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14일
“사과가 열 개 있는데 너는 예쁘고 탐스러운 것과 못생기고 상처 입은 것 중 무엇을 먼저 먹겠냐?”
추석을 맞아 집에 갔는데 아버지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감을 못 잡겠다는 표정을 짓는 내게 아버지는 말했다.
“얼핏 보기엔 10개의 사과를 다 먹는다는 점에서 똑같아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예쁜 것부터 먹는 사람은 항상 갖고 있는 사과 중 가장 탐스러운 것만 먹게 되지만 못생긴 것부터 먹는 사람은 항상 남은 사과 중 상태가 제일 나쁜 것만 먹게 된단다. 어느 쪽을 먼저 먹느냐에 따라 삶에 대한 행복의 차이는 크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느라 현재의 만족이나 행복을 포기하지는 마라.”
난 아버지의 이런 말들에 깜짝 놀란다. 하루가 멀다고 일을 벌이는 철없는 아들에게 잘하고 있다며, 너무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 고민하지 말고 매 순간 즐거운 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해줄 수 있을까? 아마 못할 것 같다. 감사드린다.
2년 전, 추석을 맞아 고향에 내려갔을 때다.
20년 지기가 열심히 돈을 모아 서울 강북에 신축 아파트를 한 채 구입한 이야기가 나오자 아버지가 ‘예쁜 사과 선(先)섭취 이론’을 꺼냈다.
대학을 마치고 직업군인이 돼 열심히 돈을 모았고, 전역한 뒤 민간은행에 입사한 동무는 저축을 열심히 해 짧은 시간 안에 꽤 큰돈을 모았다. 거기에 받을 수 있는 각종 대출을 끌어모아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다. 동무의 나이 32살 때다. 그는 결혼해 가정을 이뤘다.
20대 내내 방황해 모은 돈 한 푼 없었던 나는 29살에 언론사에 취업했다. 동무보다 사회생활을 5년 늦게 시작했다. 돈을 모으는 속도는 더뎠고 마음도 느긋했다. 동무가 아파트를 사던 해에 나는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사과 이론’에 따르면 집을 사려고 동무가 감내한 인내는 못생긴 사과였고, 막연한 꿈을 좇아 입학한 대학원은 예쁜 사과였다. 전체 생을 놓고 보면 동무는 대체로 안정적인 현실을 위해 꿈을 양보했고, 나는 꿈을 위해 불안한 현실을 감수했다.
정확히 2년이 흘러 지난 추석, 동무는 해외 출장으로 고향에 오지 않았는데, 동무가 산 집 가격이 크게 올랐다는 소문만 고향으로 왔다. 최근 떠들썩했던 서울 집값 상승에 따른 결과였다. 정부는 이미 주택을 갖고 있으면서도 돈을 벌려고 부동산 시장을 전전하는 ‘부동산 투기꾼’들을 잡기 위해 골몰했지만, 내 동무는 그런 투기꾼이 아니었다. 열심히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가장 빠르게 자산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한 결과로 집을 샀다. 친구의 집값이 오른 것을 내가 축하하는 이유다.
혼자서 곰곰이 생각했다. 동무는 맛없는 사과를 먼저 먹은 게 아니라, 사과의 수를 늘리려고 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아버지의 사과 이론은 다시 써야 하는 것은 아닌지. ‘사과가 10개 있다. 예쁘고 탐스러운 사과부터 먹어나갈 것인가? 사과를 먹고 싶은 마음을 참고 20개, 30개로 늘려나갈 것인가?’라고.
그런데 질문이 이렇게 바뀐다고 하더라도 내 삶의 태도는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사과 수는 잊어버리고, 그날 먹으면 가장 맛있을 것 같은 사과를 하나씩 먹어치워 나가겠다. 사과는 모으는 게 아니라 먹는 것이니까.
이재호 기자 ph@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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