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가 끊겼다.
0,1,0,1… 신호로 기록된 모든 저장장치가 먹통이 됐다. 사람들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디지털 기록은 시간을 켜켜이 새겨두는 인류의 나이테 같은 것이었다. 디지털 치매를 앓던 이들은 그 어떤 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모든 삶이 송두리째 뿌리 뽑힌 느낌이었다.
품에 안은 아기가 낯설었다. 아기가 지난주에 어떤 모습이었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해야 한다고 마음먹은 것은 잊어버렸고, 잊고 싶었던 모든 일은 또렷하게 뇌리를 스쳤다.
사람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일 이상으로, 무엇을 잊어도 되는지 결정하는 것도 힘들었다.
또 깨달았다.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물질적 토대가 얼마나 불완전했는지. 단 한 번의 정전으로 모든 게 끝나버릴 수 있다는 것.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래서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 믿었던 일은 그렇게 일어났다.
전자장치에 한번 기록된 데이터는 어떤 식으로든 모두 복구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누구도 방법을 몰랐다.
사람들이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록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일기를 20년 썼다. 언론은 사회의 일기를 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20년을 해봤기 때문에 앞으로 20년도 할 수 있다.”
2011년 언론사에 들어가기 위해 문을 두드리며 내밀었던 용감한 자기소개서(자소서)였다. 자소서만 보면 언제라도 씩씩하게 글을 써 내려갈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기자생활이 6년차에 접어들었지만 쓰는 것은 여전히 두렵다. 쉬었다, 시작했다를 셀 수 없이 반복하는 일기 쓰기는 25년이 넘었으나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직도 흰 종이 앞에 앉으면 무엇을 쓸 것인가에 앞서, 왜 쓰는지를 생각한다. 기억하기 위해서 쓴다고 생각하지만 잊어버리기 위해서 쓰는 것이기도 하다.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록하고 잊어버린다. 어디에 기록했는지만 기억한다. 기록과 기억과 망각의 경계는 이렇듯 명료하지 않다.
2016년 7월18일은 새 일기장을 사서 집에 온 날이었다. 당시는 다른 언론사 ‘디지털뉴스부’에서 일하던 때였다. 사회부에서 지면 기사를 쓸 때보다 자극적인 글을 자주 썼다. 기자와 독자는 전보다 가까워졌고, 전달 시간도 짧았다.
기술 발달의 목표는 출발점에서 도착점까지 이동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었다. 빠른 것은 우리에게 물질적 풍요와 시간적 여유로움, 그리고 정보의 평등한 공유를 가져다줄 듯 보였다. 하지만 속도가 빨라질수록 우리는 더 쫓겼다. 투명해질 줄 알았던 세상의 이면은 숨어들었고, 빈부의 격차만 도드라져 보였다.
“공간의 가치를 말살한 뒤 시간은 자살을 해버렸을까.”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글을 일기장 한켠에 썼다. 무게 없는 시간에 부피와 질량을 주는 것이 노동이라면, 공간의 가치 하락은 노동가치 하락이기도 했다. 공간에 시간을 새겨넣는 집필 노동의 중요성도 낮아졌다.
기자와 독자는 가까워졌는데 기자가 기사에서 멀어졌다. 공허했던 나는 전에 없이 일기장을 자주 찾았다. 디지털 신호로 번역된 인터넷 기사는 그저 읽고 쓰는 것이었지만 일기 쓰기는 달랐다. 어둠도 잠든 밤 일기를 쓰는 동안 나는 시간을 붙잡고, 듣고, 냄새 맡았다.
‘시간을 존중하는 공간과 공간의 가치를 말살하지 않는 시간’을 생각하는 일은 어렵다. 하지만 하루라는 시간에 손바닥만 한 종이를 내어주는 일기 쓰기는 계속하려 한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디지털 미디어에 익숙한 신세대인 척하지만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시간은 가볍다’고 생각하는 아날로그 기자입니다. 사회문제를 다루는 기자이기 이전에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일상과 생각을 끄적인 일기를 이따금 펴 보여드리고 좀더 친근하게 다가가려 합니다.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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