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핵의 자식들이다.”
영화 (2011)에서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려는 악당 세바스찬 쇼우(케빈 베이컨)는 방사능 때문에 남다른 능력을 지닌 돌연변이들이 출현했다며 이같이 말한다. 엑스맨의 기원이 핵이었다고 밝히는 이 대사는 앞선 세기를 추억의 근거지로 삼는 이들에겐 또 하나의 은유처럼 들린다. 현대로 명명된 지난 세기에 인류는 핵의 탄생과 폭발, 그 변형을 매혹과 두려움의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 20세기는 핵의 시대였다. 우리는 가공할 핵공포의 언저리에서 태어났지만 핵이 깨끗하고 안전한 미래의 에너지라는 신화 속에 자랐다.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린 핵의 자식들이었다. 그러나 모든 자식이 그러하듯 부모와의 결별은 피할 수 없다.
우라늄으로 목욕하고 채소 키워그 시절,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물론 영화, 미디어, 교과서까지 핵은 통제 가능한 과학문명의 아이콘으로 그려졌다. 1980년대 초 국내에서 방영돼 큰 인기를 얻은 데즈카 오사무의 애니메이션 (이하 )이 대표적이다. 원자(Atom)라는 이름대로 로봇 아톰은 핵에너지를 동력으로 움직인다. 특히 이 작품에서 아톰의 형과 여동생 이름이 각각 코발트와 우라늄이었다는 사실은 이 만화가 핵발전과 얼마나 가까웠는지 가늠하게 한다. 이 애니메이션은 2009년 미국에서 (Astro Boy)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푸른 하늘 저 멀리 라라라 힘차게 나는 우주소년 아톰 용감히 싸워라. 언제나 즐거웁게 라라라 힘차게 나는 우주소년 아톰.” 지금도 기억나는 씩씩한 오프닝곡 이 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내 만화잡지에 처음 연재된 것은 1951년이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 불과 10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원자력을 무기에서 분리해 새로운 ‘꿈의 에너지’로 여기는 인식이 일본 사회에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셈이다. 만일 1950~60년대 일본 사회에 핵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면 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만들어졌더라도 인기를 끌 수 있었을까.
실제 1950~60년대 일본은 우라늄, 방사능 등 ‘원자력 열풍(fever)’에 휩싸였다. ‘우라늄 할배’로 불린 아즈마 젠사쿠는 일본 내에서 우라늄 광산 발굴에 앞장선 ‘원자력 전도사’였다. 우라늄에 맹목적 신앙을 가졌던 그는 우라늄 광석을 섞은 물로 목욕을 즐기고, 우라늄 광석 가루를 섞은 비료로 채소를 키워 먹는 등 엽기적 행각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건강에 좋다는 이유로 우라늄을 가까이했지만 결국 그는 암으로 죽었다. 그의 아내와 어린 딸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일본이 원자력 열풍이라는 미몽에서 깨어난 건 가동 중인 핵발전소에서 사고가 발생한 1970년대부터다. 유럽의 반핵 운동도 영향을 끼치면서 핵발전과 핵폭탄이 결국 한 줄기고 두 개가 분리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핵에너지의 ‘달콤함’에 빠져 있던 일본 사회는 핵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아톰이 주는 안온함을 포기할 수 없었다.
1977년 TV도쿄에서 처음 방영되고 10년 뒤 국내에 소개된 애니메이션 (국내에선 로 방영)는 이러한 양가감정이 녹아든 작품으로 볼 수 있다. 핵발전소에 대한 적 콩키스터 군단의 무자비한 폭격으로 초토화된 미래의 지구. 핵을 동력으로 하는 대형 로봇 메칸더가 적을 무찌른다는 내용이다. 메칸더의 몸속에는 소형 원자로가 내장돼 있었다. 만화에서 메칸더는 적의 공격으로 한 차례 파괴되는 고초도 겪는데, 만화는 그로 인한 원자로 파괴와 방사능 유출엔 관심을 돌리지 않는다. 눈길을 끄는 것은 핵으로 멸망 위기에 놓였지만 다시 핵으로 평화를 지킨다는 설정이다. 원자폭탄으로 패망했지만 되레 원전 대국이 된 일본의 현대사가 고스란히 겹치는 대목이다.
조·중·동이 탈핵을 반대하는 이유
특히 는 일본보다 국내에서 더 큰 인기를 얻었는데 김국환이 부른 주제가는 당시 초등학생들의 ‘십팔번’이기도 했다. 인터넷에는 “지금도 원자력 하면 당시 노랫말 가운데 ‘원자력에너지의 힘이 솟는다’ 부분이 떠오른다”는 글도 여러 건이다. 실제 이 주제가는 서울대 원자력공학과의 과가로 불리기도 했다.
