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이런저런 자리에서 “두 번이나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은 일본이 어떻게 원전 대국이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곧잘 받는다. 원자폭탄과 방사능의 피해를 가장 잘 아는 일본에 원전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질문에는 원자폭탄과 원전이 같은 줄기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물론 이 전제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원폭이나 원전 모두 우라늄을 원료로 하고, 그 원리 또한 핵연쇄분열에 입각하기 때문이다.
일본 원자력발전소는 1963년 10월26일 도카이무라에 설치된 실험용 원자로가 처음이다. 그래서 10월26일은 ‘원자력의 날’로 지정돼 있다. 그로부터 약 50년이 지난 지금 일본은 총 54기의 원전을 가동 중이고, 전력 소비량의 30% 이상을 원전에 의존하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원전 대국이 되었다. 일본이 원전 대국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부터다. 1954년 3월 원자력 연구·개발 예산이 국회에 제출·통과되었다. 이때 예산은 2억3500만엔. 원자핵 분열의 원료가 되는 우라늄 235에서 딴 것이다. 1955년에는 원자력기본법이 만들어졌다. 무려 30만 명이 사망한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에서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원자력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춘 셈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아톰’이 상징하는 원자력 열풍
한국에도 잘 알려진 데즈카 오사무의 이 만화잡지에 연재된 것은 1951년부터 1968년까지다. 아톰은 말 그대로 원자라는 뜻이다. 로봇 아톰은 원자력 에너지를 동력으로 한다. 미국에서는 우주소년(Astro Boy)이라 한다. 아톰의 형 이름은 코발트이고 여동생 이름은 우라늄이다. 만일 1950~60년대 일본 사회에 원자력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면 은 만들어지지도, 인기를 끌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에 반해 1954년 개봉된 영화 는 수소폭탄 때문에 유전자가 변형된 괴수 고질라가 일본 전체를 파괴하는 내용이다. ‘고질라’는 통제 불가능한 과학문명의 공포의 아이콘이다. 이에 반해 ‘아톰’은 통제 가능한 과학문명의 평화의 아이콘이다. 고질라와 아톰은 모두 원자력이라는 같은 줄기에서 태어났지만 하나는 원자력의 통제 불가성을, 또 하나는 원자력의 통제 가능성을 상징하며 서로 분리된다. 고질라는 원자력의 군사 이용의 위험성을, 아톰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의 가능성을 각각 보여주는 것이다.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에서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원자력을 무기에서 분리해 새로운 ‘꿈의 에너지’로 자리매김하는 사고가 일본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1950~60년대 일본은 우라늄, 방사능, 원전에 들끓었다. ‘원자력 열풍’(fever)이라는 말이 유행했을 정도다. 아즈마 젠사쿠라는 인물은 원자력 시대의 도래를 점치고 일본 내에서 우라늄 광산 발굴에 힘을 쏟았다. ‘우라늄 할배’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그의 우라늄에 대한 신앙은 지금 생각해보면 엽기를 넘어 괴이하기조차하다. 우라늄 광석을 섞어 넣은 목욕물에서 목욕을 즐겼고 우라늄 광석 가루를 섞은 비료로 채소를 키워 상식했다. 건강에 좋다는 이유였다. 그는 암으로 죽었다. 그의 아내와 어린 딸도 암으로 죽었다. 물론 피폭자의 죽음과 방사능의 인과관계가 항상 그러하듯, 그와 그 가족의 죽음이 그의 ‘우라늄 사랑’ 때문이었음을 증명하기는 어렵다. 그가 발굴한 우라늄 광산이 자리한 돗토리현 닌교도게에서는 특산품으로 ‘우라늄 만두’를 팔았다. 우라늄 분말을 섞은 도자기도 지역 특산품이었다. 기후현 나에기에 있던 우라늄 광산의 채굴권을 가진 여성은 우라늄 가루로 목욕을 즐겼고 ‘방사능술’을 담가 즐겨 마셨다고 한다. 이 내는 주간지 1954년 8월1일치 기사에서는 이 여성을 ‘우라늄 할멈’이라 명명하고 방사능술을 “쌀이나 보리를 쓰지 않은 비밀스러운 술”로 소개하고 있다.
비판적 학자도 원자력 수용
일본 신문협회는 매년 10월15일부터 한 주일 동안을 신문주간으로 지정하고 신문표어를 발표하는데, 1955년 신문주간의 표어는 “신문은 세계평화의 원자력”이다. 원자력은 평화이자 첨단이고 진보이며 미래를 상징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1955년 도쿄 중심가에 있는 히비야 공원에서는 ‘원자력의 평화 이용을 위한 대강연회’가 열렸는데, 은 이 광경을 두 쪽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계열 방송사인 (NTV)는 당시로는 이례적인 생방송 중계를 했다. 은 당시 원자력 에너지의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임창용 선수가 뛰고 있는 일본의 프로야구팀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구단 이름은 1966년부터 1973년까지 아톰스였다. 주요 대학에 ‘원자력’이라는 이름이 붙은 학과가 만들어진 것도 이 무렵이다. 물론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원자력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가 나빠지자 대부분의 대학들은 학과 이름에서 원자력이라는 이름을 빼게 된다. 예를 들면 도쿄대학에 1960년 설치된 원자력공학과는 1993년에 시스템양자공학과로, 교토대학에 1957년 설치된 원자핵공학과는 1994년에 물리공학과로, 홋카이도대학에 1967년 설치된 원자공학과는 1996년에 물리공학계로, 규슈대학에 1967년 설치된 응용원자핵공학과는 1999년에 에너지과학과로, 나고야대학에 1966년 설치된 원자핵공학과는 1994년에 양자에너지공학과로 이름을 바꾼다.
