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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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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아 거세게 불어라

문득 눈보라 소리가 듣고 싶어 찾은 ASMR
등록 2019-06-20 00:41 수정 2020-05-02 19:29

2008년 1월12일 토요일
“쾅! 우르르”
포탄이 떨어진 듯한 굉음에 깜짝 놀라 잠이 깼는데 불침번 병사와 눈이 맞았다. “놀라지 마. 그냥 눈이 많이 내려서 그래.”
“탁, 탁….” 밤사이 내린 폭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뭇가지가 산 구석구석에서 둔탁한 비명을 지르며 부러졌다. 다시 잠들 수 없었다. 부러진 가지 끝에서 여러 생각이 피어났다. 이런저런 생각이 쌓이면 이번엔 나무가 아닌 내가 부러졌다.
새벽 2시쯤 됐을까. 분대장이 조를 나눠서 병사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30분씩 번갈아가면서 마당을 쓸자.” 생활관 밖에는 건물을 집어삼킬 듯 굉음을 내며 동해의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었다. 칼바람 헤치며 비질을 하는데 눈 녹은 물이 방한복에 스며들어 시려웠다. 어둠은 계속해서 내렸다. 마당 한구석으로 밀어내도 금세 수북이 쌓여 발자국을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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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공현진리 5790부대. 2007년 여름부터 2년 동안 이곳에서 군생활을 했다. 지난 4월엔 부대 인근에서 큰 산불이 났다. 사단 소속 부대가 불에 탔다고 부대 관계자로부터 전해 들었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 산불이 더 빠른 속도로 퍼졌다고 했다.

2008년 겨울 들었던 거센 눈바람 소리가 떠올랐다. 군복무를 마친 지 10년이 지나, 군생활의 기억은 희미해졌는데 그날 밤 휘날리던 눈보라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해졌다. 복잡한 도시에서 정신없이 살다가 문득 눈발 날리는 소리가 듣고 싶을 때가 있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매서운 눈보라 소리. 겨울엔 많지 않은 눈이 내리는 날을 골라 산에 올랐던 이유다.

그런데 지난 1년은 너무 바빠 ‘설산’을 찾지 못했다. 문득, 눈보라 소리가 듣고 싶어 방법을 궁리하다 유튜브에서 영상을 찾아보았다. 검색어는 ‘눈보라 ASMR(자율감각 쾌락반응 음향)’. 수십 개의 영상이 쏟아졌다. 짧게는 10∼20분에서 길게는 10시간까지 눈이 내리는 풍경을 담은 영상이었다. 집에 있는 프로젝터에 연결해 화면을 천장에 띄웠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고화질 영상을 보며 실제에 가까운 소리를 듣고 있으니 눈보라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 요즘처럼 더워지기 시작한 날에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그렇게 나만의 ‘자연의 소리를 찾아서’가 시작됐다. 유튜브엔 정말 거의 모든 ‘영상’과 ‘소리’가 다 있었다. 눈보라 소리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야외 텐트 안에서 듣는 소리, 집 안에서 장작을 태우는 벽난로를 보며 듣는 소리, 숲에 눈이 소복이 쌓이는 소리 등 다양했다. 이외에 청계산 계곡물 소리, 제주도 세화해변 파도 소리, 보성 녹차밭 바람 소리, 절 풍경 소리, 늦가을 서울숲 빗소리 등 우리나라 자연의 소리도 있다. 옆에 앉은 회사 동기가 휴가로 스위스 여행을 다녀왔다고 해 검색해보니 스위스 기차여행 영상도 있었다.

나는 사무실에서도 문득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유튜브로 검색했다. 글을 쓸 땐 주로 빗소리를 듣는데, 두 가지 소리를 조합하기도 한다. 비가 오는 카페 테라스에서 보사노바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쓰고 싶으면 빗소리 영상과 보사노바 영상을 동시에 튼다. 파도와 음악 소리 조합과, 비와 풍경 소리 조합도 좋다. 그렇게 거의 모든 계절, 거의 모든 장소, 거의 모든 날씨를 간단한 검색만으로도 감상할 수 있다.

얼마 전, 강가에 산책을 나갔다가 반짝이는 야경을 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야경을 매일 보며 살 수 있을까?’ 스마트폰을 꺼내 부동산 중개 앱을 켜니 강이 보이는 아파트 가격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문득 유튜브가 떠올라 검색했다. ‘강’ ‘야경’ ‘창문’. 세 단어를 조합하니 미국 시애틀 앨카이 해변의 잠 못 이루는 야경이 나왔다. 오늘은 벽에다 이 영상을 틀고 잠을 청해야겠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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