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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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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고 싶다

듣는 사람이 없는데도 자꾸 혼잣말을 하게 된 이혼남…결국은 인정해버린 12월의 외로움
등록 2015-12-19 18:29 수정 2020-05-03 04:28

혼잣말이 늘었다. 집에 혼자 있으니 당연하다. 자주 하는 혼잣말은 “뭐 먹지?” “담배나 하나 피울까?” “그만 잘까?” 같은 의문문이다. 듣는 사람이 없는데도 질문을 한다. 이상하게 그렇게 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얼마 전에 만난 프리랜서 친구도 그렇다고 했다. 그는 집 근처에 혼자 쓰는 작업실을 얻었다. 일할 때 커피가 마시고 싶으면 “커피 먹을 사람?” 혼자 묻고 “저요, 저요!” 하고 혼자 답하고 커피를 내린다고 했다.

외로울 땐 롤케익처럼 단 게 먹고 싶다. 그래서 배가 계속 나온다. 이혼남

외로울 땐 롤케익처럼 단 게 먹고 싶다. 그래서 배가 계속 나온다. 이혼남

의문문이 아닌 혼잣말도 있다. “집에 가고 싶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쓰임새가 다양하다. 언제 쓰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1. 회사에 있을 때, 정말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뜻이다. 2. 아침에 출근 준비할 때, 회사에 가기 싫다는 뜻이다. 3. 퇴근 뒤 혼자 집에 있을 때, 외롭다는 뜻이다.

‘외롭다’라는 형용사는 ‘여성형’에 가깝다. 한국말에 남성형, 여성형이 따로 존재하지 않지만 적어도 나에게 ‘외롭다’는 여성형이다. 꼴에 남자라고 센 척하는 거다. ‘외롭다’라는 말 대신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사실 내가 이런 이상한 용법의 말을 한다는 걸 깨달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가요제 덕분에 알게 된 가수 자이언티의 노래 를 듣다가 알게 됐다. 의 가사 중에 “집에 가고 싶죠?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을 거야”라는 대목이 나온다.

자이언티의 노래 덕분에 ‘집에 가고 싶다’와 ‘외롭다’의 상관관계를 생각해봤다. 1차 분석은 이렇다. 혼자 있으니 외롭다. 외로우니까 집에 가고 싶어진다. 여기서 집은 지금 살고 있는 서울 집이 아니라 시골의 부모님 집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좋은 분들이라 다행이다. 아직 건강히 살아 계셔서 다행이다.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어서 다행이다.

2차 분석은 좀 다르다. ‘외롭다’고 말하면 정말 외로운 기분이 든다. 돌려 말하면 조금 낫다. 무의식중에 그런 학습을 한 것 같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지금 당장 “외롭다, 외롭다, 외롭다”라고 소리 내서 말해보자. 갑자기 외로운 기분이 들 거다.

‘외롭다’고 말하는 게 두려워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건 반칙 같다. 이혼하지 않고 결혼생활을 유지했어도 외로운 순간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인간은 누구나 외롭지 않나. 솔직하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며 ‘집에 가고 싶다’는 혼잣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과의 약속이다. 잘 지켜지진 않는다. 찬 바람이 부니 부쩍 더 그렇다. 12월은 싱글에게 가혹하다. 12월25일, 아니 24일과 31일이 싫다. 31일이 더 싫다. 새해를 맞는 건 누구에게나 특별하니까.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니까.

12월의 밤에 혼잣말에 대해 쓸데없는 탐구를 해봤다. 이게 다 커피가 먹고 싶을 때 허공에다 “커피 먹을 사람?” 하고 혼잣말을 하는 친구 때문이다. 친구가 물었다. “부모님이 다시 결혼하라는 말은 안 하셔?” “아직은. 그게 말이야, 이혼의 유효기간이 있는 것 같더라고. 적어도 1년은 지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그렇구나. 결혼 말고 연애는 하고 싶지 않아?” 친구가 다시 물었다.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하고 싶지. 외롭잖아.” 대답을 해놓고 놀랐다. 외롭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버렸다. 친구와 얘기하면서 “연애하고 싶지, 집에 가고 싶잖아”라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외롭다는 걸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기분이었다.

대학생 때 기억이 난다. 고향 친구의 자취방에 놀러갔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친구네 원룸 옥상에서 맥주를 마셨다. 전망이 좋았다. 바람은 찼다. “겨울이 왜 좋은지 알아?” 친구의 뜬금없는 질문에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신 친구가 내놓은 해답이 기억난다. “겨울은 따뜻해서 좋아.” 온기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겨울을 좋아할 수 있다. 24일과 31일도 좋아할 수 있겠지. 그만 잘까? 혼잣말이다.

이혼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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