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라는 말은 입에 착 감기는 느낌이 있다. 심지어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단어다. ‘전부인’이나 ‘전아내’는 그렇지 못하다. 나는 ‘아내’나 ‘부인’이라는 말을 자주 쓰지 않았다. 차라리 ‘마누라, 마눌, 와이프, 와잎’ 같은 말이 더 입에 붙는다. 이혼 뒤엔 ‘엑스와이프’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줄여서 말하면 그냥 ‘엑스’다. ‘엑스’라는 영어식 표현은 ‘엑스장모님’이라는 이상한 말을 만들기도 했다. 가끔 친구들과 얘기할 때 ‘엑스장모님’이라는 말을 쓴 적도 있다. 이 말에 재밌어하는 친구도 더러 있었다.
이혼하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엑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줄었다. 당연한 것인지 무의식중에 생긴 어떤 방어기제인지 모르겠다. 재밌는 건, 즐거웠던 기억과 나빴던 기억이 거의 비슷한 비율로 떠오르는데, 생각하는 시간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즐거운 기억은 짧게 스치고 나쁜 기억은 오래 머문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는데 나쁜 기억이 떠오르면 그날 쉽게 잠에 들지 못하는 경우가 꽤 있다. 좋은 기억은 밤보다는 주로 낮에 떠오른다. 피식 웃으면 금방 사라진다.
이 칼럼을 연재하고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이혼남의 팬을 자처한 선배가 조언을 해줬다. ‘왜 나는 이혼했을까’라는 주제로 글을 써보라고 했다. 그래야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 연애를 할 때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좋은 글감이지만 “그럴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결혼생활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엑스’에게 실례가 될 것 같았다. 더 큰 걸림돌은 우리가 헤어진 과정을 돌이켜볼 때 ‘엑스’는 배제된다는 점이다. 한 사람의 사정만 얘기하게 될 공산이 크다. 성찰과 반성의 글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지나친 걱정인지도 모르겠다. 실패한 결혼생활의 단면을 공개하기 싫었을 수도 있다.
아주 가끔 ‘엑스’의 이름이 포함된 문자메시지를 받는다. 은행에서 보내는 문자메시지다. 결혼생활 중일 때 ‘엑스’ 명의의 통장 입출금 내역을 함께 수신하기로 설정했다. ‘엑스’는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가스비 자동이체 등의 사소한 문자메시지가 도착하면 자연스레 ‘엑스’ 생각을 하게 된다. 신기한 건 이런 문자메시지가 두세 달에 한 번씩 오거나 아예 6개월 동안 오지 않기도 한다는 거다. ‘은행에서도 이혼한 것을 알고 있는 걸까’ 하는 싱거운 생각도 했다. 그러면 ‘엑스’에 대한 생각은 어느새 사라지고 만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은행에서 보내는 문자메시지처럼 ‘엑스’ 생각을 하는 횟수도 시간도 줄어드는 것 말이다. ‘엑스와이프’와 ‘엑스걸프렌드’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점점 그 경계가 허물어지는 느낌이다.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겠지만 그냥 받아들일 작정이다. ‘이혼남’이라는 호칭을 떼어낼 수 없듯 ‘엑스’ 생각을 완전히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대신 나쁜 기억이 떠오를 때 ‘나쁜 년’ 하고 욕하지 않을 거다. 똑같은 나쁜 기억 속에서 ‘내가 좀더 잘할걸, 그때 왜 그랬을까’ 하고 후회하지도 않을 거다.
오늘은 ‘엑스’가 자주 쓴 표현으로 ‘정신승리’ 하는 날이다. 오늘 밤에는 좋은 기억이 떠올라 피식 웃으며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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