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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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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을 품는 ‘연민의 방’

서로의 가장 아픈 곳을 알아보고 끌어안는 연민의 너른 품
등록 2018-09-01 12:02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떨치지 못한 미련처럼 어젯밤 나는 에어컨을 끄지 못했다. 새벽에 눈을 떠서 창밖 너머 바람 소리를 듣지 않았더라면? 다행히도 나의 잠은 얇고 가늘어서 쉽게 찢어졌고 무심히 찾아온 손님 같은 밤바람을 맞이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반복해서 꿈으로 꾸는, 숨겨진 방을 찾는 모험은 나이 들어서도 꿈에서는 물론 현실에서도 계속됐다. 나는 어느덧 서울의 구석진 곳에 방을 얻었다. 그곳에서 안전한 은닉의 기분을 느끼기 위해 방을 쓸고 닦고 단출하게나마 가구를 들여놨다. 밥솥을 사고 식기구를 구비해놓고 서랍 속에 일상을 버티는 옷들을 정리해놓았다.

내 방, 그리고 내 침대에서 보내는 첫날 밤, 나는 오래도록 그리워했던 방과의 해후를 준비하듯 조금은 설레고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방은 쉽게 품을 열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초조함을 애써 달랬다. 미국으로 먼저 귀국한 딸아이가 생각났다.

즐기고 감사하는 기다림

집 마당에 서식하는 길고양이의 마음을 얻기 위해 몇 시간이고 땡볕에 앉아 먹이를 놓고 곁에서 가만히 공존하기를 실천했다. 아이는 안달하지 않았고 무턱대고 바라지 않았다. 길고양이의 습성을 세심히 조사했고 그에 맞춰 다가가되 거리를 유지했고 기다림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상대에게 짊어놓고 그 결과만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었다. 가장 용기 있는 기다림, 무작정의 기다림, 같은 시간 속에 공존하는 것을 즐기고 감사하는 기다림이었다.

다섯 마리 고양이 중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와 그의 손가락을 가만히 핥고 갔다. 긴긴 기다림의 과정에서 벌어진 경이를 그는 경이로만 기뻐할 수 있었다. 좁고 작은 지점을 목적으로 정해두지 않으니 넓고 평화로운 한가운데 놀라운 기쁨이 숨은 꽃처럼 피어났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나는 긴 잠을 자고 일어났다. 열린 창밖으로 들려오는, 바람에 헝클어지는 나뭇잎 소리와 늦여름의 더위를 가르듯 비벼대는 매미 소리, 생명을 노래로 바꾸는 새의 지저귐에 눈을 떴다. 아침을 홀로 차려먹고 집을 조금 정리하고 배달된 테이블과 의자를 받아 산이 보이는 커다란 창을 보며 앉았다.

요새 나는 박자를 더 늦추려 애쓰는 중이다. 최근 상담을 받으면서 들은, ‘조금 더 천천히’를 주문처럼 외운다. 가만히 멈춰 서서 들여다보는 일도 이제는 조금씩 하고 있다.

눈물이 자꾸 고이는데 어느새 지난 삶을 지배했던 불안의 감각이 뭉친 털처럼 동글동글 형태가 또렷해진다. 나는 저걸 이제 손으로 만질 수 있을지도 몰라. 가만가만 어루만질 수 있을지도 몰라. 상담 선생님은 나를 다시 바라볼 것을 권유했다. 한없이 가혹하고 차가웠던 시선을 조금 놓고, 마치 다른 사람을 바라보듯 거리를 두고. 상담자의 시선에서 연민을 보았다면 나의 조급한 결론일까. 예기치 못한 거부반응과 분노에 가까운 감정이 치밀어올라 나를 급히 다잡아야 했다. 그날의 상담 시간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불쌍하지 않아요. 왜냐면 내가 불쌍하다고 인정하는 순간, 내가 받지 못한 사랑을 인정하는 셈이니까요. 내가 끔찍해서, 내가 못나서 그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인정하는 게 되니까요. 그러니까 내 불쌍함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을 이해하고 헤아려야 해요. 그들은 불행했을 따름이에요. 나는 그들보다 강하고 그들 말처럼 많은 것을 가졌어요. 그러니까 그들의 불행을 내 것처럼 돌보고 내가 그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음을 믿어야 해요. 나는 그렇게 내 의미를 증명할 수 있어요.”

