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에 걸쳐 가까운 사람들과 이별을 했다. 겉으로는 5년 전 결정한 별거와 이혼이 가장 큰 사건처럼 보이지만, 더 긴 후유증으로 나를 힘들게 한 건 7년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미국 생활에서 가장 친했던 친구 둘과 한 이별이었다.
두 사람과 모두, 관계 내부의 문제라기보다는 관계 밖의 문제가 더 결정적 원인이 됐다. 우리 사이가 그 외의 문제를 감당할 만큼 단단하지 못해서였다고 말한다면 그 역시 관계의 문제로 포괄되겠지만, 어쨌든 직접적 이유는 둘 사이가 아닌 기타 지역에서 왔다. 하긴, 언제나 “기타 등등”이 문제다. 잠복해 있다가 불쑥 나타나서 짐작지도 못한 순간에 괴력을 발휘하는 세상의 기타 등등이여.
<font size="4"><font color="#008ABD">괴력의 ‘기타 등등’이여</font></font>전남편과의 이별은 스스로 설득하듯 천천히 찾아왔다. 긴 세월에 걸친 납득 과정이 차분히 이뤄져서 생각보다 감당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이별했다고 해서 행복한 지난날을 부정하지 않을 만큼 사랑의 생로병사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늙어서까지 함께 다닐 여행지의 목록을 나누며, 전남편보다 더 구체적인 노후 생활을 함께 꿈꾸던 두 동성 친구가 멀어졌다. 그것도 나로서는 온전히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정확히 말하자면, 이해는 할 수 있지만 납득하고 싶지 않은 이유로.
하루아침에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이처럼 나는 당황했고 고통스러웠고 서러웠고 때로는 분노로 휘청거리기도 했다. 그들에 관한 꿈을 수차례 꿨고 잠에서 깰 때마다 지난 관계를 잊지 못하는 내 미련함을 자책하기도 했다. 꿈에서 나는 매번, 돌아온 그들을 눈물로 환대하고, 어떠한 비난도 책망도 없이 다시 곁에 있어준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 행복에 들떠버렸다. 기쁨이 클수록 눈을 떴을 때 고통은 컸다. 날이 선 칼날로 심장을 여기저기 베이고 만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우정도 사랑이다. 우정도 사랑처럼 생로병사가 있고, 탄생과 성장과 절정을 거쳐 때로는 죽음을 맞이한다. 살릴 수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죽음이 방어할 수 있는 병이나 징후로부터 오기만 하는가. 심장 발작이나 교통사고처럼 급작스러운 사고도 있다. 어처구니없이 손 놓은 채로 바라봐야만 하는 무기력은, 삶에도 사랑에도 우정에도 찾아온다.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더라면, 그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후회하고 자책해봐도 소용없는 순간이 있다. 왜 나에게 그런 일이 찾아왔는지 원망할 대상은 어디에도 없다. 삶을 완벽히 통제하고 장악할 자는 아무도 없고, 사랑이나 우정도 나 혼자 꾸려가는 작업이 아니다. 타인과 나의 숱한 조건과 여러 상황이 맞물려 벌어진다. 최선을 다할 수는 있어도 최선을 보장할 수는 없다.
며칠 전에는 가까운 친구로부터 가슴 아픈 호소를 들었다. 그가 힘든 시기를 수년에 걸쳐 지날 동안 투사처럼 곁을 지켜준 친구가 언제부터인가 자기에게 적대감을 표시한다는 것이었다. 고통의 순간에는 최고의 친구였지만, 고통이 잦아들고 그에게 일시적 평안이 찾아오자 친구는 역할을 잃은 듯 혼란을 겪는 모양이었다. 주어진 행복에 감사하고 그것을 최선의 노력으로 누리려는 그를 친구는 어색해하고 때로는 불편해했다. 그의 행복을 가장 어색해하는 이는 다름 아닌 고난 속 투철한 동지였던 바로 그 친구인 듯 보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우정의 생로병사 </font></font>고통을 기꺼이 나눠주는 친구도 소중하지만, 행복을 온전히 기뻐해주는 친구는 얼마나 드문가. 나와 멀어진 두 친구 중 한 명은 내가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에 떠나갔고, 다른 한 친구는 더디고 지난했던 시기를 나보다 더 굳세게 꾸준히 버텨주다가 내게 안정이 찾아오자 떠났다. 첫 번째 친구는 반짝반짝 빛나던 시간 속 가장 찬란한 친구였고, 두 번째 친구는 암울한 시간을 지나는 동안 등불이 되어준 친구였다.
