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마일스 데이비스가 현명했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 그의 유일한 결핍은 치과의사인 아버지와 음악교사인 어머니의 부부 싸움이었다. 그 정도야 이 세상 어디에나 있는 찰과상일 뿐, 그는 미국 일리노이주 앨턴의 부유한 동네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트럼펫 전공으로 줄리어드 음대까지 진학했는데 재즈로 급선회하여 평생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오만하게 걸어갔다.
<font color="#C21A1A"><font size="4">“내 이름이 뭐라고?”</font></font>그런 마일스 데이비스에게는, 자신의 친구나 후배가 ‘흑인의 정체성’을 찾는다며 아프리카를 찾아가거나 주술적 프리재즈를 추구하는 모습이 허상을 찾는 일처럼 보였다. ‘이봐, 친구들. 아프리카라고? 자넨 지금 아메리카에 있지 않나. 고조부 때부터 말이야.’ 냉정한 태도로 마일스 데이비스는 정체성의 미학이 아니라 극단의 아방가르드를 통해 피부색을 뛰어넘는 파격을 성취함으로써 ‘아, 과연 흑인은 비범하구나’ 하는 경외의 시선을 높은 차원에서 내려다보는, 그런 방향으로 질주했다.
‘아프로-아메리칸’의 뿌리는, 아프리카에 없었다. 다른 아프리카가 있었다. 제국과 식민과 분열의 삼중고를 겪는 ‘오늘의 아프리카’는 그들이 상상한 아프리카가 아니었다. 백인들의 낭만적 침략의 상상과는 다른 맥락이지만, 어쨌든 20세기 중엽 미국 흑인들이 그들의 정신적 뿌리를 찾아 순례했던 상상의 아프리카는 없었다.
재즈의 진정한 ‘듀크’인 듀크 엘링턴은 아프리카 여러 지역을 순례하면서 어떤 리듬, 어떤 선율, 어떤 제의적 요소의 부분적 유사성을 확인하긴 했으나 수십 년 동안 자신이 해온 (스윙)재즈의 젖줄이 아프리카의 어느 초원이나 부족에 있는 게 아니라 미국의 당면한 현실에 흐르고 있음을 확인했다.
알리 또한 그러했다. 1965년 11월22일 라스베이거스 특설링, 챔피언 알리는 야심만만한 도전자 플로이드 패터슨을 1회부터 난타하기 시작했다. 딘 마틴이나 프랭크 시나트라 같은 스타들은 링사이드에 바짝 붙어 관전하다 알리가 주먹을 휘두르면서 패터슨에게 퍼붓던 말을 생생하게 들었다. “내 이름이 뭐라고?” 알리는 패터슨을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계속 팼다.
왜 그랬는가? 패터슨은, 알리가 스스로를 노예 상태가 아닌 자유로운 해방자로 거듭나기 위해 개명한 무하마드 알리 대신 예전 이름 캐시어스 클레이를 거듭 불렀기 때문이다. 혈전을 앞둔 복서들이 계체량이나 기자회견에서 상대방에게 일부러 도발하고 모욕을 주는 것은 권투계의 관행인데, 패터슨이 무하마드 알리라는 개명 대신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원래 이름을 들먹인 것은 이유가 있었다.
<font color="#C21A1A"><font size="4">정체성을 찾아헤매던 청년 알리</font></font>이 과정은 조금 복잡하다. 1960년대 흑인민권운동의 복잡한 노선 투쟁이 알리의 몸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수많은 민권운동 조직 중 ‘네이션 오브 이슬람’(Nation of Islam)이 있었다. 미국 내 이슬람 종파의 하나로 엘리야 무하마드가 조직했고 맬컴 엑스가 두드러진 활동을 했다. 알리는 엑스를 존경하고 따랐으나 지도자 엘리야는 무섭게 치고 오르는 경쟁자 엑스를 경계하기 위해 종교적 신념으로나 활동 측면에서 초심자에 지나지 않는 캐시어스 클레이에게 무하마드 알리라는 존엄한 이름을 부여했다. 알리가 이 조직에 가입한 것은 1962년이었다.
