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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코뮌, 24시간이 모자라

청주 생활교육공동체 ‘공룡’의 주방 아저씨 박영길… 무너지지 않는 삶과 투쟁을 위한 레시피 <요리 활동>
등록 2016-04-09 14:54 수정 2020-05-03 04:28
류우종 기자, 포도밭 출판사 제공

류우종 기자, 포도밭 출판사 제공

“고기를 삼등분해. 육전의 핵심은 육즙이 빠져나가지 않게 하는 거니까, 녹말가루를 살살 묻혀.”

3월28일, 충북 청주 생활교육공동체 ‘공룡’이 운영하는 ‘마을 까페 이따’에서 박영길씨가 공룡 활동가 영은에게 육전 만드는 법을 알려줬다. 삼등분해 녹말가루를 묻힌 ‘비싼’ 부챗살을 달걀에 묻혀 굽기만 하면 육전이 완성된다. 이름은 어려운데 만들기는 어렵지 않다. 과일꼬치와 함께 담길 육전 도시락은 이날 오후 서울시 중구 태평로 서울광장에서 분향소를 차린 유성기업 노동조합원들에게 전달됐다.

밥상에서 답답한 마음을 풀자

유성기업에서 21년간 일해왔던 충북 영동공장 조합원 한광호씨가 3월17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회사의 노조 파괴 과정에서 계속된 고소·고발·징계 등으로 정신 건강이 심각한 상태였다. 박영길씨는 마음이 착잡하다. “지금 모두가 위험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때때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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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의 ‘서류상 대표’이자 주방 책임자인 박영길씨가 ‘어떤 싸움에서든 무너지지 않는 일상을 위해’ 그동안 해온 을 책으로 펴냈다.

‘공부해서 용 되자’는 뜻의 공룡은 ‘일상에서 함께 공부하며 공동체성을 공유하는’ 공간이다. 지역공동체를 위해 동네에서 함께 공부하고 생활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활동가들의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공동체이기도 하다.

‘지역 코뮌학교 동동’을 열어 지역 청소년과 성인들이 함께 공부하고, 활동가들은 지역의 여러 현장, 사회 곳곳의 투쟁 현장과 결합한다. 스스로 농사를 짓고, 맥주를 만들어 팔고, 카페를 운영하면서 자급자족을 통해 자본주의 경제에서 벗어나 사는 방식을 연습한다. 그러면서 각자가 하고 싶은 노래를 만들고, 기타를 치고, 영상을 만든다. 하고 싶은 걸 해야 지속 가능하니까.

공룡이 ‘어떤 일상을 공유할까’라는 질문의 답으로 찾은 것이 ‘식사’다. 밥을 함께 먹는 것. “공통의 대의를 강제하지 않으면서 일상을 공유하는 방법이 함께 맛있는 것을 만들고 나눠 먹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역시 활동가들의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월 30만~50만원 수준에 그치는 활동비로도 삶을 영위할 수 있으려면 먹는 것을 함께 해결하는 게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공룡은 ‘이따’에서 점심, 저녁을 함께 만들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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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식사는 지친 일상을 버티는 힘이다. “요즘 우리 모두 위험하다. 청주시노인전문병원 운영자가 경영난을 이유로 폐업을 선언하고 노동자를 해고하면서 시작된 싸움에 공룡 활동가 대부분이 300일째 함께하고 있다. 보선(활동가)은 병원노조 분회장님의 분신 시도 현장을 촬영했고, 설해(활동가)나 영은(활동가)은 농성천막 철거 싸움 과정에서 온몸에 멍이 들었다. 싸움의 당사자인 노동자만큼은 아니지만, 긴 시간 함께하는 연대자인 우리 몸에도 아픔이 새겨지고 있다.” 마을까페 이따의 간판을 함께 만드는 등 관계가 깊었던 유성기업 노동자 한광호씨도 떠났다. 공룡은 요즘 매일 운다. “문제가 계속 터지기만 하고 해결되지 않으니 걱정이다.”

영혼 달래는 코코뱅, 꽃게찜, 유린기
3월28일 ‘마을까페 이따’에서 박영길씨가 유성기업 노동조합원들을 위한 육전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3월28일 ‘마을까페 이따’에서 박영길씨가 유성기업 노동조합원들을 위한 육전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함께 지속하기 위해, 주방 담당인 박영길씨는 맛있는 걸 만들어 나눠 먹는 일상의 즐거움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혜린(활동가)을 위해 코코뱅(와인으로 만드는 프랑스식 닭볶음탕)을 하고, 지친 설해를 위해 꽃게찜을 하고, 고단한 영은을 위해 유린기를 하고, 묵묵히 견뎌내는 재환(활동가)을 위해 치킨 가라아게(일본식 닭튀김)를 하고, 상처받은 보선을 위해 사천식 해물파스타를 한다.