누군가는 그들의 떠남을 두고 평가했다. 고난을 버텨주지 못하는 우정은 진정한 것이 아니라고. 혹은 고통은 나눠도 행복을 함께 누리지 못하면 진실한 우정이 아니라고. 친구들의 떠남보다 더 큰 상처가 된 것은 그와 같은 평가의 말들이었다. 내 사랑과 우정의 진실은 내가 더 잘 알고 있음에도, 누군가는 위로의 말로 그 사랑과 우정의 시간을 폄하했다. 위로를 의도했겠으나 내게 그 말은 상처로 도달했다. 나는 경험을 부정함으로써 그와 다른 긍정을 맞이하려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긍정을 통해 더 큰 긍정을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혹은 판단 중지의 순간에는 불필요한 생각을 문밖으로 밀어내며 시간을 버티고 스스로 명백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게 진실한 우정이 아니었을까. 행복으로 잠시 멀어진 내 친구의 우정은 고난을 버텼지만 기쁨을 통과하지 못했으므로 진정성의 시험에서 탈락한 것일까? 사랑이든 우정이든 그것의 진정성을 따지는 것은 어쩌면 부질없지 않은가. 그들은 나를 버티게 했고 지탱해줬고 기쁨을 줬다. 필요한 시기에 곁에 있었고 그것만으로 충분한 역할을 했기에 나는 감사하고 싶다. 사랑에게 영원을 요구하지 않듯, 생명에게 영원을 기대하지 않듯, 우정에도 오고 감을 떠나감을 흔들림을 허락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명명하는 배신은 우리가 바라보는 배신일 뿐 상대의 관점에서는 자연스러운 흐름일 수 있다. 때가 되어 움직였고 시간이 다하여 떠났을 수 있다. 내가 믿었다고 하여 내 믿음을 무한히 책임질, 어떤 상황이든 충실할 우정과 사랑을 기대한다는 것은 나의 일방적 욕망이자 때로는 폭력에 가까운 강요일 수 있다.
나는 타인의 사랑과 우정을 향해 함부로 판단 내릴 자격이 없다. 진심과 선의, 나눔의 기쁨을 부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의 진정성을 영속성에 기대어 판단해선 안 된다고 스스로 타이르는 것이다. 그 순간의 진심과, 그 순간을 넘어서서 이어가려 했던 마음과, 한동안 머물렀던 온기를 누리고 감사하고 또 만족하는 편이 내게 주어진 사랑과 우정을 그 자체의 속성에 따라 받아들이는 길이라고 믿을 따름이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고맙게 다가와준 사랑과 우정을 대하는 내 몫의 진정성이 아니겠는가. 그들의 진정함은 그들의 속성에 맞게 이해해줘야 한다. 자의적으로 부여한 의미에 타인의 마음이 알아서 맞춰주고 세월이 흘러가도 변치 않을 때만 진정성이 있다고 규정한다면, 우리 삶에서 남아 있을 사랑과 우정의 수는 얼마나 빈곤해질까.
