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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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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에 알았다

완벽한 아날로그 ‘릴투릴 테이프’
등록 2018-11-21 14:15 수정 2020-05-03 04:29

2018년 7월17일

“와! 이건 미쳤어!”

고등학교 때 같이 밴드를 했던 친구 원일이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함께 간 술집에서 ‘릴투릴 테이프’ 기기에서 음악이 흘러나올 때였다. 나도 넋을 놓고 돌아가는 릴을 한참 쳐다봤다. 대부분 휴대전화로 음악을 들어 엠피스리(MP3) 플레이어도 보기 힘든 시대가 아닌가.

하지만 우리가 놀랐던 건 너무 오랜만에 테이프 재생기를 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기에 내장된 진공관 앰프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가 너무 따뜻했다. 진공관이 뜨거워지면서 소리도 데워졌다. 신문 윤전기에서 갓 찍어낸 종이 신문 같았다. 스마트폰으로 듣는 음악이 인터넷 기사라면 릴투릴 테이프로 듣는 음악은 종이 신문이었다. 완벽한 아날로그, 제대로 내 취향을 저격했다.

자정쯤 일어나기로 했던 우리는 결국 자리를 뜨지 못했고, 두어 시간을 더 앉아서 말없이 음악을 들었다.

“라흐마니노프 틀어줘.”

스마트폰에 대고 말만 하면 음악이 자동으로 재생되는 시대다. 서투른 손놀림으로 릴을 꺼내서 걸고, 테이프를 당겨서 적당한 길이를 맞추면서 ‘내가 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이드는 이유다. 아직 기기 재생법이 익숙하지 않아서 음악을 들으려면 2~3분이 걸린다.

하지만 일단 준비를 마치고 손으로 둔탁한 스위치를 돌리면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다. 따뜻하다는 것은 진짜라는 것,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 시간의 물줄기가 느려진다. 저절로 눈이 감기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눈썹이 까딱까딱하고, 기기와 나 사이에 공연장이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이따금 실눈을 떠보면 음악은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보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원심력을 따라 움직이는 릴의 운동이 테이프의 직선운동이 된다. 그리고 다시 테이프가 반대편 릴에 감기면서 원운동으로 돌아올 때, 소리는 원도 아닌 직선도 아닌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그렇게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있으면 일상에 지친 마음이 어느새 편안해졌다.

술집에서 본 릴투릴 기기를 한 달간의 고민 끝에 사버렸다. 고민했다고 썼지만 사실은 처음 볼때부터 갖게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돈을 조금 썼지만 ‘올해는 여름휴가를 안 간 대신’이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결국, 소비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 것 같다. 가장 새로운 것을 가장 빨리 사서 소유하고, 새로운 것이 나올 때마다 바꾸는 것. 그리고 가장 낡은 것을 가장 마지막에 사 끝까지 가져가는 것. 나는 후자에 가까웠다.

기술의 진보로 음향 기기는 작고 빨라졌다. 가격은 싸졌다. 하지만 기술의 진보로 잃어버린 것도 있다. 좋아하는 음악을 테이프에 녹음하려고 라디오 앞에서 기다렸던 시간.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들었던 다른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 내 취향이 아니지만 들으면서 좋아졌던 디제이의 추천곡들. 단 한 번의 손가락 까딱거림으로 곡을 바꿀 수 있는 지금, 우리가 누릴 수 없는 것들이다. 릴투릴로 음악을 듣는 데 한 가지 문제도 있다.

테이프를 사서 모으려면 정말 많은 돈이 들어간다는 것. 아니, 파는 곳을 찾기가 어렵다. 공테이프를 사서 녹음하려 해도 공테이프 값이 만만치 않다. 혹시 싸게 파는 곳을 안다면 전자우편으로 알려주시기를.

글·사진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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