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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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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한 도서관 싸늘한 ‘금기’ 선언

서울대 시설관리 노동자 파업보다 불편했던 도서관장의 격문
등록 2019-02-16 14:41 수정 2020-05-03 04:29
이재호 기자

이재호 기자

2017년 9월8일 금요일
“매앰∼ 매앰∼ 맴맴맴맴….”
오늘과 내일 사이, 일기장을 펴고 창문을 여니 매미 한 마리의 울음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온다. 한여름 떼로 울던 매미들은 간데없고, 매미 한 마리가 짝을 찾는 걸 보니 올해도 여름이 다 간 모양이다.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바뀌는 풍경을 응시하며 ‘계절’에 대해 생각한다.
인간이 느끼기에 더운 날을 ‘여름’, 서늘한 시기를 ‘가을’이라 부른다. 그런데 사람마다 체감온도가 달라 어느 한 시점을 꼬집어 여름과 가을의 경계라고 정하지 못한다. 딱히 정할 이유도 없다.
그렇게 인간의 계절은 애매하지만 매미의 계절은 모호하지 않다. 너무 또렷하다. 매미에게 계절은 단지 날씨의 변화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내일이 없는 매미는 가을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그렇게 생물은 저마다 다른 정의의 계절을 갖고 산다.
언론에서 “바야흐로 가을이 왔다”고 선언적 문구를 남발한다. 어쩐지 불편하다. 동의하기 힘들다.
그 계절을 건너지 못하고, 끝내 삶을 놓아버린 사람들이 있다. 아직 가을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은 나 같은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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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추워죽겠다.”

입춘이 훌쩍 지났지만 영하로 기온이 뚝 떨어진 날이 계속되자 볼멘소리가 나온다. 그런데 이 겨울이 정말 추워서 목숨을 잃은 아이들이 있다. 그것도 29명씩이나.

세계보건기구(WHO)는 시리아 북동부 알홀 지역에 있는 난민 캠프에서 지난 두 달 사이 최소 29명의 어린이와 신생아가 저체온증으로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최근 시리아 동부에서 벌어진 미군 주도 국제동맹군과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교전을 피해 2만3천 명이 알홀 난민 캠프로 향했다. 하지만 난방시설이나 의약품이 충분하지 않은 캠프에 난민이 몰리면서 이들에게 안전한 주거를 지원하는 데 실패했다.

겨울을 건너지 못하고 숨을 거둔 시리아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읽은 건 2월7일 서울대 관정도서관에서였다. 서울대 시설관리직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 중앙도서관과 관정도서관 난방을 중단한 날이다.

마감이 코앞까지 다가온 논문작성계획서와 책 쓰기 때문에 명절을 반납했는데, 2월4∼6일 설 연휴로 도서관이 문을 닫아서 아쉬웠다. 사흘 동안 잠긴 도서관 문이 열려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인지 난방이 안 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기사를 보고서야 알았다.

파업이 계속됐던 2월9일에도 학교를 찾았다. 기사를 본 다음이라 그런지 조금 서늘했지만 공부를 못할 정도는 아니였다. 개인적으로는 평소보다 공부가 잘됐다. 적당히 낮은 온도라 졸리지 않았다. 다만 화장실에 따뜻한 물이 안 나와서 손 씻기가 불편했다. 딱, 그 정도의 불편함이었다.

나를 더욱 불편하게 한 건 서울대 중앙도서관장이 한 언론에 기고한 ‘도서관 난방 중단… 응급실 폐쇄와 무엇이 다른가’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우리 공동체를 이끌 미래 인재들의 공부와 연구를 방해하는 행위는 ‘금기’”라고 선언한 관장은 노동자들이 학생들의 공부를 ‘볼모’로 잡았다고 격문을 썼다.

내가 응급실 환자였나? 시리아 내전의 인질이었나? 기고글을 읽고 나는 시리아 알홀 난민 캠프에서 공부한 줄 알았다. 추워서 공부를 못할 것 같았으면 다른 도서관에 가면 됐다. 서울대에는 난방이 중단된 중앙도서관과 관정도서관 외에 경영대, 법대, 농대 등 8개의 단과대 도서관이 있다.

‘공감 없는 학문의 전당’의 민낯을 본 듯해 씁쓸하다. 당락의 경계에서 촌각을 다투며 공부하는 학생들의 겨울이 차가움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임금 노동자의 겨울은 더욱 혹독하다.

“도서관에서의 오늘 하루가 학생 여러분의 이루고자 하는 꿈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시간이 되었길 바랍니다.” 밤 10시50분. 도서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오늘따라 공허하게 들린다. 도서관은 어디인가, 학생은 누구인가, 꿈은 무엇인가.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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