<font size="4"><font color="#008ABD">내 몫의 진정성</font></font>높은 담벼락을 세워서 스스로를 자기 정원에 가두고 세상의 봄으로부터 멀어져버린 동화 속 거인처럼 말이다. 담벼락이 허물어진 뒤 느닷없이 찾아온 봄과 햇살과 기쁨의 아이들로 넘실대던 정원을 나는 관계에서도 꿈꾼다. 높은 장벽을 넘어서야만 진정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문을 열거나, 담을 허물 때 뜻하지 않은 사랑이 찾아온다.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올 것이며 연둣빛 싹이 여름의 녹음으로 찬란해졌다 가을의 깊고 그윽한 색채로 거듭날 것이다. 빛을 거둔 잎들은 하강의 날갯짓으로 또 다른 상승을 꿈으로 품을 테고 서늘한 눈송이의 흐드러진 춤사위는 정원을 하늘과 땅 구분 없이 또 다른 빛으로 지워낼 것이다.
아이들이 뛰어논 자리마다 생명이 기억될 것이고 살아 있음은 변화하는 것임을, 뜻하지 않은 놀라움을 경이로 품고 뻗어나가는 것임을 깨달으리라. 설렘은 가두거나 한자리에 머물러서 지속되지 않음을, 쏟아지는 물방울과 빛의 만남과 바람의 뒤흔듦이 만나 탄생하는 것임을 나는 증언하며 살고 싶다. 함께 뛰어놀되 목격하는 증인이 되어, 탐구자가 되어 관계의 역사를 살아내고 싶다.
어제는 중간 정리 보고처럼 우정에 관한 나의 변화된 자세를 가까운 언니에게 털어놨다. 그에게 들은 말은 나에게 더 큰 위안을 줬다.
“서희야, 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멈춤의 순간이 올 때면 생각해. 잠시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거나 눌러졌을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내가 할 몫은 결코 극단적인 말을 남기지 않는 것이라고 추슬러. 관계의 과거와 미래, 성질까지 모조리 결정할 말을 해버리지 않는 거야. 슬픔에, 홧김에, 복수심에 치미는 극단의 결정적인 말들을 일시정지 버튼과 함께 미뤄놓는 거야. 그 관계를 멈춘 상태 그대로 남겨둬. 만일 훗날 어떤 기회가 찾아와서 인연이 이어질 수 있다면, 바로 그 멈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도록. 헤어짐이 됐든 다시 이어짐이 됐든 지금 당장 예측하지 않고 말이야.”
그는 내게 “판단 중지”의 힘을 역설하는 듯했다. 관계의 본질을 나의 주관과 해석으로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괄호 안에 넣어두는 것에 대해 깨우침을 주었다. 우리는 상처에 더 큰 상처를 더하기 싫어서, 혹은 상처받기 두려워서, 미리 단언하고 섣불리 공표한다.
음악이 끝나가는 의자 뺏기 놀이 속 참가자처럼, 피해자의 자리에 혹은 가해자의 자리에 재빨리 앉아버린다. 상대를 앉혀버린다. 어쩌면 음악은 끝나지 않았는데도, 어쩌면 음악은 잠시 돌아가기를 멈췄음에도 말이다. 담벼락을 세워서 기쁨을 쫓아버린 사나이처럼, 변화하는 계절의 경이로움과 생로병사의 축복, 기다리되 판단할 수 없고 장악할 수 없는 관계의 풍성함을 우리는 진정성의 잣대를 앙상한 높이로만 쌓아올려 무수한 낮은 기쁨을 외면하고야 만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관계를 멈춘 상태 그대로</font></font>마음이 힘들 때면, 사랑하는 누군가를 향한 기대에 대롱대롱 매달려 갈 길을 잃은 듯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나는 그 마음속에 버튼 하나를 그린다. 그리고 마음의 손가락으로 그 버튼을 누른다. 호흡을 가다듬고 온 마음을 다해서, 걱정과 불안과 분노로 출렁이던 감당 안 돼 버거웠던 그 힘들을 모아서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다.
때가 되면 알 것이다. 모르는 걸 성급히 안다고 말하거나 내 앎의 틀 안에 구겨넣는 일은 고통스럽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받아들이는 것만큼 안전한 것은 없다. 일시정지의 모름은 아늑한 서랍 같은 위안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우리의 지금을 차곡차곡 정성껏 접어 소중히 넣어둘 뿐이다. 판단정지의 서랍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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