꽃게를 좋아하는 설해를 위해 꽃게 요리를 할 때는 꽃게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해 강한 양념을 최대한 자제한다. 영은을 위해서라면 귀찮지만, 간장에 양파·청양고추·레몬즙·식초·설탕·깨소금·참기름·매실청 등 9가지 재료를 넣고 냉장고에 두어 차갑게 만든 소스를 맥주에 재운 뒤 튀긴 닭고기에 뿌려 먹는 유린기를 한다. “동료들이 무거운 삶을 가뿐하게 느끼고 현실에 절망하지 않고 지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작은 이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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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길씨가 요리를 하는 것은 가족의 영향이기도 하다. 그는 기사식당 찬모의 아들이다. 가난해서 외식을 잘 못했지만 어머니는 모든 요리를 직접 해주셨다. ‘중국집 짜장면’을 먹고 싶다는 아들에게 “나의 짜장과 중국집 짜장이 다르지 않다는 걸 끊임없이 강조하며” 직접 짜장면을 만들어주셨고, 서울 사는 외사촌들이 치킨을 말하면 조각낸 닭튀김, ‘유사 프라이드 치킨’을 해주셨다.

“온종일 식당 일에 지친 어머니가 집에 돌아와 내가 좋아하는 짜장면을 만들어주면서 미소짓던 짧은 순간, 그 모습을 절대 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요리를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어머니가 요리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노라면 가난했지만, 온 집안에 행복한 기운이 퍼지는 것 같았”고 “내가 한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떠올리는 걸 좋아한다”.

빨강 매니큐어 짙게 바르고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에 대한 연대의 의미로 ‘공룡’ 활동가들이 주먹밥을 만들고 있다. 서 있는 사람이 박영길씨. 포도밭 출판사 제공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에 대한 연대의 의미로 ‘공룡’ 활동가들이 주먹밥을 만들고 있다. 서 있는 사람이 박영길씨. 포도밭 출판사 제공

박영길씨의 요리는 공룡 문밖을 넘어선다. 유성기업 노동자들에게 전달하는 도시락이 그렇고, 2차 ‘희망버스’ 때 지어 나른 연잎밥과 묵밥도 그렇다. 2011년 7월 공룡 활동가들은 한진중공업 2차 희망버스 때 연대하기 위해 연잎밥 50인분과 묵밥 60인분을 실어 날랐다. 전날 지역 연꽃 저수지에 가서 따온 연잎을 식초물로 씻어서 잘 닦아두고 밤, 은행, 대추 등을 넣어 영양밥을 지은 뒤 인삼까지 솔솔 얹고 솥에 쪄낸 연잎밥 50인분과 묵밥 60인분, 현장에서 바로 부친 따뜻한 부침개는 새벽까지 힘쓰던 참가자들에게 따뜻한 연대가 됐다. 쌍용자동차 정문 옆에는 아예 텃밭을 만들어 쌈채소 등을 길러 한 달에 두어 번씩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채소와 음식을 나눠줬다.

요리를 통해서만 옆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10년째 사회적 기업 ‘삶과 환경’에서 음식물쓰레기 수거원으로 일하고 있다. 공공 일자리 창출 사업인데 개인 파산자 등 일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지내는 이들의 자활을 위해 시작했다.

박영길씨는 매일 저녁 6시부터 새벽 4시까지 직접 음식물쓰레기를 수거한다. 그 스스로 같은 노동을 하면서, 힘든 이들 옆에 선다. 음식물쓰레기 수거가 끝나는 새벽 4시부터 2시간여 동안 오가는 소주잔과 함께 별의별 상담이 이어진다.

“이제 10년째라 그만하고 싶은데, 아직 이 일을 대신할 사람이 없다.” 주변 사람들에게 ‘박영길의 마스코트’처럼 여겨지는 손톱의 빨강 혹은 검정 매니큐어도 ‘음식물쓰레기 수거 노동자’로서의 흔적이다. “겨울에 음식물쓰레기를 수거하면 물기가 많아 장갑을 4개씩 껴도 동상에 걸린다. 손이 얼었다 녹았다 하니 손톱 밑이 때가 낀 것처럼 새까매진다. 음식하는 사람의 손이 지저분하다고 생각할까봐 늘 매니큐어를 바른다.”

덕분에 하루 수면 시간은 두세 시간이다. 아침 6시30분께 집에 와서 9시나 9시30분이면 일어난다. 그러고는 공룡 일을 한다. 공룡의 ‘자립’을 위한 사과 1천 평, 옥수수 등 각종 작물 1천 평 농사를 짓는다. 힘든 몸을 위해 책을 읽는다. “무언가를 읽어야 몸이 편해져요. 몸이 힘들 때 책을 읽으면 좋아지는 기분이 들어요.” 그는 ‘지역 코뮌학교 동동’에서 ‘철학을 통해 나누는 우리의 삶’ 등의 강좌를 진행하는 ‘철학자’이기도 하다.