반핵운동 단체도 예외가 아니었다. 매년 8월이면 일본에선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가 개최된다. 이 행사는 1954년 미국의 비키니 핵실험으로 일본의 참치잡이배 후쿠류마루가 피폭당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55년부터 매년 개최되는 세계적인 반핵 행사다. 그런데 제1회 대회인 1955년부터 제3회 대회인 1957년까지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결의가 등장한다. 핵무기는 반대하지만 원전 에너지는 반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원자력 시대의 막을 연 1950년대 일본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핵물리학자가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예를 들면 전쟁 전부터 반파시즘 운동에 관여해 두 번 투옥된 적이 있는 다케타니 미쓰오는 전쟁 말기에는 당시 일본 군부가 추진하던 원자폭탄 개발에도 관여한 유명한 핵물리학자다. 패전 뒤에는 핵무기와 일본의 원자력 정책에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그는 원자력의 평화 이용이 정부 주도로 이루어질 경우, 군사적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대미 종속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투명하고 민주적이며 자주적인 원자력 개발을 주장했다. 즉, 원자력을 개발 가능한 에너지로 보았다는 점에서 정부와 그리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달콤한 아토믹 선샤인에 빠져
이렇게 보면 피폭국 일본이 원전 대국이 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원자력은 통제 가능한 ‘아톰’이지 통제 불가능한 ‘고질라’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원자력이 고질라라는 것을 애써 부정하려 했다. 아톰이 고질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톰이 고질라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된 것은 가동 중인 원전에서 사고가 발생하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다. 유럽의 반원전 운동의 영향도 있었다. 원전과 원자폭탄이 결국은 한 줄기이며 두 개가 분리 불가능함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원자력 에너지의 ‘달콤함’에 빠져 있던 일본 사회는 아톰이 주는 안온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톰의 볼모가 된 것이다.
“우리는 원자력이 내뿜는 햇볕 속에서 해바라기를 즐기고 있다.” 아토믹 선샤인(atomic sunshine)이라 불리는 이 유명한 구절처럼 전후 일본 사회의 아이러니를 상징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때는 일본이 미국의 점령 상태에 있던 1946년. 당시 연합국 최고사령관 맥아더 휘하에서 민정국장을 지내던 코트니 휘트니 준장은 요시다 시게루 외상 등 일본의 고관들을 앞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른바 ‘맥아더 3원칙’이라 불리는 헌법 개정 관련 메모를 일본 정부 쪽에 제시하며 내뱉은 말이다. 맥아더 3원칙은 절대주의 천황제를 대신해 상징 천황제를 두며, 모든 군사력의 보유와 행사를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휘트니의 이 말은 맥아더 3원칙을 일본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미국이 다시 원자폭탄을 사용할 수 있다는 ‘협박’으로 들렸다고 한다. 이 ‘협박’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일본 정부는 맥아더 3원칙에 따라 헌법을 개정한다. 이 때문에 우파는 현행 헌법의 부당성을 증명하는 증거자료로 이 발언을 내세운다. 이런 해석의 당부는 제쳐두고 휘트니가 말한 아토믹 선샤인은 그 뒤 일본 사회의 ‘번영’을 예측한 셈이 되었다. 하나는 미국의 핵우산이라는 아토믹 선샤인, 또 하나는 원전이라는 아토믹 선샤인. 이 두 개의 아토믹 선샤인이 전후 일본의 ‘번영’을 지탱했다. 그리고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통해 아토믹 선샤인은 ‘아톰’이 아니라 ‘고질라’였음이 드러났다.
결국은 ‘고질라’와 한 몸인 ‘아톰’
하지만 이런 깨달음이 핵무기라는 또 하나의 아토믹 선샤인에 대한 거부로 이어질 가능성은 없다. 1994년 미국 에너지국(DOE)은 원전에서 배출되는 플루토늄을 핵무기 원료로 전용할 수 있으며 실제로 1962년에 원전에서 배출된 플루토늄을 원료로 한 핵무기 실험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처음 공개적으로 밝혔다. 일본 정부는 줄곧 원전과 핵무기의 관련성을 부정해왔지만, 실제로는 1970년대 중반에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일본의 원전 건설은 일본의 독자적 핵무장 의도와 분리할 수 없게 된다. 일본은 핵재처리시설과 고속증식로를 갖추고 있고 언제든지 핵무기 원료로 사용할 수 있는 다량의 플루토늄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일본이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지 스스로의 힘으로 ‘고질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미국이 제공하는 핵우산 속에서 줄곧 아토믹 선샤인을 즐겼던 일본 사회에 요구되는 것은 ‘아톰’의 허구에 눈뜨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아톰’이 언제나 ‘고질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깨달음일 것이다. ‘아톰’과 ‘고질라’는 한 몸이다.
성공회대 교수·일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