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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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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풍경의 주인

등록 2016-04-09 16:57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얼마 전 서울시립미술관에 들렀다가 김태윤의 다큐멘터리 영상 (Nürnberg Dutzendteich·2014)을 보았다. 영상은 1934년 제6차 나치 전당대회가 열렸던 독일 뉘른베르크 두첸타이히 광장 전당대회장의 현재를 말없이 비춘다.

계절이 바뀌는 1년 동안, 고대 원형경기장을 연상시키는 건물의 주변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눈이 내리고 꽃이 피고, 록페스티벌이나 지역행사가 열리고, 사람과 사물들이 채워지고 비워진다. 카메라는 건축물의 앞과 뒤와 옆, 안과 밖, 근경과 원경을 묵묵히 비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 영상의 주인공은 침묵의 그 인공물임이 자명해진다. 도시에서 오직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우리를 지켜보게 될 것은, 산이나 강이 아니라, 그 오래된 건축물뿐이리라.

정말로 다급한 마음

나는 스크린 앞에 앉아서, 뭔가 계속해서 사라지는 우리 동네의 풍광을 떠올렸다. 여기 산 8년 동안 많은 것이 사라졌다. 양복점, 문방구, 만화대여점, 세탁소 그리고 수많은 양옥집들. 길 건너에 주상복합아파트가 생기고, 최근 사라짐은 더 촘촘히 속도를 높이는 중이다. 산책할 때마다 텅 빈 집을 새롭게 발견한다. 그것들은 모두 임시적 성격을 띠는데, 공통적으로 말하는 바는 분명하다. 곧 사라지리라.

미래는 그 바로 옆에 단계별로 전시되고 있다. 파괴된 잔해와, 하루아침에 그라운드 제로로 변해버린 땅, 그 위에 깨끗하고 반듯하게 올라가는 건물. ‘임대’ 현수막. 그리고 부동산, 카페, 올리브영, GS25가 들어선다. 그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 떠올리려고 해보는데, 종종 그게 무엇이었는지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 것들에 대해 내가 조금이라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땅과 건축물에는 주인이 있으니까. 그들 중 누구도 내게 이것을 없애도 괜찮겠느냐고 묻지 않는다. 나는 그것에 가끔 화가 난다. 그런 내 마음이 부적절하단 걸 알면서도, 그것들이 그런 식으로 없어져버리는 게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동네의 모양을 구성하는 그 인공물과 소규모 자연을 내가 공유하고 있었다고, 나의 지분을 정당하게 주장할 수는 없을까.

몇 해 전 새벽, 포클레인이 들이닥쳐 집 맞은편 양옥집을 망설임 없이 타격해 부숴버릴 때, 내가 오랫동안 골목의 수호목으로 여겼던 그 집 마당의 커다란 나무를 찢고 비트는 장면을 볼 때는, 정말로 다급한 마음이었다. 지금이라도 저기 서 있는 감독자에게 가서 말을 할까? 그럼 어쩌면 ‘그래? 그럼 이 나무는 놔두지, 뭐’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뒤통수가 조여옴을 느끼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미 집도 나무도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그런 마음은 동네의 익숙했던 많은 것들이 파괴돼가는 동안 시시때때로 불처럼 일어났다 사그라졌다.

그 일들은 수년 전부터 서서히 진행돼왔고, 의도치 않게 길들여진 탓에 이제는 예전보다 덤덤하다. 아마 지난 수십 년간 도시의 많은 이들이 크고 작게 비슷한 경험을 해왔을 것이다. 상당수는 자신이 내상을 입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어느 쪽이든 그 충격적인 파괴와 생성의 순환을 견디는 것이 도시민들의 기본적인 마음 세팅 패턴이 된 지 오래다.

계속 보고 싶다는 생각

길들여지고 체념한 나는 꽤나 무뎌진 마음으로 두첸타이히 전당대회장을 보고 있었다. 그럴 작정이 아니었는데, 47분 러닝타임 동안 내내 앉아서 그걸 보았다. 변함없이 버티고 선 그 단단한 인공물을 보고 있으니 계속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도시에서 인공물은, 자연물과 같은 위상을 갖게 됐다. 내가 동네의 사라지는 건물과 믿을 수 없이 빠르게 바뀌는 풍경을 보면서 갖는 마음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는 낙동강을 보는 그 지역 사람들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영상 중간, 카메라는 자리를 옮겨 숲 사이에 자연물처럼 동화된 낡은 비석을 비췄다. 전당대회장은 꼭 바위산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로사 현대도시생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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