무너지듯 엉엉 울며 말했다. 얼굴을 가리지 않고는 울지 못했던 내가 보였다. 일그러진 못생긴 내 얼굴 대신에 가린 손과, 가린 손 너머의 마음이 보였다.

나를 품어준 새로운 집 안 내가 머무는 방이 벌써 좋아졌다. 이 집에 머물면 바깥의 시간으로부터 해방돼 온전히 내 안의 시간을 마술처럼 늘렸다 펼쳤다 지낼 수 있다. 안전히 숨을 곳을 찾아다니던 지난 ‘나’들이 옷을 훌훌 벗고 널브러져 있기도 하고 깔깔 웃으며 말을 걸기도 하고 슬프다고 울어대기도 한다. 꿈마다 찾아헤매던 숨을 곳, 안전한 방은 여기 있었다. 내 마음, 내 안전한 마음에. 나는 더 이상 절벽을 타듯 아슬아슬 버티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될까. 연원을 알 수 없는,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동아줄에 매달리지 않고도.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옅지만 긴 잠을 잔다. 깨었다가 다시 잠드는 일을 반복한다.

나는 옅지만 긴 잠을 잔다

어젯밤 꿈에서 나는 또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방을 열고 어린 시절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늘한 방바닥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을 봤다. 잠깐의 평온이 지나가고 있음을 느끼고 희미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 옆방으로 넘어가서 나는 상을 차렸다. 밥상에는 밥과 국 한 그릇 놓인 것이 다였지만, 어느새 내 앞에는 한 아이가 앉아서 나를 골똘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맑고 고요하여 들여다보니, 그 눈빛은 연민이더라.

처음에는 나의 첫째 딸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쳐다보니 어린 나였다. 아이는 나를 불쌍히 여기는구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는 게 아니라, 네가 나를 불쌍히 여겨 품어주는구나. 내 어린 시절, 어른을 사랑하는 길은 오직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길밖에 없다고 여겼던 그 아이는, 어른인 나조차 가엾게 여기는구나. 당황해서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 크고 둥그런 산이 아침빛으로 푸르렀다.

얼마 전 가까운 친구 둘과 함께 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최근작 은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았으나 가족을 이루고 사는 이들을 영화 속에 담아낸다. 아버지로 불리길 원하는 오사무는 그를 아저씨라고 부르는 쇼타와 좀도둑질을 한다. 호명도, 도둑질도, 둘 사이에 강요되지 않는다. 아버지라 불리길 원하더라도 그건 자신의 바람일 뿐, 자신도 상대도 무겁게 짓누르지 않는다. 혈연이 없기에 무턱대고 바라지 않고 일상 속에 기대고 빛나는 순간을 무심코 함께한다.

예상치 못한 장면에서 시리도록 아름다운 순간을 목격하는 건 이 영화의 강력한 미덕이다. 무더운 여름날 장대비가 쏟아지고 국수를 먹던 연인은 따스하고 유쾌하게 서로를 품에 안는다. 여자는 남편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자는 여자를 도와, 남편을 함께 살해했던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는 건 영화의 말미가 되어서야 유추할 수 있을 뿐, 애써 드러내지 않는다.

