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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순이’가 뭐 어때서

아빠 강준만과 딸 강지원이 함께 쓴 ‘빠순이 인권 옹호서’
등록 2016-07-21 16:45 수정 2020-05-03 04:28
정용일 기자

정용일 기자

딸은 아이돌그룹 동방신기 ‘빠순이’였다. 다만 ‘선을 지키는 빠순이’였다. 집을 나가 전국을 배회하지는 않았다. 대신 동방신기 온라인 카페에 매일 들어가 팬들과 소통하고 ‘아이돌 Goods(상품)’는 꼭 구매하고 관련 소식을 빼먹지 않는 정도였다. “사실 동방신기 아니면 다른 즐거움이 없었다. (중략) 동방신기라는 대상 하나로 공감대를 형성한 팬클럽 활동은 내가 갈망하던 것을 만족시켜주기에 나는 동방신기 팬질에 열심히 빠져든 것 같다.”

‘약자 함부로 하는’ 이 사회의 멘털리티

아버지는 딸의 팬질의 ‘가벼운 협력자’였다. “딸에게 동방신기 관련 뉴스를 열심히 물어다주고” TV에 동방신기 멤버가 나오면 “이거 봐야지” 하고 알려줬다. “딸은 아빠의 영향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나와 같은 미디어 학도가 되었고, 우리는 자주 빠순이 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같이 책을 써보자는 쪽으로 의기투합했고, 결국 이 책을 내게 되었다.”

강준만·강지원 부녀는 ‘빠순이’를 향한 사회의 시선에 문제제기하는 책을 함께 썼다. 인물과사상사 제공

강준만·강지원 부녀는 ‘빠순이’를 향한 사회의 시선에 문제제기하는 책을 함께 썼다. 인물과사상사 제공

(인물과사상사 펴냄. 이하 )를 함께 펴낸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와 딸 강지원(25)씨를 7월13일 전북대 강 교수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강지원씨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같은 전공을 택해 전북대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강 교수는 “팬덤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각이 해도 해도 너무한다. 직업병이 발동했다”며 여러 주제 가운데 ‘빠순이 현상’ ‘팬덤 현상’에 대해 책을 낸 이유를 말했다. 그에게 책은 ‘저널리즘’이다. 신문사가 매일 신문을 찍어내고, 이 매주 주간지를 찍어내듯, 그는 저널리즘적 관점에서 사회현상에 대해 축적한 정보를 바탕으로 거기에 흐르는 사회적 멘털리티,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등을 분석하고 문제제기하는 책을 써왔다. 는 딸의 성장기 동안 보아온 ‘팬덤 현상’에 대해 딸과 함께 작업한 또 하나의 ‘저널리즘’이다.

딸의 ‘팬질’에 협력적 태도를 취했다. 입시를 앞둔 청소년기 자녀를 둔 부모로서 쉽지 않은 선택 아닌가.

강준만  ‘애들을 관리해서 좋은 대학에 보내야 한다’를 제1의 목표로 내세우면 ‘빠질’에 상당한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목표를 고려하면 ‘빠질’은 시간상 손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제 와서 뒤늦게 포장하는 것도 우스우니까 솔직히 말하면 자유방임적 교육관의 부산물이다. ‘알아서 해라.’ 자녀 교육을 관리하는 체제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동방신기 뉴스를 물어다주는’ 게 오히려 팬질에 대한 간섭으로 느끼지 않았나.

강지원   특별히 그러지는 않았다. 기사 나오면 갖다주시고, TV 프로그램에 멤버가 나오면 ‘어, 쟤 나온다. 봐야지’ 하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항상 TV를 켜놓고 그 앞에서 책 4~5권을 쌓아둔 채 읽으신다. 아버지가 별로 신경 쓰지 않나보다 했다. ‘우리 아빠 귀여우시다’ 정도로 생각한 것 같다.

강지원씨는 어느 정도의 팬이었나.

강지원   학교 내팽개치고 전국을 돌아다니거나, 뉴스에 나오는 정도는 아니었다.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안방팬’, 공개방송을 보러 다니는 ‘공방팬’, 사생활까지 쫓아다니는 ‘사생팬’으로 나눌 때 공방팬 정도였다.

강준만  집을 나가 쫓아다니는 정도였으면 다르게 생각했을 것 같다.

딸의 팬질을 바라볼 때 ‘아버지’의 관점보다 ‘학자’ ‘관찰자’의 시선이 담긴 건 아닌가.

강지원   관찰당한다는 느낌은 있었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딸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신문방송학과 교수로서 질문하는 느낌이었다.

