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17일 지리산 촛대봉에서 맞은 일출. 왼쪽 봉우리는 천왕봉. 김선수
등산에 입문하면 비교적 초기에 통과해야 할 관문 중 하나가 무박(無泊)산행이다. 밤 11시 이후 서울에서 버스로 출발해 새벽 3~4시께부터 10~13시간 정도 산행을 한다. 일출 시간이 계절에 따라 5시께부터 7시30분까지이므로 2~3시간 정도 야간산행을 하게 된다. 헤드랜턴으로 길을 밝히면서 걷는다.
맑은 밤 초롱초롱한 별들과 함께 떠 있는 보름달 또는 반달 아래 지리산이나 설악산 주능선을 걷는다는 상상만으로도 엔도르핀이 돈다. 빛 하나 없는 깜깜한 숲 속을 걸을 때는 헤드랜턴의 빛조차 미안하다. 그 빛마저 없애고 어둠 속에 용해돼버리고 싶기도 하다. 어둠 속 산길을 거닐면 눈에 의존하던 삶에 변화가 생긴다. 눈 때문에 숨죽이고 있던 몸의 온 감각이 살아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빛으로 하여 빼앗겼던 몸의 기능을 어둠으로 하여 되찾는다. 오철수 시인은 이런 야간산행을 ‘어둠 속에서도 자기 지배력을 높여 나아가는 극기의 행위’로 규정한다. 극기라는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즐거움이 있기에 다시 야밤에 산길을 나서게 된다.
날이 새는 것은 새가 먼저 안다. 아직 어둑할 때 새의 지저귐이 들리기 시작하면 곧 날이 밝는다는 의미다. 임미란 시인도 ‘아침이 오는 소리’를 새 울음소리에서 먼저 들었다. “햇살 미처 돋지 않아도/ 누가 저리 부산한 아침을/ 부려놓았나// 꾸륵꾸륵 울고 나는/ 산비둘기와/ 그 틈에/ 산새들 잠 깨어/ 깃털 터는 소리// 멎은 듯 숨 고르는/ 풀벌레 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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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밀어내고 여명이 밝아오는 그 순간을 몸으로 맞는 것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산 능선과 길이 드러나기 시작해 헤드랜턴을 끄는 시점이다. 바로 이때가 사진 찍기에도 가장 좋다고 한다. 사물의 경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란다. 배병우 선생은 소나무 사진 한 장 건지기 위해 경북 경주 삼릉 숲에서 몇 달 동안 여명의 순간을 맞았다고 한다. 군쟁(軍爭) 편에 ‘아침 기운은 날카롭고, 대낮 기운은 해이해지고, 저녁 기운은 돌아가고자 한다’(朝氣銳 晝氣惰 暮氣歸)라고 했다. 이 새벽 기운이 가장 왕성하다.
높은 산에서는 새벽에 운해를 만날 수 있다. 이 역시 무박산행의 선물이다. 흰 구름 위로 솟은 봉우리와 흰 구름에 감춘 골짜기가 아름다운 수를 놓는다. 그 구름 속에 잠기면 골치 아픈 세상사를 잊고 피로한 몸조차 초월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리산 노고단과 장터목에서 남쪽 방향으로, 설악산 망대암봉에서 외설악 방향으로, 설악산 칠형제봉에서 공룡능선 방향으로, 황석산에서 남동쪽 방향으로 천상과 지상을 가르는 운해는 더 이상의 말문을 닫게 한다.
무박산행의 하이라이트는 일출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에서 썼다. “아침 해가 솟아오르게 하는 데 내가 일조하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것은 해가 뜰 때 내가 깨어 있다는 사실이다.” 전국에 일출 명소가 많다. 지리산 천왕봉 일출은 3대(三代)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고 한다. 지리산 촛대봉에서 천왕봉 남쪽으로 올라오는 해를 보는 것도 좋다.
설악산 대청봉, 가지산, 황석산, 토함산 등에서 환상적인 일출을 맞았다. 2010년 12월22일 아침 7시50분께 지리산 바래봉에서 서쪽 하늘로 지는 보름달과 천왕봉 위로 떠오르는 해를 한 하늘에서 만났다. 해와 달이 바통을 주고받는 순간이다. 2009년 10월4일 추석에는 관악산 연주대에서 서쪽으로 지는 해와 동쪽으로 뜨는 보름달을 함께 만난 적도 있다. 보름날 오후 늦게 산에 오르면 이런 뜻밖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산을 찾는 시간에 구애됨이 있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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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적으로는 겨울이 다른 계절보다 일출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기온이 높을 때는 아침에 날씨가 불안정하고 구름이 낄 확률이 높은 모양이다. 어찌 갈 때마다 매번 일출을 만날 수야 있겠는가? 안준철 시인은 ‘어느 평범한 하루라도’라는 시에서 썼다. “어느 평범한 하루라도/ 이런 설렘으로 시작할 수 있다면!/ 이런 기다림으로 간절해질 수 있다면!// …구름은 끝내 해를 내놓지 않았지만/ 내 마음 허전하지 않았네.// 이미 내 가슴에 떠오른/ 뜨거운 불덩이가 있었으니.” 꼭 눈으로 보아야만 아는 것은 아니다. 설렘으로 시작하고 기다림으로 간절하다면 이미 가슴에 떠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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