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성이 헛된 것이 되지 않기 위해, 천번을 먹어도 또 먹어야 할 것들을 더 맛있게 먹어보기 위해 준비했다. 황하늘 ‘조니워커하우스’ 총괄셰프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가장 간단한 명절음식 재활용 레시피다.
명절이 끝나면 언제나 냉동실행 급행열차 1순위권 물망에 오르는 ‘송편, 곶감, 고기육전&깻잎전, 그리고 잡채’에 이탈리아의 냄새를 입혀봤다. 명절음식 재활용이라면 그저 ‘잡탕찌개’밖에 떠오르지 않는 당신의 빈약한 상상력에 철퇴를 가할, ‘이것만 알면 당신도 추석 요리사’ 가이드다. _편집자
한줄평 곶감 어디 갔니? 이거 곶감인데 왜 술이 당기니.
요리사 한마디 곶감은 거들 뿐, 핵심은 말이다.
재료 곶감, 식빵, 코니숑(오이피클), 햄, 체더치즈, 버터
조리 난이도 ★★
보기에는 약간 핫도그 같은, 치즈스틱 아닌 춘권 같다. 황하늘 셰프는 “명절이 끝나면 가까운 친구들과 술 한잔 할 일이 있지 않느냐, 그때 딱이다”라고 했지만, 재료 조합이 뭔가 구성지지 않았다. 텁텁한 단맛의 ‘끝판왕’이라고 할 곶감이 흔해빠진 식빵, 햄, 치즈와 어우러져 술안주가 된다는 생각은 뭔가 특급 요리사의 ‘허세’라고 믿어주기에도 너무 허약해 보였다.
그런데 웬걸, 기가 막혔다. 곶감의 끈적한 단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으며, 식빵의 식감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맛이 입안에 들러붙는다. 술이 확 당기며, 입안에 든 이 맛있는 건 뭔가. 맥주 어딨나, ‘누구랑 모히토에서 몰디브를 한잔 해야 하는가’의 주판알이 주르륵 튕겨진다. 신의 한 수는 역시 가열이다. 완전히 밀착된 재료들의 맛을 버터로 달군 프라이팬이 고급지게 잡아냈다. 요리는 역시 불의 예술이다.
레시피
1. 식빵은 갈색 가장자리 부분을 잘라 준비하고, 곶감은 씨를 제거해서 잘라둔다.
2. 밀대로 가장자리를 제거한 식빵을 민다.
3. 얇게 편 식빵에 슬라이스햄과 체더치즈, 곶감을 깔고 손으로 돌돌 말아 랩으로 싸서 고정한다.
4. 10분 정도 지나 랩을 제거한 뒤 버터를 두른 팬에 노릇하게 구워준다.
5. 구운 식빵을 한입 크기로 자른 뒤 코니숑과 함께 꼬치를 꽂아서 접시에 예쁘게 담는다.
셰프의 팁
식빵보다 치즈와 햄의 크기가 작아야 말았을 때 내용물이 밀려나오지 않는다. 그래야 보기에도 깔끔하고 팬에 구울 때 치즈가 녹아 타지 않는다.
육전깻잎 라자냐한줄평 전으로 살려낸 이탈리아
요리사 한마디 바질보다 깻잎, 요리 실력보단 불 조절이 관건
재료 육전, 깻잎전, 라자냐면, 토마토소스, 크림소스, 파르메산치즈, 양송이, 피자치즈, 방울토마토
조리 난이도 ★★★
외향은 완벽한 이탈리아 음식이지만, 만드는 과정은 심히 의심스러웠다. 저렇게 안 어울릴 것 같은 재료들을 층층이 쌓는 것만으로 정말 먹을 만한 맛을 낼 수 있단 말인가. 황하늘 셰프는 걱정 말라는 얼굴로 “어떻게 해도 맛있을 수밖에 없다”며 “깻잎의 위대한 힘을 믿으라”고만 했다.
황 셰프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불 조절이었다. 크림소스가 타지 않도록 중불에서 약불로 옮겨가며 조려내는 감각과 라자냐면을 적당히 익히는 불의 타이밍. 그다음은 딱 5~6살 아이들과 함께 만들면 좋을 조리 과정이다. 육전과 깻잎전을 제외한 재료들이 조금 생소하지만 암튼 레고 블록을 쌓듯이 한층 한층 올린다. 그런 뒤 치즈가 익을 정도로 오븐이나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만 하면 끝이다.
이탈리아식 ‘찌개’를 떠올려도 좋은데, 맛은 그야말로 “깻잎이 치즈를 ‘나이스 캐치’ 해낸 듯” 감탄스럽다. 깻잎이 바질을 대신하고 육전이 시즈닝(양념)된 쇠고기의 풍미를 내며 그야말로 연합군적 어우러짐을 선사한다. 시식에 참여한 50대 사진기자는 “잡탕찌개보다 토마토 범벅이 훨씬 낫다”며 생에 배반적인 찬사를 쏟아냈다.