핵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낳는 것은 비단 애니메이션만이 아니다.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도 원전 홍보 마당이 된 지 오래다. 산업통상자원부 산하엔 핵발전 홍보 공공기관인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이 있다. 재단은 해마다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를 ‘친원전’ 내용으로 수정해달라고 요구한다. 재단은 매년 초·중·고 교과서를 모니터링해 핵발전 관련 내용을 교과서 출판사에 수정 요구하기 위해 연구 용역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 해 200~300건을 고쳐달라고 요구한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원전 수출을 교과서에 넣어줄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요구 가운데 19%(2008~2012년 분석 결과)는 실제 교과서에 반영됐다.
사실 원자력과 문화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기는 쉽지 않다. 원자력 대신 ‘핵’을 넣으면 말이 안 된다는 게 더 분명해지는 것을 보면 ‘전쟁기념관’ 수준의 조어라는 비판이 타당해 보인다. 원자력문화재단이라는 이름은 ‘원전 대국’ 일본에서 따왔음이 분명하다. 일본에는 ‘원자력문화진흥재단’이 있다. 원자력문화가 있다면 화력문화나 수력문화도 있어야 하지만 그런 문화는 없다.
탈핵 활동가 강은주씨는 자신의 책 (아카이브 펴냄)에서 “우리는 ‘온실가스 없는 청정에너지 원자력’이라는 단어에 매우 익숙하다. 고등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조차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중요한 대책으로는 이산화탄소가 배출되지 않는 방식의 발전소를 세우는 것이 있다. 현재 원자력발전소가 이에 속하며’ 등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이는 연간 100억원의 홍보비를 사용하는 재단의 힘”이라고 지적한다. 재단은 이 예산을 해마다 전력산업기반기금에서 타서 쓴다. 이 기금은 우리가 내는 전기요금에서 3.7%를 떼어 종잣돈으로 삼는다. 우리가 내는 전기요금으로 핵발전소 홍보를 한다는 얘기다.
2005년부터 2008년까지 텔레비전·신문·라디오 광고비로 76억여원을 쓴 재단은 한국수력원자력의 홍보와 겹친다는 점이 지적돼 2009년 1월부터는 간접광고(PPL)와 국내외 원전 시찰 등을 통한 원자력 홍보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한 해 텔레비전·신문·인터넷 언론에 광고비로만 40억원가량 쏟아붓고 있다. 등 보수언론이 문재인 정부의 탈핵 정책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핵마피아의 핵, 서울대 원자력공학과핵발전 신화의 진앙지를 거슬러 올라가면 ‘핵’이라는 이해관계로 얽히고설킨 ‘핵마피아’로 귀결된다. 핵발전 관련 민·관·학의 주요 자리를 핵마피아로 불리는 핵공학계 인사들이 돌아가며 맡고 있다. 특히 그 핵에는 서울대 원자력공학과 출신 교수들이 있다. 우리나라 핵산업 분야 인력은 2만1천여 명 수준이다. 이 가운데 연구 분야 인력은 전체의 7% 수준인 1500여 명인데, 해마다 배출되는 박사의 80%는 서울대에서 나온다. 원자력학회장 역시 대부분 서울대 원자력공학과 출신이 접수한다. 2000년 이후로만 끊어봐도 학회장 10명 가운데 8명(강창순·신재인·이은철·김시환·조남진·박군철·장순흥·정연호)이 서울대를 나왔다.
탈핵을 주장하는 환경단체와 정치인들은 원자력안전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지낸 강창순 서울대 명예교수를 ‘핵마피아 대부’라고 부른다. 1980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가 된 강 위원장은 그 뒤 한국원자력학회장,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이사 등을 맡는다. 이 이력에 더해 핵발전 업계와의 연결고리도 질기다. 국내 핵발전소 설비를 사실상 독점하는 두산중공업 사외이사, 핵발전소 건설·운영을 독점하는 한국수력원자력 자문위원을 맡았다. 위원장 내정 직전까지는 현대건설·두산중공업 등 핵 관련 업체 80여 개가 참여하는 한국원자력산업회의 부회장 자리에 있었다. 핵에너지·핵발전의 세 축인 ‘민·관·학’의 정점마다 그가 있었던 셈이다. 탈핵이 쉽지 않은 이유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참조: 권혁태, 851호 ’또하나의 일본2-아톰의 볼모 고질라의 공포’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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