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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

중요한 것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태도
등록 2018-10-27 15:10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옥상에서 울었어.” 금융회사에 다니는 40대 직장인 친구가 카톡을 보냈다. 애 볼 사람 없어 하루 연차 내겠다고 했다가 부장한테 또 휴가냐 한 소리 들었단다. 전화로 뒷담화라도 시원하게 하자 했더니 안 된다고. 주 52시간 근무제 되고 30분 이상 컴퓨터가 정지 상태면 소명하라는 창이 떠서. “장점도 있어. 부장이 깰 때도 30분마다 자기 마우스 움직이느라 잠깐 멈추거든.”

부장이 꼬투리를 잡는 데는 이유가 있다. 친구가 능력 있다. 임원이 부장을 제치고 중요 업무를 맡긴다. 부장은 친구에게 조언이라고 이렇게 말했다. “너한테 일 시키는 거, 네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 경쟁자를 안 키운다. 애초에 기어오를 꿈도 못 꿀 사람 중에 고르는 거다.” 친구도 안다. 모든 공은 임원에게 돌아간다. 친구는 회사생활을 17년째 버티고 있다.

기관 상담 창구에서 일하는 다른 친구는 한동안 이명에 시달렸다. 블라인드가 올라가면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간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사람들이 창구로 몰려온다. 이 와중에 팀장은 매달 한 명 ‘액받이’를 찍었다. 이유는 자기 맘이다. 튀는 원피스를 입었다거나 아이라인을 짙게 칠했다거나. “누구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이렇게 시작이다. 숨 쉬는 것도 죄가 된다. 다음달 액받이를 선정할 때까지 이명을 음악 삼아 참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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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

왜 버텨야 하나? 직장 성토대회가 한창 무르익는 중에 물었다. “그야 먹고살려고 다니지.” 다들 별걸 다 묻는다는 듯 웃었다. 정말, 정말로 그게 다야? 머리에 500원짜리 동전만 한 땜통이 생겨도 17년을 참았던 까닭이? 꼬치꼬치 물으면 쑥스럽게 대답한다. “내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서 그런 거 같기도 해. 회사를 그만두면 나라는 개인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서. 내가 사라지면 아이에게 집착하게 될까봐. 내가 하는 일이 조금은 의미 있지 않을까?” ‘액받이’ 공포증에 시달리는 친구는 아버지 병원비를 댄다. “어떤 때는 바지 한쪽을 다 벗기도 전에 자. 정말 지금 최대한 한 방울까지 짜내 최선을 다해 살아. 그렇게 아버지를 돌보는 건 의미 있다고 생각해.” 다른 친구는 “최 과장 없으면 안 돼” 그 말 때문에 소처럼 일한다. ‘당신이 필요해’라는 말을, 우리는 얼마나 갈망하나.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아우슈비츠에서 어느 날, 빅터 프랭클은 그런 일몰을 느꼈다. 그는 119번이었지만, 인간으로 살아남았다. 누이를 뺀 가족은 모두 몰살당했다. 정신과 의사인 그가 쓴 책 를 보면, 그곳에서조차 인간은 선택할 수 있다.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어떤 이는 수감자 감시원으로 뽑혀 아무 이유 없이 몽둥이를 휘두른다. 어떤 이는 하루에 한 덩이 배급되는 빵을 나눈다. 어떤 이는 삶을 포기하고 자기 배설물 위에 누워 죽지만, 어떤 이는 유리 조각으로 면도한다. 어떤 이는 그 속에서도 유머를 사수한다. 수감자들은 건더기가 조금이라도 담기도록 국자를 냄비 바닥 깊숙이 긁어 수프를 퍼주길 소망한다. 물밖에 없는 수프를 게걸스레 들이켜며 한 수감자는 우스개를 했다. “이러다 밖에 나가 파티에 가서도 바닥부터 긁어달라고 하겠는걸.”

프랭클은 그곳에서 죽어가는 여자를 만났다. “나는 운명이 나에게 이렇게 엄청난 타격을 가한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어요.” 그 여자는 뼈밖에 안 남은 손가락으로 밤나무 가지 한 개와 꽃 두 송이를 가리켰다. “나무가 이렇게 대답해요. 내가 여기 있단다. 나는 생명이야.” 프랭클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아내와 상상의 대화를 이어가며, 아우슈비츠 입소 때 빼앗긴 원고를 머릿속으로 완성해가며 살아남았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생존한 그는 사람한테는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전제로 그 의미를 대면하도록 돕는 ‘로고테라피’를 정립한다. ‘의미’는 어떻게 찾나? 지금 여기에서, 창조로, 사랑으로,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한 태도를 결정함으로써 찾을 수 있다. 잡으려 할수록 도망치는 자아실현이 아니라 세상과 타인으로 열린 시선 속에서 붙잡을 수 있다고 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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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오다리에 허리가 뒤로 살짝 젖혀진 할머니가 신바람 나 다른 할머니에게 얘기 중이다. 아는 사이 같지는 않는데 같이 탄 김에 말도 튼 것 같다. 봇짐을 닮은 배낭을 멘 신바람 할머니가 자랑 중이다. “내가 나이가 70이 다 돼가는데 청소를 하거든요, 빌딩 청소. 근데 우리 회사가 청소 회사 중에 제일 커요. 휴가도 있다니까요. 평생 일을 쉰 적이 없어요. 텃밭도 있어요. 감자랑 심었는데 엄청나게 실해요. 자식들 다 나눠줬죠.” 별 관심 없어 보이는 다른 할머니는 “아이고, 대단하시다” 추임새를 연방 넣었다. 오다리 할머니는 한바탕 손을 흔든 다음 내렸다.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등 뒤에 봇짐이 달랑거렸다.

가을에 핀 손톱만 한 해바라기꽃

아버지 병수발 드는 친구는 추운데 산책 나가겠다는 아버지 뜯어말리느라 한바탕 설전을 벌인 뒤 출근했다. 임원 치다꺼리 중인 친구는 나중에 자기 이름이 지워질지 모를 보고서를 쓰느라 밤잠을 설쳤다. 보고서가 꽤 맘에 들었다. “최 과장 최고”에 중독된 친구는 ‘이게 착취 같기도 한데’라고 한번 갸우뚱했다가 또 불도저처럼 일했다. 그렇게 하루의 시련이 주는 질문에 답했다. 유일무이한 자기 방식으로.

올봄, 해바라기 씨앗 두 개를 궁금해서 샀다. 정말 해바라기가 될까? 휘청휘청 자랐다. 옆에 세운 나무젓가락을 치우면 금방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더니 가을, 손톱만 한 꽃이 기어코 핀다. 이렇게 작은 해바라기꽃은 처음 봤다.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빅터 프랭클)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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