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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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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것의 통조림

닭볶음탕·간장꽁치 없는 게 없는 ‘혼밥의 끝판왕’…

1~2인용 소형화, 조리 없이 바로 먹는 완제품 인기
등록 2017-08-01 17:05 수정 2020-05-02 19:28
통조림으로 차린 밥상. 닭볶음탕 2980원, 간장꽁치 3480원, 멸치볶음 1980원, 고추장고기볶음 1980원, 볶음김치 2480원, 망고 2980원. 김진수 기자

통조림으로 차린 밥상. 닭볶음탕 2980원, 간장꽁치 3480원, 멸치볶음 1980원, 고추장고기볶음 1980원, 볶음김치 2480원, 망고 2980원. 김진수 기자

끓이지도 데우지도 않았다. 순식간에 6첩 반상이 펼쳐졌다. 어머니의 손맛 대신 내 손끝으로 야무지게 차린 밥상. 육·해·공의 조화를 고려한 마음만은 어머니의 그것이었다. 이제 오감으로 즐겨볼까. 딸깍. 오색창연한 빛깔은 간데없이 다들 거무룩했다. 낯빛도 시무룩해졌다. 강한 짠내가 입안에 훅 번진다. 진한 고추장과 간장 향이었다.

‘그래도 맛만 좋으면 되지.’ 실패 확률이 낮다는 닭볶음탕을 입에 넣었다. 부드러운 닭의 식감이 아니었다. 긴급히 볶음김치를 입속에 추가 투입했다. 어라, 아까 그 맛인데. 설마 이것들마저. 소고기고추장볶음과 멸치볶음도 연달아 밀어넣었다. 역시 단-짜-단-짜의 극강인 고추참치맛. 입이 계속 밥을 찾았다. 금세 ‘완공’(밥 한 공기 다 먹은 상태)했다. 밥도둑은 밥도둑이었다.

기대를 살포시 내려놓은 채 간장꽁치를 베어 물었다. 생각하던 맛과 흡사했다. 부둣가의 비릿함도 없었다. 평범함에 감사했다. 대미는 후식인 망고. 달고 달았다. 거금 1만7760원을 들인 ‘통조림 식사’는 순식간에 끝났다. 배는 부른데 허했다. 따뜻한 음식이 익숙한 몸에 차가운 한 끼는 아직 낯설었다.

참치캔·사각캔햄 새 시대를 열다

통조림에서 온기를 찾는 건 바다에서 민물고기를 찾는 것과 같다. 본디 통조림은 그저 생존을 위한 식품이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해병대 정신으로 무장한 나폴레옹 1세의 지시로 개발된 발명품이 통조림이다. 1804년 황제에 즉위한 나폴레옹은 유럽 점령 계획에 착수하기 전 “오랫동안 음식물을 보관할 수 있는 용기를 만들라”는 명령을 내린다. 상금 1만2천프랑(약 2억8천만원)도 내걸었다.

일찍이 각종 전투를 치른 지휘관이던 나폴레옹은 해병대의 강한 정신력도 안정적 군량 보급에서 나온다는 점을 잘 알았다. ‘군대는 위로 싸운다’고 믿었다. 이 ‘나폴레옹배 음식보존법 공모전’에서 1위를 차지한 작품이 프랑스 제과 기술자가 만든 ‘병조림’이었다. 그로부터 6년 뒤 영국에선 깨지기 쉬운 유리병의 단점을 보완한 ‘주석깡통’이 개발됐다. 이것이 바로 통조림의 시초다. 지금은 금속 용기에 식품을 채운 뒤 밀봉·살균·냉각해 상온에서 2~7년간 장기 보관이 가능하도록 만든 저장 제품을 통조림이라 부른다.

국내에서도 통조림은 전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조선 말인 1892년 일본은 전남 완도에서 처음 전복 통조림을 제조한 이래 한일합병,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전국 각지의 통조림 공장을 통해 조선의 신선한 수산물을 빼갔다. 군납 수요가 증가한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파병도 국내 통조림 산업이 성장하는 계기였다.

이후로도 군대는 줄곧 통조림의 주요 소비처였다. “짬으로 나오는 (통조림으로 만든) 꽁치김치찌개·고등어조림은 기억도 안 나는 맛이었지만, 통조림을 따서 끓여준 꼬리곰탕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맛이다. 전역 뒤 2만원짜리 꼬리곰탕을 먹어봐도 그 맛이 안 난다”고 전역 10년차 서아무개(32)씨는 떠올렸다.

전자레인지도 귀찮다, 완제품을 달라

6~7월에 조리 과정없이 바로 먹을 수 있는 통조림 완제품이 잇따라 출시됐다. 김진수 기자

6~7월에 조리 과정없이 바로 먹을 수 있는 통조림 완제품이 잇따라 출시됐다. 김진수 기자

국내 ‘통조림 125년사’에서 획을 그은 시기는 1980년대다. 두 개의 ‘깡통’이 식생활을 뒤흔들었다. 1982년 동원산업이 처음 출시한 참치캔과 이듬해 롯데·제일제당이 미국의 스팸을 따라해 선보인 사각캔햄이었다. 제일제당은 1987년 미국 식품회사 호멜의 라이선스를 사들여 국내에서 아예 스팸을 생산했다. 시댁에서 분가해 경제권을 쥐고, 직장에 다니면서 바빠진 여성들은 캔당 1천원이 훌쩍 넘는 참치캔과 사각캔햄을 열렬하게 지지했다. 고급 명절 선물로도 인기였다.

