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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생에도 배우를 하고 싶다”

‘88만원 세대’를 그린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로 주목받은 배우 정소민 인터뷰
등록 2017-12-19 15:12 수정 2020-05-03 04:28

연한 보라색 원피스에 까만 구두를 신은 그가 걸어왔다. 특유의 반달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넨다. 12월12일 오후 4시30분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정소민은 인터뷰를 막 끝내고 다시 인터뷰 자리에 앉았다. 그는 이날 오전부터 하루 종일 tvN 드라마 종영 기념 인터뷰를 했다. 은 이날 정소민과 얼굴을 마주한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매체였다.

“지호에게 상처에 대처하는 법 배웠다”

11월28일 막을 내린 는 1988년에 태어난 ‘88둥이’들의 고군분투를 그린 드라마다. 드라마에서 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기보다 눈앞에 닥친 먹고사는 일을 해결해야 하는 ‘88만원 세대’로 그려진다. 정소민이 맡은 드라마 보조작가 윤지호도 집 있는 달팽이가 제일 부러워 낯선 남자와 선뜻 결혼을 결심하는 ‘홈리스’였다.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이 드라마는 16화 동안 평균 4.9%, 최고 5.6%의 시청률을 기록해 케이블, 종합편성채널 가운데 동시간대 1위를 기록했다.

드라마에서 정소민은 우리 시대 청춘들이 감내해야 하는 팍팍한 삶을 안정적 연기로 표현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1989년생인 정소민은 드라마 속 윤지호보다 한 살 적은 또래였다. 정소민은 “나 역시 IMF를 지나온 세대이고 88년생과 같은 시기를 겪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 이야기가 먼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이자, 내 친구들 이야기였다”고 했다.

무엇보다 정소민은 지호 캐릭터와 “신기할 정도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가족 구성원이 4명이고, 남동생이 있고 부모님 모두 경상도 분이에요. 그래서 경상도 집안 특유의 분위기를 잘 알아요.” 자신의 꿈에 ‘올인’하는 직진형이라는 점도 닮은꼴이다. 드라마에서 윤지호는 교대에 진학해 초등학교 교사라는 안정적 직업을 택하라는 부모님의 바람을 뒤로하고 ‘작가’를 꿈꾼다. 그처럼 정소민도 평범하게 공부하길 바라는 아버지의 뜻과 달리 연기자가 되고 싶었다. “저 역시 ‘꿈을 찾겠다’며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몰래 대학(한국예술종합학교 연기과) 시험을 봤어요.”

그러나 다른 점도 있다. “저는 사실 상처를 받거나 부당한 일을 당해도 속으로 삭이거나, 묻거나, 참는 성격이에요. 그런데 지호는 큰 상처를 받을 때 ‘난 아파요’라며 투명하게 꺼내놓아요. 그 말을 듣는 이들에게 미움 받을 용기를 내는 거죠. 그게 굉장히 멋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정소민은 “지호를 통해 상처를 받았을 때 대처하는 방법을 배웠어요. ‘득템’한 기분이에요”라며 웃었다.

을 통해 그와 함께 작업한 박준화 PD는 “지호라는 인물은 밝은 코드도 있고 독특한 면도 있고 슬픈 감성도 있다. 그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게 쉽지 않은데 배우 정소민은 그걸 연기가 아닌 듯 자연스럽게 표현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정소민씨는 밝은 에너지가 많아 촬영 현장에서 주변 사람들을 밝게 하고 편안하게 한다”고 덧붙였다.

사람의 성장과 연기자의 성장
12월12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정소민은 “내년이면 서른”이라며 “조금이라도 성장하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2월12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정소민은 “내년이면 서른”이라며 “조금이라도 성장하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꿈을 먹고 살겠다고 결정했을 때, 이제부터 내 인생은 깜깜한 터널을 혼자 걷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깜깜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외로울 줄은 몰랐다” ( 2화 윤지호의 내레이션 중에서)

엔 지호의 내레이션이 자주 등장한다. 정소민은 이에 대해 “지호라는 인물은 밖으로 내뱉는 말보다 속에서 하는 말이 많은, 생각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지호와 내레이션이 잘 맞았어요. 내레이션이 지호의 일기라 생각하며 연기했어요”라고 설명했다. 그중에서도 정소민에게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윤지호가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드라마 조감독에게 성추행 위협을 당한 뒤 긴 터널을 지나며 쏟아내는 독백이었다. “이때 녹음실에 혼자 들어가 내레이션을 녹음했어요. 그런데 막상 녹음을 하니, 연기할 때 들었던 감정만큼은 말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터널 장면의 앞 장면부터 보여달라고 했어요. 다시 드라마 장면을 보니 그때의 감정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런데 내레이션할 때는 그 감정을 많이 누르면서 (담담하게) 하려고 노력했죠.”

