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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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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취재하다 수습일기 꺼내 본 이유

기삿거리 찾던 중

눈앞에서 교통사고 목도한 날
등록 2019-02-02 16:38 수정 2020-05-02 19:29
영화 <뱅뱅클럽>에서 독수리 앞에 있는 소녀를 촬영하는 케빈 카터.

영화 <뱅뱅클럽>에서 독수리 앞에 있는 소녀를 촬영하는 케빈 카터.

2013년 7월16일
택시에서 내렸을 때 길 건너편에서 20대로 보이는 남성이 도로를 가로질러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왕복 10차선이 넘는 도로라 멀쩡한 사람도 무단 횡단을 하기엔 먼 거리였다. 그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걷다가 도로 한가운데 섰다. 그러고는 다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비틀거리기를 반복했다. 지나는 차들이 상향등을 껌뻑이며 신경질적으로 경음기를 울렸지만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쪽으로 건너오도록 도와야 할까’ 잠시 생각했지만 좀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차들이 너무 빠른 속도로 오가고 있었다. 차마 뛰어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고가 날 것 같다’고 직감한 나는 도로로 달려가는 대신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적었다. ‘오전 1시16분 남대문 경찰서 앞.’
바로 그때,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이 울렸다. 급하게 제동하는 차량 타이어와 도로의 마찰음이었다. 고개를 들어서 보니 택시에 청년이 부딪혀 튕겨 나갔다. 깜짝 놀란 나는 소리치며 경찰서로 들어갔다. 경찰을 불러내고 도로 가운데로 달려가 피해자를 살폈다. 다행히 그는 몸을 움직였다. 술에 많이 취해 발음이 정확하진 않았지만 “구급차 좀 불러줘요”라고 했다. 신음 소리가 섞였다. 그는 병원으로 후송됐고, 택시 기사는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내가 그를 도왔더라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까.’ 죄책감이 들었다. 택시 기사에게 몇 가지를 물은 뒤, 청년이 있는 병원으로 갔다. 그는 응급실 앞 휠체어에 앉아 자고 있었다. 아직 술이 깨지 않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는 손등에 붙은 인식표에 있는 환자정보를 수첩에 옮겨 적었다. 의사는 “다행히도 차량과 정면충돌한 것은 아니어서 넘어지면서 가벼운 찰과상만 입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오전 2시. 마지막 보고에서 내 이야기를 들은 선배는 나를 다그쳤다.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네가 기자야?” 병원에서 잠을 자기 위해 기자실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기자는 누구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수단에서 ‘독수리와 어린 소녀’ 사진을 찍고 퓰리처상을 받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케빈 카터가 떠올랐다. 다시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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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오랜만이야. 잘 지내지? 미안한데 돈을 조금만 빌려줄 수 있을까? 먹을 것이 없어. 며칠째 라면밖에 못 먹었는데 지금은 라면 살 돈도 없어. 일은 하고 있는데 월급이 안 나왔어. 월급이 나오면 갚을게….”

기사를 마감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취재하다 만난 난민이었다. 휴대전화로 내 통장 잔액을 보니 이미 ‘텅장’(텅 빈 통장)이다.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나도 넉넉하지 않아서 많이 보내지는 못해 미안해. 당장 급한 끼니는 해결하고 건강하길 바랄게.” 앞서 몇 번 다른 난민들에게 돈을 빌려줬지만 돌려받은 적은 없었다. 돌려받을 생각이었으면 빌려주지도 않았을 거다.

문자로 받은 계좌번호로 돈을 보내고 나니 한숨이 나왔다. 사실 당장 돈을 주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앞으로도 희망을 품기 힘든 그의 절망적인 상황을 듣는 일, 그 자체가 힘겨웠다.

수습기자 시절에 썼던 ‘수습일기’를 오랜만에 꺼내 읽었다. 보고할 기삿거리를 찾던 중 눈앞에서 교통사고를 본 날의 이야기였다. 수첩에 시각과 장소를 적은 나는 사고가 날 것을 알았던 게 아닐까. 시간이 6년 가까이 흘렀는데 잘 모르겠다. 아직 나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했을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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