레시피
1. 끓는 소금물에 라자냐면을 사용설명서에 적힌 시간만큼 삶는다. 양송이, 토마토를 얇게 저민다.
2. 기름을 두른 팬에 양송이를 볶다가 토마토소스(제품)를 넣고 끓여 수분을 최대한 없앤다.
3. 생크림은 약한 불에서 은근히 끓여 농도 있게 만든다.(불 2개를 동시에 써야 한단 얘기다.)
4. 라자냐면을 담을 그릇에 토마토소스를 깔고 라자냐면, 크림소스, 육전, 깻잎전, 피자치즈 순으로 차곡차곡 쌓는다.
5. 마지막에 피자치즈를 뿌리고 자른 토마토를 얹고 파르메산치즈를 뿌린 다음, 오븐이나 전자레인지에 치즈가 녹을 정도로 익힌다.
셰프의 팁
육전과 깻잎전에 간이 돼 있으므로 소금·후추 간을 너무 많이 하지 않는다. 기호에 따라 타바스코(매운 소스)나 바질 등 허브류를 곁들이면 더 이탈리아 요리에 가까워진다.
잡채 토스트한줄평 이것은 달걀과 케첩이 만들어낸 예술
요리사 한마디 간단요리의 어벤저스
재료 잡채, 식빵, 슬라이스햄, 달걀, 케첩, 설탕, 체더치즈, 오이, 버터
조리 난이도 ★
거짓말처럼 익숙한 맛이 난다. 명절음식 중에서도 향과 맛이 가장 강할 잡채를 넣었는데도 입안에서 씹히는 게 당면이어서 그것이 잡채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을 뿐 전혀 잡채의 ‘티’가 나질 않는다. 시식에 참여한 남아름 PD는 “케첩이 열 일을 했다”고 평했다.
간장 양념이 짙게 밴 잡채가 노란 달걀물에 담가질 때만 해도 뭔가 본격 ‘괴식’을 요리라고 우기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놀라울 정도로 맛의 균형감이 완벽하다. 느끼한 잡채를 버터에 구워 먹는 격으로 한국식 느끼함에 서구식 느끼함을 보태는 에스컬레이션인데, 전혀 맛이 포악스럽지 않고 익숙한 자리로 돌아와 있다. 가장 익숙한 길거리 토스트 맛의 능숙한 변주다. 당연히 새롭지는 않다. 하지만 처치 곤란한 잡채를 어떻게 간단히 먹음직스럽게 해치워야 하는지에 최적화된 솔루션이다.
레시피
1. 잡채를 잘게 다져 달걀물과 섞는다.
2. 버터를 두른 팬에 다진 잡채를 넣은 달걀물을 붓고 익힌 다음, 설탕을 골고루 뿌려둔다.
3. 또 다른 팬에 버터를 녹여 식빵을 굽고 슬라이스햄을 구워둔다.
4. 구운 식빵에 설탕을 뿌리고 익힌 달걀, 체더치즈, 슬라이스햄, 케첩, 저민 오이를 넣고 샌드위치를 만든다.
셰프의 팁
달걀물에 직접 설탕을 넣으면 익히는 과정에서 타버린다. 다 구운 뒤 열이 있는 상태에서 설탕을 뿌려야 한다. 역시 잡채에 간이 다 돼 있으므로 소금·후추 간은 필요 없다.
송편맛탕(디저트)한줄평 청담동 거리를 거니는 송편
요리사 한마디 닥치고 단맛,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재료 송편, 설탕, 물엿, 견과류, 아이스크림, 과일
조리 난이도 ★★
맛탕이니 당연히 달다. 근데 쫄깃하게 달다. 차고 뜨거운 맛이 동시에 깨물어진다. 라인업이 완벽히 짜인 디저트 카페에서 세련되게 준비한 시즌 메뉴 같은 느낌이다. 냉동실에서 끌려나온 송편이 단숨에 경직성과 촌스러움을 걷어내고, 잘 훈련된 누군가들에 의해 단박에 스타일리스트로 변모한 느낌이다.
조리법은 비교적 간단하지만, 설탕과 물엿을 프라이팬에서 다뤄야 한다는 점에서 심리적 장벽은 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흔한 말로 아이들의 ‘간식’으로 그만이고, 명절 내내 지루하게 기름기를 흡수해온 미각에 ‘스위티’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음식이다.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과 함께한다면 능히 돈 1만원의 값어치는 해낼 수 있는 배부른 간식이다.
레시피
1. 견과류는 잘게 부수고, 과일은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놓는다.
