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드라마보다 쫄깃하고, 청문회는 예능 프로그램보다 짜릿했다. 광장의 스펙터클이 스크린의 상상력을 압도해버린 해에 대중문화를 결산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두통이 났다.
취재보도와 육아에 치여 “1년에 영화 한 편 보기도 어렵다”고 아우성치는 기자들에게 지금, 여기 대중문화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길어내는 것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일은 해야 지나가는 것이 한 해다.
기자 10명이 뽑은, ‘그래도 정리해본 올해의 대중문화’다. 특별히 더 권위 있거나 대단히 번뜩이는 식견은 없다. 다만, 우리 함께 다사다난이란 말로는 감조차 잡히지 않는 2016년을 함께 통과해왔다는 기억의 기록이다.
올해의 영화 한 편의 천만 영화와 한 편의 멜로, 그리고 긴장감완전히 엇갈렸다. 진명선 기자는 “분명 도무지 견적이 안 나오던 ‘마이너 감성의 좀비영화’”였는데, 올해 유일하게 ‘천만 관객’을 동원한 을 첫손에 꼽았다. 은 커리어의 대부분을 애니메이션 작업으로 꾸려온 연상호 감독의 극영화 데뷔작이었다.
개봉 전에 상당한 설왕설래가 있었다. 연상호 감독이 비범한 재능을 갖춘 이야기꾼인 것은 분명하지만, 친숙하지 않은 소재로 엄청난 제작비가 투여되는 상업영화를 빚어내는 건 분명 다른 영역이다. 하지만 해냈다.
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정확히 종착점에 도착한 영화다. KTX 열차 내부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인간계 바깥의 좀비와 대결하는 확장적 상상력은 자칫 진부할 수도 있었지만, 장르물의 매력에 충실한 좀비영화의 또 다른 전형을 뽑아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미덕은 액션이 다소 불편하다고 느낄 때 대단히 한국적 방식의 결론으로 치달으며 보는 이의 감정을 위무하는 상업적 감각이다. 진 기자는 “작위와 진부함을 딛고 한정된 공간에서 통합과 분열을 오가는 관계”의 조율이 볼 만했다고 평했다.
송채경화 기자와 서보미 기자의 선택은 이었다. 송채 기자는 “화면, 색감, 음악, 감정 모든 게 아름다웠다”고 평했고, 서 기자는 퀴어물의 전설인 “만큼이나 좋았다”고 말했다. 은 언젠가부터 극장가를 주도하는 ‘남성, 누아르, 액션’의 흐름과 완전히 대척된 곳에 있는 영화다. 두 여성의 사랑을 그린 퀴어 멜로물이란 설명은 뭔가 충실하지 않아 보이는데, 섬세하게 전달되는 감정에 젖어들다보면 그야말로 영화와 나의 물아일체를 경험할 수 있는 진귀한 수작이다. 케이블 VOD로 절찬 상영 중이니 꼭 관람을 권한다.
‘긴장감’을 키워드로 영화를 뽑은 기자가 많았다는 점은 기자들의 스트레스 지수를 반영하는 듯 보였다. 김선식 기자는 “긴장감이 고급지다”는 평가와 함께 를 뽑았고, 김효실 기자는 “입소문마저 긴장감 있었다”며 을 선택했다. 성연철 기자는 “열차 신의 긴장감이야말로 올해의 백미”였다는 말로 을 선택했다. 전진식 기자 역시 “이정출(송강호)의 호칭이 이 경부, 이 동지, 이 형으로 변화하는 섬세한 서사의 긴장감이 돋보였다”며 을 올해의 영화로 뽑았다.
2016년 한 편의 영화도 보지 않았다는 박승화 기자는 그래서 과 를 보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은 지금 여기에도 꼭 필요해 보이는 부패한 관리자를 암살하는 자객의 이야기다. 김완 기자는 “이 영화를 동시대에 볼 수 있는 행운”이라는 더 보탤 필요가 없는 감상을 전했다. 는 켄 로치 감독을 설명하는 수식어가 어쩔 수 없이 ‘명불허전’일 수밖에 없음을 또다시 증명해낸 작품이다.
