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 “아버지, 저 이혼하겠습니다.”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혼할 거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사람은 부모님이었다. 부모님께 이혼 사실마저 숨긴다면 진짜 불효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고개 숙인 아들을 본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셨다. 아버지는 나중에 말씀하시길 그럴 것 같았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많이 놀랐다고 하셨다.
허름한 족발집. 두 번째로 이혼 사실을 알렸다. 동네 친구 2명이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술이 많이 취했던 것 같다. “와이프랑은 요즘 안 싸우냐?” 슬쩍 얼버무리면서 넘어갈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그놈의 술이 문제다. 어차피 알게 될 거, 언젠가는 얘기해야 하는데 지금 해버리자, 라고 생각하고 이혼할 거라고 얘기했다. 유부남 친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혼남의 파스타를 거부했던 싱글남 친구(<font color="#C21A1A">지난 글</font> 참고)는 많이 놀랐다. 눈이 동그래지면서 물었다. “정말?? 왜??” 물음표 두 개도 부족한 느낌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났다. “뭘 그렇게 놀라? 주변에 이혼한 사람 없어?”
가정법원. 많은 사람들이 이혼하기 위해 줄을 섰다. 번호표를 받아들고 판사를 만나기 위해 기다렸다. “○○○씨, 이혼하시겠습니까?” “네.” 1분이나 걸렸을까. 구청에 서류를 접수시키면 그걸로 끝이었다. 이제 또 누구에게 이혼한 사실을 알려야 할까. ‘청첩장처럼 이혼 사실을 알리는 이혼장 같은 편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는데 세 번째로 이혼 사실을 알릴 사람이 떠올랐다. 법원 근처에 사는 선배였다. 위로의 말이었을 거다. 선배는 “네 나이에 결혼도 못해본 노총각보다는 이혼남이 더 괜찮아 보인다”는 말을 했다. “저처럼 배 나온 이혼남도 괜찮아 보일까요?” 실없는 말이 오갔다. 늦은 점심으로 선배가 사준 추어탕이 맛있었다.
회사. 이혼남이 되어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누구에게 이혼한 사실을 알려야 할까. 그래도 팀장에겐 보고해야 하지 않을까. (쓸데없는 보고만 잘한다.) 점심 먹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팀장에게 말했다. “팀장님 이혼했습니다.”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팀장이 주변 부서 사람들에게 얘기하지 않을까. 그러면 굳이 내 입으로 이혼 사실을 말하고 다니지 않아도 되겠지.’ 그런 일은 없었다. 착한 팀장은 나의 이혼 사실을 고스란히 혼자만 알고 지냈다. 결국 기회 있을 때마다 이 팀, 저 팀 사람에게 말하고 다녔다. 그렇게 조금씩 아는 사람들이 생기다보니 사장도 알게 된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우연히 만난 사장이 물었다. “혼자 지내니까 좋아?” ‘이제 이혼했다고 말하고 다니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좋아요.’ 속으로 말했다.
이혼을 해보니 제일 힘든 일이 이혼 사실을 알리는 거다. 많은 사람들이 10년 연애하고 헤어진 남자(내 친구)보다 3년 결혼생활 하고 이혼한 남자(나)를 더 불쌍히 여기는 것 같았다. “아이고, 어쩌다가… 그런데 왜 이혼했어요?” 대답은 상대에 따라 맞춤형으로 준비해두었다. “그냥, 뭐 성격 차이죠.” 대답은 했지만 대답을 듣지 못한 기분이 들게 하면 더 이상 대화에서 ‘왜’라는 의문사는 사라진다. 대신 “요즘 이혼이 흠인가요?”라는 위로인데 위로가 아닌 것 같은 말이 돌아왔다.
이혼 사실 알리기 미션은 느닷없이 찾아오기도 한다. 오랜만에 고향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잘 지내지?” “….” 바로 답을 못했다. ‘여보세요’와 한 문장이라고 해도 될 일상적인 질문이 무겁게 다가왔다. 업무상 아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굳이 이혼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네, 그럼요. 별일 없으시죠?” 웃으면서 말했지만 뒷맛이 좀 쓰다. 지금은 누굴 만나든 “이혼했어요”라고 말한다. 이것도 많이 해보니 늘었다. 지금 이 글을 보는 사람들도 3주 전부터 배 나온 이혼남의 존재를 알게 됐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이제 다시 연애해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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