2. 해동한 송편을 프라이팬에 굽고, 노릇하게 구워지면 물엿과 설탕을 넣고 끓인다.
3. 물엿의 농도가 잡히면 다진 견과류를 넣고 팬에서 버무린다.
4. 코팅된 송편을 접시에 담아, 뜨거운 열이 한소끔 나가면 썰어놓은 과일을 곁들이고 아이스크림을 퍼서 담는다. 슈가파우더가 있다면 그걸로 마무리.
셰프의 팁
송편 위로 과일을 깔고 아이스크림을 얹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스크림이 금방 녹아버린다.
강원도 원주 촌놈. 지금은 서울 사람도 기죽는 으리으리한 청담동 건물에서 주로 VIP만을 대상으로 하는 커뮤니티 레스토랑의 총괄셰프지만 그의 정체성은 어디까지나 기죽지 않는 ‘촌놈’이다. 스무 살 무렵, 황하늘 셰프를 처음 만났다. 두 가지가 인상적이었다. 우선 유행이 지난 힙합바지를 배꼽까지 위로 끌어올려 입고 있었다. 그런 지경이면 대개 주눅이 들게 마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칼’ 이야기를 한참 늘어놨다.
황하늘 셰프는 고등학교 때부터 주방 언저리에서 삶을 꾸려왔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엄마가 해주는 밥이 너무 맛이 없어 볶음밥을 시작”한 이래 요리는 그의 운명이었다. 물론 대개의 경우처럼 운명을 개척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황하늘 셰프의 아버지는 원주에서 교장 선생님까지 한 점잖으신 분이다. 형은 수재 소리를 들으며 이공계 박사과정을 밟았고, 누나 역시 학교 선생님이다. 그런 집안에서 ‘요리’를 하겠다는 것은 “무엇도 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와 그야말로 주방을 작살내는 ‘장총찬’(김홍신의 소설 주인공)의 세계관으로 전투적으로 요리에 임해왔다. 그가 상경한 시점은 분명 2000년대인데, 그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시간이 훌쩍 20년 정도는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다. 때때로 홀 테이블에서 쪽잠을 자며, 레시피를 알려주지 않는 텃세에 맞서 혼자 새벽에 요리를 습득해나갔다던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이 스토리는 ‘헬조선’에 만연한 ‘열정페이’를 ‘미러링’해 지어낸 이야기인가 싶을 정도다.
일에 중독된, 또래에 비해 잘하는 요리사였던 그의 인생이 전환점을 맞이한 건 이탈리아 유학이었다. 소처럼 일하고 독종 소리 들어가며 27살에 ‘셰프’ 타이틀을 가졌지만 정작 이탈리아 요리를 하면서 이탈리아 냄새도 맡아보지 못했단 자괴감에 늘 시달렸다. 훌쩍 사표를 내고 한마디 이탈리아 말도 모른 채 비행기에 올랐다. 수중에는 딱 입학금과 얼마간의 생활비만 있었다. 그래도 학교는 이탈리아 최초로 ‘미슐랭 가이드’ 별 3개를 받은 셰프가 교장으로 있던 곳을 수료했다. 돈이 떨어질 때마다 친구들에게 SOS를 치며 이후 영국과 프랑스에서 두루 주방을 경험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이뤄낼 수 있겠단 자신감을 갖고 한국에 돌아왔지만 쉽지 않았다. 이번엔 ‘나이’가 문제였다. 경력과 스펙은 출중하지만 위계질서가 명확한 주방을 책임지기엔 너무 어리다는 ‘편견’이 늘 문제였다. 때도 좋지 않았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고급 식당들이 전반적으로 어려워졌다. 황하늘 셰프 인생에서 별로 없었던 슬럼프 기간이었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 “내 주방을 꾸리고 싶었던” 황 셰프의 꿈은 잠깐 유예됐다.
그 뒤로 6년여,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대중문화 전반에 ‘쿡방’ 열풍이 불며 요리사가 선망의 직업이 됐고, 창의적 요리를 하는 이들의 몸값이 높아졌다. 틀에 매이지 않는 요리를 하는 황 셰프의 가치를 알아본 조니워커하우스 쪽이 그를 영입해 주방을 맡겼고, 그 역시 ‘셀렙’의 반열에 올라서고 있다.
하지만 그의 요리는 여전히 ‘기죽지 않는 촌놈’의 날것 그대로다. 좀더 세련되게 말하거나 겸양을 떨어도 좋으련만 그는 스무 살 그때처럼 툭툭 말한다. “특별히 뭘 더 잘하진 않는다, 무엇이든 잘하니까.” 이른바 1세대 ‘쇼 셰프’ 이후, 음식은 어디로 갈 것인가. 아직 대중에게 덜 노출된 그의 시대가 기다려지는 이유다.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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