강준만  직업병이다. 직업병이란 의식하지 않고 이뤄지는 거다. 기자도 그렇지 않나. 어떤 사안을 보면 기삿거리의 관점으로 보게 되고….

이분법적 사고 대신 ‘퍼지식 사고’
2011년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SM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의 합동공연에 관객 5만여 명이 몰렸다. SM엔터테인먼트 제공

2011년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SM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의 합동공연에 관객 5만여 명이 몰렸다. SM엔터테인먼트 제공

평화학자 정희진씨가 2014년 강준만 교수를 인터뷰하면서 그의 여러 저술을 평가했던 것을 차용하자면, 는 ‘빠순이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의 불공정함’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글쓰기다. ‘한국 사회가 유독 빠순이 현상을 바라보는 데만 가혹하다’는 것이 두 저자의 생각이다. 야구를 좋아하는 스포츠 팬덤,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 팬덤 같은 브랜드 팬덤 등 성인 팬덤은 ‘취향’으로 인정받는 데 비해 ‘청소년 팬덤’은 쓸모·효율·효용을 기준으로 ‘쓸데없는 짓’ ‘생각 없는 짓’으로 평가받는 불공정함이 이 책이 나오게 된 시작점이다.

게다가 모든 팬덤 논의에서 비판의 잣대로 쓰이는 것은 ‘상업성’이다. “스타와 팬덤을 다룬 대부분의 글이 알게 모르게 마케팅 결정론이란 틀 안에서 움직인다. 스타와 팬덤의 사회적 의미나 저항성을 논하다가도 결국 상업주의적 기획에 따른 것이므로 별 의미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끝내는 게 공식처럼 되어 있다.” 이런 ‘결정론식 사고를 벗어나자’는 주장도 가 던지는 화두다.

함께 책을 펴낸 계기는 뭔가.

강준만  팬덤을 바라보는 시각이 해도 해도 너무한다. 한국 사회의 정상/비정상 구분 기준은 엘리트를 배출할 수 있는 방식이냐 아니냐로 나뉜다. 공부만 하는 아이는 정상이고 그렇지 않은 아이는 모두 비정상이다. 이 기준으로 보면 공부가 아닌 ‘연예인’에 시간을 보내는 빠순이 계열의 학생은 다 비효율이고 어리석고 비정상이다.

저널리즘도 이런 시선에 책임이 있다. 최근 문화부 기사에서 비교적 다양한 관점이 보이지만 ‘팬덤’은 줄곧 사건 기사 프레임으로 다뤄졌다. ‘보편적 팬덤’을 다루는 게 아니라 사건·사고 관점에서 일탈만 보도하고, 모든 팬덤을 그쪽으로 몰아간 측면이 있다. 사실 연예인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그들을 괴롭혀서 눈물까지 빼게 하는 ‘사생팬’들은 팬덤 구성원 중 매우 소수이다. 예외적이고 돌출적 존재만 부각해왔다.

그렇다면 팬덤의 긍정성은 뭔가.

강지원   꼭 이분법적으로 긍정/부정으로 나누기보다 ‘퍼지식 사고’(Fuzzy Thinking)가 필요한 것 같다. 그 누구도 그 어떤 현상도 완벽하게 한 가지 범주로만 분류할 수 없다. 내성적인 사람도 0.6 내성적이고 0.4 외향적일 수 있다. 팬덤도 0.7 스타에 대한 열정과 0.3 공동체에 대한 열망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긍정/부정, 흑/백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회색지대’를 표현할 수 있다.

강준만  팬덤은 어떤 사람이 살아가는 하나의 라이프스타일, 삶의 방식이다. 그 삶의 방식을 꼭 긍정/부정으로 봐야 하나. 어떤 사람은 좋은 학교에 들어가서 출세하는 삶을 선택한다. 또 다른 사람은 그때그때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사는 방식을 택한다. 삶의 방식, 사고방식에 대해 특정 잣대를 갖고 긍정/부정으로 보는 것은 점점 다양성을 훼손한다.

팬덤은 ‘열정’을 매개로 한 소통 공동체
강지원(왼쪽)씨는 청소년기 아이돌그룹 빠순이였다. 아버지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딸의 팬질에 ‘협력’했다. 정용일 기자

강지원(왼쪽)씨는 청소년기 아이돌그룹 빠순이였다. 아버지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딸의 팬질에 ‘협력’했다. 정용일 기자

책에 ‘여성주의적 시선’이 많이 녹아 있다. 누구의 색깔인가.

강준만  딸과 원고를 교환하는 과정에서 여성주의적 관점을 많이 배웠다.

