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기 전 이야기다. 몇 년 전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추석이었는지 설이었는지 모르겠다. 또렷이 기억하는 건 큰아버지가 내게 던진 질문과 이어진 대화다. 질문은 뻔하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하려고?” 큰아버지가 1년에 두 번 만나는 조카에게 건넬 수 있는 유일한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결혼이고 뭐고 아무 생각이 없었던 그 시절 싱글남의 대답은 이랬다. “할 때 되면 하지 않을까요? 못하면 할 수 없고요.” 큰아버지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불효다.”
이혼을 하고 정말 불효자가 되어 다시 만난 추석이다. 연휴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 유사 명절 경험은 시작됐다. 할아버지 제사가 있었다. 시골에서 상경한 아버지는 내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할래?” 엥? 제사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건가. 고고한 선비의 정신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아버지가 할아버지 제사 참석 여부를 묻다니. 당황스러웠다. 아버지께 물었다. “이혼한 것 때문에 친척들 보기 그런가요? 안 가도 돼요?” 잠시 침묵. “그냥 같이 가자.”
“유~세차, 갑오….” 아버지가 축문을 읽는 동안 큰집 안방에 있는 커다랗고 오래된 화장대 거울에 비친 나를 봤다. ‘와이프와 같이 왔던 적이 있는데 언제였지.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이혼남이 된 손자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요즘 시절에 이혼이 무슨 흠도 아니라고 하셨을까.’ 축문은 명상의 시간 음악처럼 들렸다. 제사가 끝났다. 사촌형과 함께 제사상을 치우고 병풍을 옥상에 있는 창고에 옮겼다. “담배 끊었니?” “아니요.” 사촌형과 담배를 피웠다. “너 결혼할 때 내가 해준 얘기 기억하니?” 놀랍게도 사촌형이 해준 얘기가 기억이 났다. 사촌형은 ‘와이프 이기려 하지 말고 무조건 져주라’는 매우 평범한 조언을 했다. “그게 말처럼 잘 안 되더라고요.” 멋쩍게 대답했더니 사촌형이 말을 이어받았다. “요즘 시절에 이혼이 흠도 아니고. (이하 생략)”
추석 하루 전, 시골집에 내려갔다. 차례를 지내러 갈지도 모르니 양복을 준비했다. 나름 민족의 전통을 중시하는 이혼남이었으나 양복을 입을 일은 없었다. 이번에도 아버지였다. “마, 가지 말자. 그 집 식구들만 10명쯤 되는데 번거롭지 않겠나.” 그 집이란 내게 불효의 의미를 일깨워주신 큰아버지가 계신 집이다. 큰아버지의 두 아들은 모두 장가를 갔다. 큰아버지는 손자 하나, 손녀 둘을 보셨다. 큰어머니와 두 며느리까지 정확히 9명이 그 집에 모인다. 아버지, 어머니, 나 이렇게 셋이 모인 우리 집은 명절 분위기를 느끼기 어려웠다. 거실, 안방, 주방에서 지내던 세 식구가 추석 저녁에야 TV 앞에 모였다. 고고한 선비 정신으로 무장한 아버지는 내가 틀어놓은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혀를 차며 말씀하신다. “연예인들 나와서 헛소리하는 게 뭐가 재밌다고.” 김구라가 TV에 비쳤다. “저놈은 이혼하고 말이야.” 옆에 있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우리 아들도 이혼했는데요.”
명절은 어른들의 시간이다.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서울의 큰아버지 댁, 추석 차례를 지내는 시골의 큰아버지 댁에 가는 일의 중심엔 이혼남이 아니라 이혼한 자식을 둔 아버지가 있다. 이번 추석의 명절 스트레스는 결혼, 이혼의 과정을 함께 겪은 부모님이 더 크게 받으신 게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아직 본인의 언니·동생, 그러니까 이모들에게 조카의 이혼 사실을 알리지 않으셨다. 이모들 본 지가 언젠지 모르겠다. 내년 설에도 아마 못 보겠지. 조카의 진학, 취업, 결혼까지 명절 때마다 시시콜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이모들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다. “요즘 시절에 이혼이 흠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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