참치캔과 사각캔햄은 ‘3분 카레’(레토르트식품), ‘냉동만두’(냉동식품)와 함께 ‘인스턴트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백화점을 즐겨 찾는 중산층 가정주부들이 생활의 편의성에 치중하면서 규격화된 식품을 찾고 있다. 롯데쇼핑의 경우 참치캔이 올 1분기에는 작년보다 6배나 팔렸다”고 당시 (1984년 4월24일치)는 썼다.

통조림계의 두 절대 강자가 통조림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업계 추정으로 약 90%다. 지난 20여 년간 이들을 꺾으려는 도전자들이 명멸했다. 2009년 닭가슴살 통조림(동원F&B)도, 2013년 연어 통조림(CJ제일제당)도 반짝 인기에 그쳤다. 그나마 골뱅이·번데기 통조림이 술안주로 자리를 잡았다. 도시락 반찬이나 캠핑 요리에 적합한 깻잎장아찌·볶음고추장·풋고추멸치볶음·장조림 등 ‘반찬’ 통조림도 스테디셀러로 살아남았다.

2015년부터는 나머지 10% 시장을 겨냥한 니치마케팅(틈새시장을 공략하는 판매 전략) 붐이 일었다. 수산물 통조림이 주를 이뤘다. 장어·갈치·꼬막·우렁·바지락·소라가 통조림 속으로 들어갔다. 잘 손질된 수산물과 그 국물을 찌개나 무침 등 요리에 바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 마케팅의 핵심 포인트였다. “(연간 1인당) 수산물 소비량이 세계 1위에 이를 정도로 소비자는 건강을 생각한다. 그래서 수산물을 선호하지만 손질과 보관에 불편함을 느낀다는 점에 착안했다.” CJ제일제당 관계자의 설명이다.

물에 빠뜨리거나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것도 번거롭다고? 그런 ‘귀차니스트’를 겨냥해 올해 6~7월에는 아예 별다른 조리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는 ‘완제품’ 통조림이 쏟아졌다. 매콤달콤한 소스의 매운꽁치와 달콤짭짤한 간장소스의 간장꽁치, 불에 구운 직화골뱅이, 명태머리 육수로 맛을 낸 큰꼬막 등이다. 닭다리살과 당면에 칼칼한 맛을 낸 안동식찜닭과 감자·양파를 큼직하게 썰어 넣은 닭볶음탕도 따뜻한 밥에 비벼 바로 먹을 수 있는 통조림이다.

‘기러기 아빠’가 사랑하는 통조림은?

최신 통조림의 타깃은 뚜렷하다. ‘혼밥족’(혼자 밥 먹는 사람들), ‘싱글다이너’(혼자만의 만찬을 즐기는 사람), ‘혼술족’(혼자 술 마시는 사람들)이나 맞벌이 가구다. 저렴한 가격에 적당량의 반찬이나 안주를 간편하게 먹기를 선호하는 1·2인 가구의 소비 성향을 반영해 통조림은 100~200g씩 소형화됐고, 가격은 2천~3천원대로 책정됐다. 이는 지난해부터 식품업계에 부는 가정간편식(HMR·Home Meal Replacement) 시장의 트렌드이기도 하다. 통조림·레토르트·냉동식품 같은 간편식 시장의 규모는 지난해 2조3천억원으로 추정된다.

‘기러기 아빠’인 40대 이혁씨는 퇴근 뒤 거의 매일 대형마트에 들러 혼밥·혼술거리를 산다. 샐러드에 넣는 참치캔이나 양념된 꽁치통조림, 번데기 등이 장바구니에 번갈아 담긴다. “통조림은 마트에서 사면 1캔에 약 1천원밖에 안 하는데 맥주·양주·소주에 다 잘 어울려요. 요즘에는 따로 양념할 필요도 없고요. (재료를) 사서 요리를 해먹으면 돈도 많이 들고 남은 거 다 버려야 해서 귀찮으니 거의 매일 통조림을 먹게 돼요.”

어찌 보면 식당도 아닌 집이나 편의점에서 차가운 통조림으로 한 끼를 해결하는 혼밥러는 ‘혼밥의 끝판왕’이다. 김종대 경남대 석좌교수(사회학)는 “집에서 요리할 (시간적·경제적) 여력이 없는 1인 가구에는 통조림이 편리하고 비용도 합리적일 수 있다”면서도 “통조림 식사를 하면 남을 배려하는 음식을 만들거나 평생 쓸 조리 기술을 익히는 등 ‘조리의 혜택’을 누릴 수 없는 안타까운 면도 있다”고 했다.

최근 논란을 빚은 황교익 맛칼럼니스트의 말대로라면 ‘통조림 혼밥’은 사회적 영향으로 사람과의 관계가 거북해 혼자 밥 먹는 ‘사회적 자폐’ 현상의 대표 주자일 수도 있다. 뭐가 정답이든 떠오르는 질문 하나. 전투에서 살아남으려 군인들이 먹었던 태초의 통조림과 지금의 통조림은 얼마나 다를까.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김지현 교육연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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