어쨌든 흑인이자 무슬림이 세계 챔피언이 되는 일은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기독교를 믿는 흑인 중에서도 알리가 된 클레이를 비난하는 이들이 있었다. 역시 흑인이자 챔피언을 지낸 패터슨이 이 반대의 열기 속에 “블랙 무슬림에게서 타이틀을 빼앗아 미국에 주겠다”고 호언한 것은 1960년대 민권운동의 복잡한 양상의 편린이다.
알리는 12회까지 패터슨을 공략하면서 “내 이름이 뭐라고? 이 흰둥이 미국놈아!”라고 외쳤다.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흰 가면’은 그러니까 수사가 아니라 리얼리즘이다. 이 경기를 두고 흑인민권운동가 엘드리지 클리버는 “독립적 흑인이 굴종적인 흑인을 이길 수 있다는 상징적인 승리”(, 마이크 마커시 지음, 당대 펴냄, 194쪽)라고 했다.
그렇다고 패터슨이 흰 가면을 쓴 고약한 자는 아니었다. 그는 ‘급진적’ 흑인해방운동을 반대했을 뿐이다. 물론 그 무렵 그 상황에서 평화주의란 백인동화주의와 다를 바 없으며 흑백통합주의라는 말도 무슨 ‘주의’가 될 만한 게 아니므로 적극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어쨌든 패터슨은 맬컴 엑스 등이 주도하는 강력한 정체성의 정치운동을 반대했다. 그런 관점에서, 캐시어스 클레이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이 이름은 노예주가 누구인지 알려줄 뿐인 이름이다. 나는 무하마드 알리로 거듭났다”고 했을 때 패터슨은 일부러 고약하게 원래 이름을 들먹임으로써 오히려 알리를 더욱 단단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안티고네 역할을 한 것이다.
패터슨을 신나게 두들겨팬 뒤 알리는 ‘정신적 고향’을 찾아나선다. 당시 수많은 흑인의 행로를 따라 아프리카 여러 곳을 방문했다.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았으나 부분적으로 날카로운 냉소와 잔인한 질문 앞에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자신이 상상한 것보다 더 비참한 아프리카였고 자신이 상상한 것과 전혀 다른 ‘현대의 아프리카’였다. 그래서 알리는, 아메리카가 아프리카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1942년 1월17일 알리는 마치 훗날의 알리가 되기 위해서라는 듯 미국 남부 노예시장의 중심지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태어났다. 아프리카에서 지나치게 ‘과잉 공급’된 노예들을 남부 전역에 팔기 위해 형성된 도시가 루이빌이다.
<font color="#C21A1A"><font size="4">나비같이 날아서 벌같이 쏜다</font></font>신장 191cm, 리치(권투에서 팔을 완전히 폈을 때 손끝이 미치는 범위) 200cm로 아마추어 복서 생활을 시작해 1960년 로마올림픽 라이트헤비급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메달을 딴 직후 겪은 식당 사건. 즉, 미국을 위해 금메달을 땄음에도 식당에서 주문조차 거절당하는 모욕을 겪으며 알리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메달을 강물에 던져버리고 냉혹한 프로 세계로 전향한 알리는 무패 전승으로 헤비급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 후 3차례에 걸쳐 타이틀 획득에 성공했다. 1964년 챔피언 소니 리스턴을 케이오(KO)시킨 뒤 조지 포먼, 레온 스핑크스 등을 물리치며(그 밖에 패터슨, 지미 영, 조 프레이저, 켄 노튼 등까지) 세 차례나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한 알리는 탁월한 풋워크와 쇼맨십,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승부 근성으로 권투선수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그를 위해 많은 상대자들이 모욕의 역할을 해줬는데 1964년 소니 리스턴이 대표적이다. 알리는 리스턴과 싸우기 전 “나비같이 날아서 벌같이 쏜다”(Float like a butterfly, Sting like a bee)고 했고 리스턴을 7회 KO로 누른 뒤에는 “내가 세상을 뒤흔들었다”(I shook up the world)고 외쳤다.