마음속 호명의 말들

쇼타가 오사무와 헤어져 돌아서는 길에 이르러야 그를 아버지라 중얼거리는 모습도 오사무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중요한 말도, 사연도 그들의 입을 통해 발설되지 않는다. 불길한 아름다움, 깨지는 햇빛의 찬란함, 크고 하얀 눈사람의 이튿날 초라한 행색, 입 밖에 내지 못해 입술로만 그려진 감사의 말들, 마음속 호명의 말들, 선언되지 못한 선언의 말들, 갑작스러운 비와 혼곤하고 따뜻한 결합, 차가운 소면, 땀에 젖은 점, 행복을 안 뒤 부쩍 자라난 아이, 희망으로 한 뼘 솟아난 꼬마와 그 기다림이 어쩌면 이 영화의 전부다. 그럼에도 나는 느낄 수 있다. 희미하게 내려앉은 햇살처럼, 강렬하지 않아도 공간을 어느덧 채우고야 마는 빛의 마법처럼, 희망을 알고 행복을 체득한 사람은 결코 불행이 전부인 삶을 살게 되지 않음을.

지붕 위에 던진 이가 새 이로 돌아올 그날을 기다리듯,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나는 영화 속 인물들의 행복을 기다릴 수 있다. 기다림을 지탱하는 건 다음과 같은 장면 덕택이기도 하다. 연인인 노부요와는 언제 사랑을 나누냐는 아키의 질문에 오사무가 가슴을 탁탁 가볍게 치며, 우리는 여기로 연결된 관계라고 대답한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오사무와 노부요 사이의 담백한 깊이와 대체할 수 없는 공동체로서의 결속이 그 역사와 함께 드러난다.

‘운명 공동체’라는 말을 나는 그들을 통해 다시 새롭게 이해했다. 서로의 존재에 대한 강인한 결속으로 이뤄지는 운명 공동체에는 공범 의식 이상의 거의 절대적 연민이 자리한다. 노부요는 살인죄가 이미 있는 오사무를 대신해서 이후의 범법 행위에 대해 모든 죄를 자신에게 씌운다. 그리고 오사무는 노부요를, 노부요는 오사무를 기다린다. 감옥이든, 감옥 밖이든 중요하지 않다.

학대받던 꼬마 유리는, 새엄마의 따스한 품을 안 뒤 친엄마의 회유에 더는 넘어가지 않는다. 대신 맨 처음 오사무를 만났던 자리에 앉아 한 뼘 더 자란 키로 막연한 기다림을 이어간다. 우연히 만나 가족을 이루었다 흩어진 그들은 이별 뒤에도 기다림을 배웠다. 그냥 마음으로 아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남들이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제도와 관습이 부정한다고 해도 마음으로 아는 것들이 있다. 나를 아끼는 마음, 내가 아끼는 마음, 고르고 숨기고 외면하려 해도,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 서로의 존재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는 힘들. 영화가 끝난 뒤 두고두고 생각했다. 존재가 존재를 바라볼 때 가장 깊은 울림을 주는 건 연민이 아닐까.

비록 한 뼘의 휴식일지라도

깊은 연민을 이길 수 있는 건 없다. 우리가 일컫는 사랑의 모호하고 때로는 굴곡 많은 지형과 달리, 연민은 가장 정확한 자리를 집어 아픈 사람을 품어낸다. 아픔을 즉각적으로 아는 것만큼 인간의 결속을 단단히 하는 건 없다. 내가 네가 되는 일은 없지만, 내가 네 아픔을 아는 일은 있다. 그 있음을 다시 내 아픔으로 끌어안아 함께 쉴 곳을 만드는 게 연민이다. 비록 한 뼘의 휴식일지라도. 이제 나는 내게 묻는다. 쉴 곳 없는 새와 같은 마음을 가진 나에게. 내가 나를, 어른인 내가 어린 나를, 어린 내가 어른인 나를 연민하는 건 과연 부끄러운 일일까? 무수히 나뉘어, 한때는 고통을, 기쁨을, 슬픔을, 환희를 알았던 숱한 ‘나’들을 결속하는 고리들 중 연민이 있을 뿐이라고 다독일 수는 없을까? 답은 알 수 없지만 나 역시 기다림을 배웠다. 안전함을 어렴풋이 알았다. 나는 여전히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방을 찾아다닐 것이지만, 이제는 안다. 탐색의 기다림을, 안전의 감각을.

이서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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