본질에 충실하면 그만이지

그가 힘들면 누가 뭘 해줄까. “나는 별로 그럴 일이 없다. 안 힘들다”고 답한다. 몸은 분명 힘들지만, 그의 표정과 글에서 드러나는 마음은 힘들지 않다. 그는 일이든 요리든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불필요한 힘을 들이지” 않는다. 스페인식 볶음밥의 일종인 ‘파에야’를 두고는 “쌀만 덜 익히면 된다”고 말하고, 달걀말이를 할 때도 “날것으로도 먹는 달걀이니까. 속이 익든 말든 잘 말리기만 하면 달걀말이다.” 박영길씨와 그의 글을 만나면, 연대라는 것도 공동체라는 것도 한결 가볍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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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이 음식


■ 서로를 바라보고 싶을 때: 무밥(160쪽)
무밥은 무를 채 썰어서 씻은 쌀 위에 올려놓고 밥을 하는 것이 전부인 요리다. 하지만 한 사람 식사량만 짓기가 힘들고, 그렇다고 많이 지어놓고 두고두고 먹을 수도 없다. 밥이 변색되고 쉽게 상해버리는 탓이다. 따라서 무밥은 많은 사람이 한 끼에 맛나게 먹기 좋은 요리다. 무밥의 핵심은 간장양념이다. 간장양념을 통해 다양한 만족감을 줄 수 있다. 일반적 간장양념에 매운 것을 좋아하는 혜린을 위해서 청양고추를 다져넣고, 상큼한 것을 좋아하는 설해를 위해 깻잎을 다져넣어 풍미를 자극할 수도 있고, 단맛을 좋아하는 재환을 위해 양파를 살짝 갈아넣어도 좋다. 이렇게 별것 아닌 밥 하나라도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 입맛을 어렵지 않게 맞출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밥을 먹으면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우리를 지탱해주는 최소한의 전제 조건이 아닌가 싶다.
■ 자취생 손님 대접할 때: 단호박고추장밥(61쪽)
고등학생 시절 가난한 자취생이라서 아침저녁으로 김치에 맨밥만 먹던 나는 친구들이 놀러 와도 딱히 내놓을 게 없었다. 만날 김치볶음밥 같은 걸 주기는 미안하고 그렇다고 돈도 없는데 장 봐서 뭔가를 해줄 능력도 없었다. 그래서 친구놈들이 놀러 온다고 하면 극구 사양했는데 그럼에도 내 자취방에는 자주 친구놈들이 들이닥쳤다. 녀석들이 먹을 걸 내놓으라고 성화할 때 할 수 없이 해먹던 것이 단호박고추장밥이다. 맨밥을 매운 고추장에 비벼 속을 파낸 단호박에 꽉 채운 뒤 10분 정도 찌면 완성되는, 그야말로 자취생용 끼니다. 단출하긴 해도 매운 밥과 달달한 호박이 어우러진 맛에 친구놈들이 매번 신기해하며 먹었다.
■ ‘럭셔리’한 일상을 만들고 싶을 때: 물 마리니에르(86~88쪽)
공룡 활동가로 살면서 포기하는 것이 여럿 있다. 재정적으로 워낙 빈곤하다보니 활동비도 다른 단체에 비해 턱없이 적다. 그런 탓에 일상에서의 자잘한 즐거움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을 수밖에. 그럼에도 먹는 것에 관해서는 과할 정도로 잘 먹으려고 한다. 함께 식사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최대한 늘려보자고 마음먹은 까닭이다. 물 마리니에르, 즉 벨기에식 크림홍합탕은 신선한 홍합과 화이트와인의 조화가 관건이다. 평소 요리용 와인은 5천원 선에서 고르지만 이 요리를 할 때는 단맛이 덜한 7천~8천원대의 와인을 고른다. 버터를 솥에 녹인 뒤 마늘과 양파를 넣고 볶는다. 거기에 홍합을 넣어 볶은 후 와인을 넣거나, 아니면 와인부터 넣어서 끓이다가 거품이 일어날 때쯤 홍합을 넣어 끓인다. 홍합이 조금씩 입을 벌릴 때쯤 파슬리와 바질을 넣어 조금 더 끓이다가 크림을 넣어서 마저 끓인다. 대충 익었다 싶으면 불을 끄고 소금과 후추로 간해서 식탁에 내면 된다. 홍합 육수가 넉넉히 나오게 해서 육수와 바게트를 함께 내놓아도 좋다. 이 국물에 바게트를 찍어 먹으면 맛있다.


청주=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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