그리고 펼쳐진 링 밖의 혈전! 1964년 알리는 놀랍게도 신체검사에서 지능지수 78이 나와 면제 판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재검으로 현역 입영 대상자가 된다. 알리는 입영을 거부했다. 그는 베트남전쟁이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위배되고 가난한 청년들만 희생되기 때문에 참전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1967년 5년형의 유죄판결을 받게 되자 곧장 미국 사회의 흑인민권운동과 반전운동의 새로운 물꼬가 되었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 출전하게 된 미국 대표선수들도 뉴욕주 체육위원회가 알리에게 내린 챔피언 타이틀 및 선수 자격 박탈의 취소와 복권을 요구했다. 대표선수들 중에는 멕시코올림픽 남자 육상 200m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하자 검은 장갑을 끼고 시상대에 올라간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도 있었다.
그 후의 역사들 그러니까 링 안의 혈전, 즉 1974년 중부 아프리카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의 킨샤사에서 열린 조지 포먼과의 대결이나 링 밖의 혈전, 즉 흑인 권리 투쟁을 위한 다양한 알리의 전과들은 익히 아는 바와 같다.
그중 특히 중요한 장면으로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봉화가 있다. 파킨슨병을 앓는 알리가 온몸을 떨면서 성화대에 불을 붙였을 때, 그것은 인류사적 감동의 한 순간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 순간, 여전히 차별받고 학대받는 미국 흑인의 거점 지대에서는 ‘백인 품에 안긴 잘 포장된 스포츠 영웅이요, 막대한 시장에 전시된 상품’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냉전 시기에 그는 미국의 우월함을 증빙하는 신체 자료가 되어 아프리카를 순회하다 그곳 기자들에게 냉소 어린 질문을 받고 “내 생각이 짧았다. 뭔가에 이용되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애틀랜타올림픽의 성화 채화 또한 그것의 반복이라는 비판이었다.
글쎄, 그런가. 생각해볼 문제다. 사진작가 애니 리버비츠는 사방에서 화살 공격을 받는 알리 사진을 게재한 바 있다. 월간 1968년 4월호 표지 사진이다. 그렇게, 어쩌면 알리는 평생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맞았는지도 모른다.
의 저자 마이크 마커시는 1960년대 저항의 아이콘이 국가와 자본에 순응하는 ‘톰 아저씨’가 되었다고 썼다. 하지만 마커시는 알리가 “실책을 범하고 유혹 앞에 망설이고 심각한 판단 착오”를 했지만 그럼에도 평범한 사람이 도달하거나 경험할 수 없는 경지로 ‘미국’이라는 20세기의 특설링에서 “경계를 뛰어넘어 사유하고 행동”했다고 평가했다.
<font color="#C21A1A"><font size="4">20세기 욕망이 투사된 인물</font></font>동의한다. 그를 흠집 없는 영웅이자 숭고한 휴머니스트이며 화려한 무대를 누빈 스타로 기억하는 것은, 단순한 착상이다. 뒷골목의 욕망과 대도시의 밤과 처참한 굴복과 격렬한 저항의 눈들이 알리의 몸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알리의 몸에는, 애니 리버비츠가 찍은 것처럼 세상의 수많은 욕망이 화살처럼 투사됐다.
어떤 이는 그의 눈에서 죄인을 읽고 또 어떤 이는 천치를 읽는다. 수많은 화살을 맞아 74살로 쓰러진 인물, 그의 몸에 박힌 화살의 궤적을 따라가면 20세기 중·후반 온갖 욕망을 읽게 하는 그런 인물, 드문 인물, 경계의 이쪽저쪽을 나비처럼 날아다닌 인물, 니체가 사랑한 ‘몰락하는 자로서만 살아가는 이’, 저편 기슭을 향한 동경의 화살을 쏘는 자, 그가 곧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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