올해의 드라마 조진웅과 성동일, 그리고 노희경의 ‘실버 어벤저스’조진웅의 과 성동일의 , 그리고 노희경의 가 솥발처럼 갈라섰다. 2016년 드라마의 경향은 지상파 방송 드라마의 완연한 부진 속에 tvN을 비롯한 케이블 계열 드라마들의 완벽한 자리매김으로 정리된다.
KBS는 와 이 없었다면 그야말로 참담할 뻔했고, SBS 역시 와 정도를 제외하면 꼽을 만한 드라마가 없다. MBC는 아예 연기대상을 줄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황무지다.
그런 가운데 tvN은 에 이어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드라마의 시대 교체를 완성했다. JTBC 역시 에 이어 를 궤도에 올리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수많은 명대사를 낳은 은 “20년 후에도 거긴 그러느냐”는 절박한 물음에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으면 희망은 있다”는 위로를 헌사하는 작품이다. 능글맞음과 애정스러움, 정의로움과 무모함을 능란하게 오갔던 조진웅의 열연은 ‘아재파탈’이란 신조어를 만들어냈을 정도로 뜨거웠다. 김완 기자는 “시대를 비판적으로 독해하는 감각과 장르물의 서스펜스를 잃어버리지 않은 상업물의 완숙한 재미가 돋보였다”고 평했고, 서보미 기자는 “드라마 좋아하는 남편, 범죄 스릴러 좋아하는 아내가 싸우지 않고 본 유일한 드라마”라고 말했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한국 대중문화에서 tvN이 점유한 자리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기념비적 시리즈가 됐다. 은 시대의 ‘느낌’을 정교하게 재현해내는 게 어떻게 이야기가 될 수 있는지, 그 한계를 다시 경신한 작품이다.
‘응답하라’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성동일의 역할은 김 회장이나 의 임현식에 비견될 정도다. 가부장이면서 주변이고, 뒷선이면서 전위인 캐릭터다. 성연철 기자는 “계속되는 강한 디테일의 힘”을 이 드라마의 미덕으로 꼽았다. 전진식 기자는 “‘모든 재현은 어떤 재연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그래도 오직 인간만이 무언가를 회상하고 추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인간적인 드라마”라고 평했다.
관계와 상처 사이의 ‘사랑’을 탐구하던 노희경 작가의 세계가 노인으로 확장된 역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과 에 비해 시청률이나 화제성 측면에선 뒤졌지만, ‘노희경 월드’의 밀도는 훨씬 깊어졌다. 김혜자, 고두심, 나문희, 윤여정, 김영옥, 신구, 주현으로 이어지는 ‘실버 어벤저스’ 구성에 고현정과 조인성을 미스 매치한 캐스팅이 탁월했다.
소수의견도 있었다. 김선식 기자는 “바람의 원인은 육아와 가사노동이란 걸 과학적으로 입증”했단 평가와 함께 를 최고의 드라마로 꼽았고, 김효실 기자는 “저도 귀신을 봅니다. 도깨비 어디 없나요”라는 탄식과 함께 로맨스 드라마 에 ‘엄지척’을 날렸다.
올해의 예능 과 그 나머지의 세계2016년에도 변함없었다. 과 그 나머지였다. 10년째 굳건하게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예능’ 자리를 지키는 은 올해 ‘2016 무한상사’편을 통해 버라이어티쇼의 한계를 가차 없이 돌파했다. 김완 기자는 “당대를 읽는 가장 오래된, 그러나 예민한 신호”란 말로 이 쇼에 극찬을 바쳤고, 진명선 기자는 “너무 애쓴다 싶을 정도로 이 쇼가 없으면 어쩌나 싶다”는 말로 대체 불가능함을 확인했다.
이 너무 완전한 강자라 해도 바깥의 위협자들은 존재했다. 가장 강력한 도전자는 였다. 새롭게 시작된 ‘어촌편3’은 단순하고 소박한 이 프로그램의 미덕이 구성 조합과 공간 활용을 어떻게 변주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케미’를 돋게 할 수 있음을 확인케 했다. 더할 나위 없는 차승원-유해진 조합이 아니더라도 계속 집밥 요리의 ‘신성’을 배출해내며 솥을 달굴 수 있음은 이 시리즈의 장수를 예감하게 한다.
