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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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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산, 심오한 푸르름

푹신한 양탄자길을 걷는 듯한 겨울산행, 상고대와 만나는 하늘은 푸르고 푸르러
등록 2015-12-24 20:36 수정 2020-05-03 04:28
김선수

김선수

산은 사계절 중 언제가 제일 좋은가? 어리석은 질문이다. 각각의 계절에 따라 그 맛과 멋이 다르기 때문이다. 태사공자서(太史公自敍)에 “무릇 봄에 나고,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거둬들이고, 겨울에 갈무리하는 것이 천도의 큰길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사계는 스스로 돌고, 자연은 천리에 따를 뿐이다. 봄산은 은은한 연두색 신록과 화사한 꽃이 좋고, 여름산은 녹음과 계곡물이 좋으며, 가을산은 수놓는 단풍과 낙엽이 좋고, 겨울산은 잎을 떨군 나목과 설경이 좋다.

눈 쌓인 길은 오히려 걷기 편한 면도 있다. 특히 설악산 서북능선이나 지리산 주능선 같은 돌길은 눈이 쌓이면 길이 평탄해지고 부드러워져 무릎에 부담이 덜 간다. 푹신한 양탄자를 깐 길을 걷는다고나 할까? 아무도 가지 않은 눈길을 짐승 발자국 따라 러셀(깊은 눈길을 헤치며 산행)하는 것은 두세 배 힘이 더 들지만 가슴 설레는 일이기도 하다.

겨울산행에서는 장비가 중요하다. 본격적으로 등산을 시작하고 첫 무박 산행으로 2008년 1월 설악산 서북능선을 탔다. 상의 겉옷으로 고어텍스 재킷이 아니라 스키용 파카를 입었다. 서울 인근 산이나 태백산 5시간 정도를 오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한계령에서 새벽 3시에 올랐는데, 능선에 닿을 때까지는 남쪽 사면을 오르니 바람도 없고 괜찮았다.

그런데 능선에 올라 북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맞으니 파카가 빳빳하게 얼어버렸다. 땀이 밖으로 배출되지 않고 파카가 젖었는데, 워낙 기온이 낮으니 얼어버린 것이다. 피부에서는 땀이 나고 겉옷은 얼음처럼 딱딱하고, 이것이 피부에서 맞닿는 감촉이 묘했다. 그런 상태에서는 쉴 수도 없다. 조금만 쉬면 피부까지 얼어버릴 수 있으니. 그럭저럭 중청대피소에 도착해서 안으로 들어갔는데, 얼었던 파카가 녹으면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사람들이 다 놀라서 쳐다봤다. 파카는 녹은 물에 흠뻑 젖어서 물을 짤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뒤 바로 고어텍스 재킷을 구입했다.

힘들었던 겨울산행으로는 2008년 2월 말 덕유산 종주가 잊을 수 없다. 무박으로 육십령에서 시작해 남덕유를 거쳐 향적봉을 찍고 설천봉으로 내려와 곤돌라를 타고 내려올 계획이었다. 남덕유 서봉부터 향적봉까지 능선을 타고 오는데, 등산로가 주로 북쪽 사면에 있어 세찬 북풍을 그대로 맞아야 했다. 간혹 등산로가 능선 남쪽 사면에 있기도 하는데, 바람 한 점 없이 포근하기가 안방 같았다.

그런데 1시간 이상 가도 계속 북쪽 사면 길이고, 바람도 약해지지 않고 거의 같은 세기로 줄기차게 얼굴과 온몸을 때리니 나중에는 악만 남았다. ‘환장하고 미치겠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왜 이 고행을 해야 하나 회의도 들었다. 설천봉에 도착해서 곤돌라를 타고 내려갈 일만 남았다고 마음을 놓는 순간, 바람이 세게 불어 곤돌라가 운행하지 않는단다. 스키 슬로프를 걸어 내려오는데, 스키 타면20분 정도의 거리를 1시간40분에 걸쳐 절뚝거리면서 내려왔다.

역시 겨울산행의 참맛은 설경, 특히 상고대를 보는 것이다. 해발 1500m 이상은 돼야 겨우내 상고대를 만날 수 있다. 설악산과 지리산 능선, 덕유산, 태백산, 계방산, 소백산, 방태산, 가리왕산 등이 대표적이다. 주말에는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사람이 몰린다.

상고대가 핀 봉우리는 멀리서 보면 순백색의 얼음성인데, 그 안에 들면 그야말로 눈의 궁전(雪宮)이다. 나뭇가지에 눈이 쌓였다가 녹아 얼어붙고 또 수증기가 켜켜이 얼어붙어야 제맛이다. 잎이 없는 신갈나무 가지들은 사슴뿔이 된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주목과 날이 추워진 뒤에야 푸름을 알 수 있는 소나무는 잎에 백옥 지붕을 이고 있다. 맑은 날 상고대를 배경으로 한 하늘은 더욱 짙푸르다. 세계에서 가장 깊다는 마리아나 해구의 색을 연상케 하는 심오한 푸름을 만날 수 있다.

2007년 12월 태백산에서 난생처음 상고대를 만났을 때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 첫째, 서울에서 네댓 시간만 나오면 이렇게 환상적인 절경을 볼 수 있다니! 둘째, 나는 47년 동안 살면서 뭘 했길래 이제야 이걸 만났는가? 아직 보지 못한 분들은 올겨울에 꼭 만나보시기를.

김선수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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