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기야 사달이 나고 말았다. 집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에 야구 금지령이 내려졌다. 주말이면 아이와 함께 야구하는 재미가 쏠쏠하던 참이었다. 사연인즉, 초등 고학년들이 날린 홈런 공(야구공 모양의 연식 고무공이었다)에 길 가던 할머니가 맞았다. 그 일을 계기로 학교에서 ‘위험한 운동’을 하지 말라는 공지를 내린 것이다. 아이들 입이 댓발씩 나왔다. 가로 60여m, 세로 20여m. 대각선으로도 채 100m가 되지 않는 좁디좁은 운동장에서 야구란 애초 무리였는지 모른다. 힘 좋은 고학년들은 담장을 넘기고는 학교 바깥 사거리에 떨어진 공을 주우러 연신 달음박질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금야령’ 뒤, 북적이던 운동장은 이내 한산해졌다. 서너 무리씩 공을 주고받고 방망이를 휘두르던 아이들은 어디론지 사라졌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놀 곳 없는 대한민국 아이들</font></font>
나도 두 초등학생 아이를 데리고 터를 찾아 방랑했다. 애를 먹었다. 치는 건 고사하고 아파트 주차장 귀퉁이에서 캐치볼이라도 할라치면 경비원 아저씨가 달려와 말린다. 빼곡히 들어찬 차들이 공에 긁힐 수 있단다. 다시 아파트 단지를 서성였다. 한때 테니스장이던 공터가 아쉬운 대로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벽에 붙은 빨간 경고판도 눈에 띄었다. “이곳에서 야구, 농구 등 구기운동을 하지 마시오.” 아파트 벽면에 공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고, 아이들의 ‘소음’도 적잖다는 민원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예전에 온종일 열려 있던 놀이터도 같은 이유로 밤 9시면 어김없이 울타리 문을 잠근다.
놀 시간은 제쳐두더라도 마음껏 놀 공간이 없다는 게 대한민국 아이들의 현실이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이 지난 1~2월 전국 초·중·고생 등 8600명을 대상으로 모은 ‘19대 대선 아동정책 공약 제안’에서 “놀 터를 마련해달라”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77.6%가 “신나게 놀 장소가 필요하다. 놀이의 필요성을 인정해달라”고 응답했다.
아이들은 꾹꾹 눌러쓴 손글씨로 어른들에게 부탁했다. “놀이터가 별로 없어요. 놀이터를 차지하려고 싸우기도 해요. 할 수 있다면 놀이터를 만들어주세요. 그러면 스트레스를 풀어서 더 잘 공부할 수 있어요.” “놀이시설이 없어서 휴대전화나 게임기를 가지고 노는 게 싫어요. 놀이시설을 만들어주시면 그런 문제가 없어질 거예요.” “고학년이 놀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어주세요. …고학년은 갈 곳이 없어요.” “아이들에게 놀이시간을 안 주고 놀이공간을 안 만들어주는 것은 아주 많이 잘못된 행동입니다.”
놀 곳 없는 대한민국 아이들에게 삶의 만족도는 바닥이다.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발표한 ‘2016 제8차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국제비교 연구’ 보고서에서 한국 어린이의 주관적 행복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2개 회원국 가운데 꼴찌를 기록했다. 2009년 첫 조사 이래 한국은 여섯 차례나 꼴찌를 기록했다. 어린이에게도 대한민국은 ‘헬조선’인 셈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1천만의 간절한 목소리 담아낼 공약 </font></font>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다. 대선 후보들은 경제니 안보니 복지니 공약을 앞다퉈 쏟아낸다. 하지만 어린이의 소박한 바람을 담아낼, 그들 몫의 공약은 눈에 띄지 않는다. 표가 안 되는 탓이다. 어린이 공약은 육아, 보육, 교육 등 어린이를 개별적 주체가 아닌 관찰과 보호의 객체로만 접근한다. 철저히 어른들의 시각이자 관점이다.
투표권 없는 대한민국 아이들도 엄연한 한국 사회의 시민이다. 전체 인구의 5분의 1, 1천만 명에 가까운 아이들은 소외된 미래 유권자다. 이들의 간절한 목소리를 담아내고 구성원으로 보듬는 것이 ‘나라의 미래’나 ‘무서운 청소년’ 같은 허황된 추어올림이나 비겁한 배척보다 훨씬 생산적이지 않겠는가.
성연철 기자 sychee@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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