특히 특별한 서사를 지니고 있지 않아 언제 틀어도, 오다 가다 봐도, 전편을 보지 않아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데 성연철 기자는 “귀농귀촌이란 도시인의 로망을 맛깔스럽게 금요일의 휴식으로 조리해낸다”고 말했다.
또 다른 위협자는 이다. 노래경연 프로그램의 내리막에서 등장했지만, 끝내 살아남은 경연 프로그램이 된 은 ‘노래는 듣는 것’이란 하나의 목적 아래 나머지 요소들을 모두 희극 재료로 치환한 역발상이 계속 먹혀들고 있다.
우스개가 된 비주얼 요소 속에 오직 노래 실력만으로 화제를 만들어내고, 그 기막힌 노래 실력이 당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게 하는 긴박한 미스터리 구성으로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알 만한 사람만 알던 국카스텐 하현우를 대한민국 ‘음악대장’으로 격상시킨 것을 비롯해, 전혀 노래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의 성공 스토리를 1년 내내 써내려갔다.
예능은 좋아하지만 대세는 따르지 않는 웃음 코드를 가진 이들도 있었다. 김선식 기자는 올해의 예능으로 를 꼽았다. “다큐로 보는데 예능보다 재밌다”며 “대리만족의 희열을 느낀다”고 채널 고정을 권했다.
올해의 가수 군웅할거, 춘추전국시대의 ‘빅뱅’완전히 엇나가버린 영역이다. 사전 투표지에서 완전히 일탈한 대답이 속출했다. 심지어 무응답으로 투표를 거부한 이들도 있었다. 애초 트와이스, 방탄소년단, 엑소, 비와이, 지코, 어반자카파, 빅뱅, 젝스키스를 2016년의 가수 후보로 제시했지만 후보 안에서 가수를 뽑은 건 김완 기자와 성연철 기자뿐이었다.
박승화 기자와 김효실 기자는 블랙핑크를 뽑았다. YG가 2NE1 이후 7년 만에 선보인 걸그룹 블랙핑크는 ‘향후 YG 살림 10년을 책임질 아티스트’로 꼽힌다. 위너와 아이콘이 YG의 의도와 달리 다소 얌전한(!) 반응에 그치고 있을 때, 블랙핑크는 과 를 발매 동시에 음원 차트 1위에 올리며 반향을 일으켰다. 김효실 기자는 “내적 댄스 돋우는 중독성”을 블랙핑크의 매력으로 꼽았고, 박승화 기자는 “짱”이란 외마디에 느낌표 3개를 박았다.
성연철 기자와 김완 기자는 트와이스와 빅뱅을 뽑는 대중성을 보였다. 트와이스는 주춤하던 JYP를 단박에 일으켜세웠다는 평가 속에 (cheer up), [TT]를 연달아 히트시켰다. 두 곡 모두 가히 올해의 ‘후크송’이라 할 만한데, 레드오션이 된 걸그룹 시장에서 이처럼 단기간에 두각을 보인 사례는 오랜만이다. 데뷔 10주년을 맞은 빅뱅 역시 2016년을 또 다른 분기점으로 만들어냈다. 순차적으로 곡을 발표한 [M.A.D.E] 앨범에 와 (LAST DANCE) 등을 보탠 8년 만의 정규 앨범은 완성도와 파급력 모두에서 여전히 ‘빅뱅 원톱’ 시대임을 입증해냈다. 김완 기자는 “빅뱅 데뷔 이후 그 어떤 팀도 빅뱅의 스웨그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2016년 한 해 뜻밖의 차트 강자로 군림한 볼빨간사춘기도 지지를 얻었다. 진명선 기자는 “라는 제목은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느낌적 느낌”이라며 “1차원적 ‘헬조선’을 버리고 3차원도 아니라 아예 5차원의 우주로 가는, 판을 바꾸는 기운을 느낀다”고 성찬했다. 김선식 기자는 “그대들 걱정 말라고 한 와 전인권이야말로 올해의 가수”라고 말했다.