기자가 말을 걸면, 정소민은 생각이 많은 지호처럼 질문을 곱씹는 듯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차분하고 조곤조곤한 말투로 대답을 이어갔다. 그에게 ‘작품 속 캐릭터와 가까워지려고 어떤 노력을 하느냐’고 물으니, 이번에도 잠시 침묵 뒤에 조곤조곤한 말투의 대답이 이어졌다. “대본에 없는 캐릭터의 삶의 사이사이 공백을 메우려고 그 인물에 대한 일기를 써요. 그 캐릭터와 지금 내가 닮은 점과 다른 점을 쓰기도 하죠. 그러면 드라마 캐릭터를 이해하게 되고, 한편으론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라는 점을 깨닫게 돼요. 이렇게 연기를 하다보면,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정소민의 취미는 독서와 영화 보기다. 이를 통해 얻는 간접경험도 연기 인생에 좋은 밑거름이 된다. “사람의 성장과 연기자의 성장이 맞물린다는 생각을 해요. 책이나 영화를 보고 연기를 생각한다기보다 이를 통해 나의 가치관과 삶을 생각하는 거죠. 그 과정이 결국 연기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휴식기를 맞은 정소민의 관심사는 책이다. 이 드라마에 정현종의 시 ‘섬’이나 소설 등 문학작품이 많이 나와 그의 ‘독서욕’을 더욱 자극했다. “알게 모르게 (올해) 두 작품을 연달아 하면서 내 안에서 빠져나가는 게 많았어요. 그래서 작품이 끝나자마자 책을 읽었어요. 그랬더니 무언가 다시 채워지고 생각이 정리되더라고요. (독서는) 너무 좋은 힐링 방법인 것 같아요. 장강명 작가의 를 다 읽었고 지금은 하현 작가의 을 보고 있어요.”

“하드액션 하고 싶다”

2010년 드라마 로 데뷔한 정소민은 어느덧 8년차 연기자가 됐다. 그동안 시트콤 , 드라마 , 영화 등에서 언제나 주연을 맡았지만 큰 주목을 받진 못했다. 초반에는 어색한 표정 연기와 대사 처리 때문에 연기력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긴 터널에서 빠져나오듯 2017년에는 에 이어 등 코미디와 멜로를 오가는 연기를 보여주며 재평가받고 있다.

김선영 TV평론가는 정소민에 대해 “시트콤 등 다양한 도전을 했지만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는 어중간한 주연급이던 배우 정소민을 재발견하게 해준 작품”이라며 “과도한 변신 없이 또래 여성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절제된 감정 연기를 잘한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배우 정소민에게도, 인간 정소민에게도 2017년은 특별한 해다. “지난해부터 일하면서 받는 스트레스가 줄었어요.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엔 다져놓은 근육이 없어 노력을 해도 바로 결과물이 안 보여 불안했죠. 그러다보니 고민도 많이 했고요.” 그 때문인지 정소민은 “연기하기 어려운 캐릭터와 장르를 골라” 연기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그는 당시 자신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하면 ‘연기가 늘 거야’ 하고 오기를 부렸던 것 같아요” 하며 웃었다. 하지만 이제는 “무슨 일을 하든지 처음엔 잘할 수 없지만 여러 노력을 통해 내 근육이 자라나고 ‘노력을 멈추면 안 된다’고 느껴요”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배우고 싶은 생각”은 여전하다. “어떤 프레임에 갇히고 싶지 않아요. 드라마 장르가 대사 위주로 흘러가다보니 몸은 굳고 말만 하는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워요. 그러니 다음엔 그런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쓰는 작품을 하고 싶네요. 무용수 역할도 해보고 싶고 하드액션도 해보고 싶어요.”(웃음)

그에게 연기의 지표가 되는 배우는 미국 배우 미셸 윌리엄스다. 그가 나오는 영화는 모두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를 제일 좋아한다. “어떤 작품을 만나도 그 작품에 물들어 있는 모습”이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정소민은 그에 대해 “어떤 작품 속에서도 이질감이 없는 배우”라고 평했다.

정소민에게 이번 생은 처음이지만, 다음 생에 태어나도 “배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연기를 할수록 배울 게 더 생긴다. 그게 재미있고 매력적이다.” 그는 당분간 “충전을 한 뒤 내년에 차기작을 갖고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2018년 정소민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길고 위태로운 터널을 지나 마침내 날아오르기 시작한 이 배우를 계속 주목하고 싶어진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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