강지원   팬덤을 구성하는 다수가 ‘어린 소녀’이다. 소녀에 대한 차별과 무시가 팬덤 멸시로 이어지는 것 같다. 성인들의 팬덤은 취향으로 인정하고 소녀들의 팬질은 시간 낭비라고 본다. 편집장 이진송씨가 ‘빠순이 발로 차지 마라’에서 쓴 대로 빠순이 혐오와 여성 혐오는 상동관계에 있다.

팬덤의 ‘다양한 속성’으로 뭐가 있나.

강지원   개인적 경험에 비춰볼 때, 팬덤이 처음 생기는 것은 ‘스타’를 매개로 하지만 팬덤이 지속되는 것은 팬들끼리 소통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청소년기 스트레스를 팬덤 공동체를 통해 해소할 수 있었다. 팬덤은 ‘열정’ ‘취향’을 매개로 한 순수한 공동체적 속성이 있다.

강준만  한국 사회에서 순수한 공동체는 사실 거의 소멸됐다. 농촌 지역에만 일부 남아 있고, 도시적 삶에서 공동체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각광받아온 박원순 서울시장의 ‘마을 만들기 사업’은 공동체를 회복하자는 취지이다. 매우 필요한 일인데, 팬덤을 보면서 왜 꼭 전통 방식으로만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나 생각하게 됐다.

팬덤을 보면, 취향 공동체는 매우 강력한 힘이 있다. 팬덤의 ‘조공문화’를 비판하는데 사실 ‘조공문화’와 ‘기부문화’의 거리는 멀지 않다. (“조공문화는 팬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가 기죽지 않도록 영화 촬영 현장, 기자회견장 등에 음식·도시락 등을 보내는 행위다. 조공은 기부로 이어졌다. 2008년 동방신기 멤버 시아준수 생일을 기념해 팬들이 청각장애 아동을 위한 인공와우 수술비를 지원했고, 박유천의 팬 연합 서포트팀은 1300만원을 모아 노인, 다문화가정, 모자가정, 미혼모 등에 전달했다.” - 7장 참조) 팬덤을 바라보는 부정적 시선을 바꾸면 조공과 기부의 거리가 좁아지거나 전환될 여지가 생기지 않을까. 시선부터 바꾸고 다음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

책에서 사례로 나오는 것처럼 2008년 촛불집회 때 동방신기 팬 등이 대거 출현했다. 그러나 이후 팬덤의 ‘공동체성’은 주로 계약 문제 등 ‘내가 좋아하는 오빠의 권익’ 문제에서만 발현돼온 것 같다.

강준만  그것조차 엄청난 개혁이라고 본다. 사회문제에 참여하는 것만 의미 있다고 보는데 불공정 거래를 말하는 것 자체가 생활진보 아닌가. 오빠의 권익을 침해하는 ‘가요 순위 프로그램 폐지 운동’을 하고 JYJ 팬덤이 SM엔터테인먼트를 상대로 불공정 계약을 고발해 공정거래위원회가 표준 전속 계약서를 내놓게 했다.

나아가 ‘빠순이들의 인권 침해’도 말해야 한다. 팬들은 엄연히 소비자다. 자기 돈 내고 공연장에 오는 ‘고객’을 이렇게 하찮게 대하는 곳이 없다. 시큐리티들이 함부로 끌어내고, 반말하고…. 말도 안 되는 인권 침해 사례가 너무 많다. ‘전국빠순이협회’를 만들어서 내가 고문을 해야지. 빠순이 인권 침해 문제를 시작으로 한국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진 ‘약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은 함부로 해도 된다’는 멘털리티 역시 고쳐나가야 한다.

‘약자 함부로 하는’ 이 사회의 멘털리티

딸이 대학에 가기 전 아버지는 ‘팬질 협력자’이자 ‘교육 방관자’였다고 말했지만, 미디어 학도의 길을 걷기 시작한 딸에게 아버지는 인터뷰 중간중간 ‘잔소리’를 했다. “지원씨는 나처럼 하지 마”(‘책 많이 내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취지였다), “SNS를 해야 돼”(‘나는 아날로그 세대라서 못/안하지만 디지털 시대에 20대 미디어 학도는 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같은 말들.

딸은 “일단 책을 많이 읽으려 한다” “나도 20대에 스마트폰을 접했으니 완벽한 디지털 세대는 아니다”라며 반박했지만 “팬덤 현상을 두고 공동작업을 하면서 관점이나 의견 차이는 없었다”고 말했다. ‘빠순이’ 딸과 ‘빠순이’ 아빠가 펴낸 ‘빠순이 인권 옹호서’는 그렇게 사이좋게 세상에 나왔다.

전주=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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