올해의 배우 이병헌과 마동석 사이 조정석‘아우라’만으로 단언케 하는 이병헌과 마성의 ‘귀염 포텐’을 지닌 마동석이 경합했다. 의 안상구로 2016년을 맞은 이병헌은 의 암살자 빌리 락스를 거쳐 의 정채산이 되었다. “모히토 가서 몰디브를 한잔” 하자던 전라도 깡패 안상구는 이전까지의 이병헌 얼굴에서 전혀 뽑아지지 않던 인물이었다. 김선식 기자는 “만 봐도 다른 배우와 비교조차 안 된다”는 평가를 남겼고, 서보미 기자는 “이병헌이기에 도 예매”했다. 성연철 기자의 말대로 그는 지금 “한국 영화의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다.
‘마성의 마요미’ 마동석에 대한 지지는 ‘20대 사람’이 없는 기자들의 불가피한 선택으로 읽힌다. 을 시작으로 로 이어진 2016년 마동석의 활약에 대해 김완 기자는 “어떤 이미지로 활용되는 배우가 아닌 스스로 이미지가 되는 배우의 단계에 왔다”고 평했다. 진명선 기자는 “대중이 공유만큼이나 마동석한테 열광한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시대정신”이란 말로 애정을 고백했고, 송채경화 기자 역시 “마동석 같은 남편을 만나고 싶었다”고 때늦은(!) 회한을 밝혔다.
조정석은 뭘 해도 납득이 된다는 평가가 많았다. 2016년 을 거쳐 으로 거듭난 조정석에 대해 김효실 기자는 “이화신 기자님일 때, 광대 승천했고, ‘잉밍아웃’할 때 납득해버렸다”고 고백했다. 허윤희 기자 역시 “뮤지컬, 영화, 드라마 등 어디서든 반짝인다”며 ‘달그락 훅’ 하는 마음을 고했다.
5위로 꼽은 [ABZ?]는 게임이라면 치고 받는 이야기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힐링 게임이 무엇인지 보여준 작품이다. 아름답고 고요한 바다 속에 잠긴 고대의 전설들을 따라가는 주인공의 잠수 여행기를 굳이 따르지 않고 돌고래와 함께 물속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룬 을 4위에 올린다. 대중성 있는 AAA급 1인칭 액션으로 표현해낸 1차 대전의 현장은 처음 대량살육 기계장치가 동원된 ‘낭만 없는 전쟁’의 현실을 플레이어에게 체험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후반부에선 힘이 떨어지지만 도입부에서 보여준, 캐릭터 사망시 이름과 생몰연도를 보여주고 전장의 다른 병사에게 바로 플레이를 넘기는 형식은 여러모로 전쟁의 의미를 다룬 연출로 남을 듯싶다.
3위는 . 이후 명맥이 끊겼던 본격 고고학 어드벤처는 특유의 발랄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10년간의 이야기에 종지부를 찍었다. 고대 미궁을 탐험하는 신비롭고 위험천만한 모험담을 극적으로 펼치는 는 갑갑한 도시 사회의 현대인이 꿈꾸는 모험을 가장 잘 그려낼 수 있는 매체가 게임임을 증명해냈다.
한국 PC방 순위에서 무려 와 1위 경합을 벌이는 를 2위로 꼽는다. 게임성도 게임성이지만 제작사인 블리자드는 이제 게임을 통해 젠더·인종 등에 대한 주장을 펼쳐낼 수 있음을 보여주며 게임 스스로 ‘갓겜’ 지위를 얻고, 게임 문화 전반을 정치·사회적 의제를 포함한 포괄적 대중문화 위치로 끌어당겨왔다. 그래도 ‘한조’는 어떻게 좀….
영광의 1위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국산 인디 게임 에 돌린다. 가상의 독재국가에서 보안국에 붙잡힌 고등학생 주인공이 옆방에 갇힌 친구의 휴대전화를 해킹하는 게임. 조지 오웰의 에서 영감을 얻은 소설 로부터 가져온 주제를 중심으로 정보사회에서의 감시, 악의 평범성, 죄수의 딜레마 등을 폭넓게 다루며 게임 매체로 펼쳐낼 수 있는 메시지가 어디까지인지 보여준다. 국산 인디의 기념비적 성취로 2016년을 빛냈다.
이경혁 게임 칼럼니스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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