 마포구 염리동 고개 꼭대기 건물, 4층까지 올라온 열쇠수리공의 이마엔 한겨울인데도 땀방울이 맺혔다. 나는 창고문을 열어달라 하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주머니의 열쇠를 만지작거리면서….
장총처럼 생긴 장비 끝을 열쇠 구멍에 넣고 레버를 당기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열쇠수리공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4만원입니다” 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네? 그렇게 비싸요?”라고 물었다. 내가 더욱 놀란 건 열쇠수리공 아저씨의 화난 표정 때문이었다. “아니, 사람을 여기까지 불러서 일을 시켰으면 그 정도는 나오죠!” 그는 출장을 부르면 3만원이 기본이라고 했다.
그래도 억울했다. 주머니에 열쇠가 있는데 생돈 4만원을 들이게 됐으니…. 아저씨가 떠난 뒤 나는 반쯤 열린 창고문을 망연자실 바라봤다. 내 조급함을 자책했다.
우울했다. 뭔가 기분을 바꾸고 싶었다. 이미 낸 돈은 되찾을 순 없으니, 이 일에서 4만원 이상의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열쇠수리공의 상기된 얼굴이 떠올랐다.
‘노동건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노동을 강조하는 기자가 되겠다’ 마음먹었으면서 다른 사람의 노동가치를 얕잡아봤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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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질환자의 입원 수가가 낮고 외래진료로는 수익이 안 나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어렵다.”

최근 잇따라 일어난 정신질환자의 범죄와 관련해 정신보건 체계를 취재하는데, 한 대학병원 의사의 인터뷰가 눈에 들어왔다. 보건의료 문제가 제기되면 ‘저수가’ 탓으로 돌리는 것은 의료계의 오래된 공식이다. 의료서비스 수가의 상당 부분은 의사의 인건비다.

5월1일 노동절 다음날인 2일, 국민건강보험이 의약단체와 내년도 수가 협상에 들어갔다. 최대집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우리나라의 의료 수가가 매우 낮다는 것은 정부, 언론 등이 모두 인정하고 있다. 정부의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에 따른 상급종합병원 환자 쏠림 현상 심화로 어려움을 겪는 의원급 의료기관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3월부터 ‘수가 인상’을 강조하며 의사 총파업까지 불사하겠다고 주장해온 그였다.

의문이 남는다. 정말 ‘저수가’는 모든 문을 여는 만능열쇠일까? 수가를 올리면 환자 쏠림 현상이 해결될까? 잘 모르겠다.

의사들은 자신의 노동이 저평가됐다고 토로하는데 현재 한국 사회에서 저평가되지 않는 노동은 무엇일까? 기자가 “내 노동은 저평가됐고, 적정임금을 받지 못하니 기사의 신뢰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129번째 노동절을 맞은 날,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 비준과 노동기본권 향상을 촉구하기 위해 서울 광화문광장에 모인 노동자 3만 명이 떠올랐다. 국민의 보편적인 건강 향상을 위해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 상승이 필요하다고, 국제노동기구 핵심 협약을 비준해야 한다고 말하는 의사를 보고 싶은 건 너무 큰 기대일까?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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