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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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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이 짙고 푸른

한 바가지 떠다 팔팔 끓이면 사파이어가 만들어질 것만 같은 눈부신 가을 바다, 좋은 날의 끝에 술이 필요했던 이유는…
등록 2015-11-05 20:21 수정 2020-05-03 04:28

사람들은 내게 곧잘 ‘당신에게 있어 바다란 무엇인가요?’라고 묻곤 한다. 일전에 낸 책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다시 되풀이하는 이유는 최근에 어떤 사람이 이따위 질문을 또 해왔기 때문이다. 섬과 바다가 배경인 소설을 계속 써왔기에 이 질문을 하는 모양인데 이럴 때마다 참 짜증이 난다. 나는 되물어버린다. 귀하의 인생에서 여행은 어떤 의미인가요? 기자가 물어오면 이렇게 대꾸한다. 기자라는 직업이 귀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방송국에서는, 방송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해버린다.
눈치를 챈 사람은 그저 웃고 말지만 그렇지 않으면 나름 대답을 하긴 한다. 하지만 뭐 색다른 건 나오지 않는다. 매력 있는 대답을 하지 못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이다. 바다는 그저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일 뿐이니까. 질문은 디테일을 건드려야 좋다. 언제 바다가 가장 아름답나요? 이렇게 물어오면 대답하기가 수월하다.
“가을이죠. 특히 10월, 11월 바다가 아주 파랗고 맑습니다.”
낚시꾼의 말을 믿지 마시라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어제가 딱 그랬다. 오토바이를 타고 마을로 가다가 중간에 서버렸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 그리고 바다가 어찌나 파랗던지, 어찌나 맑던지… 맨날 보는 것인데도 혹해서 망연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 소리 또한 자주 했던 것인데) 한 바가지 떠다 끓이면 푸른 사파이어 결정체라도 만들어질 것만 같은 느낌. 나는 사파이어를 제대로 본 적도 없지만 그 정도로 푸른 기운이 도드라졌다.

좀 우스운 건, 그때 나는 함께 낚시 가기로 한 동료들을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배를 타고. 그러니까 바다로 나갈 예정이었던 것. 그렇다면 새삼스레 반할 이유도 없지 않느냐, 반문할 수 있지만 어떤 대상이 풍경일 때와 현실일 때의 이미지는 완전 다르다. 지나가는 사람이 푸른 논을 보았을 때와 그걸 경작하는 농부가 보았을 때가 다른 것처럼. 등산객이 산 입구에서 봉우리를 올려다보는 것과 그 속으로 들어가버린 것의 차이 같다고 할까.

나는 계속 바다를 바라보았고 그럴수록 눈과 가슴이 시원해졌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안 떠오르는, 그냥 무심의 상태가 된다. 그저 좋다. 정작 낚시 가서는 이 풍경이 눈에 안 들어온다.

집안에 낚시꾼을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귀띔 하나 해드리겠다. 낚시꾼들은 바다를 좋아해서 맨날 출조한다고 하지만,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힌다고 하지만 믿지 마시라. 실제 바다는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저 푸르고 거대한 한일자(一)가 꿈쩍도 않고 있는 것을 오랫동안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힘들다(이 부분이 산(山)과 다르다). 한번 해보시라. 얼마나 오랫동안 보고 있을 수 있는지. 하루 종일 갯바위에 서 있는 낚시꾼들이 바라보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초릿대(낚싯대 맨 끝부분)거나 노란 찌다. 그들에게서 채비를 빼앗아버리면 지겨워서 삼십 분도 못 견딘다.

이렇게 찾아온 가을 바다는 너무 반갑고 고맙다. 여름과 겨울이 길어지면서 이런 장면이 곧 없어질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섬에서의 최악은 풍랑이 치는 것이고 그것보다 더한 경우는 비가 오는 것이다. 바람 불고 파도만 높으면 밭에도 가고 뒷산도 오르지만 비가 와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방구석에 온종일 박혀 있어야 한다.

동료 작가들이 놀러올 때가 있는데 그때 비가 오면 그들은 좋아한다. 작가들이라는 게 감수성이 남다른 존재이기도 하지만 비 내리는 바다의 섬 풍경이 낯설고 이채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죽을 맛이다. 만약 비가 심하지 않고 바람도 그럭저럭이면 낚싯대 들고 먹을 것을 낚으러 가야 한다. 자기들은 입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관없지만 나는 가랑비에 젖어가며 낚아올리고 회를 썰어야 하는 게 고역이다. 짙은 습기로 인해 방이고 거실은 얼마나 구질구질해지는지.

심장을 멎게 한 목소리 ‘밥 주세요’

비 이야기가 나온 김에 최근에 들은 것 하나. 여러 해 전 우리 동네 어떤 사람이 혼자 배를 몰고 바다로 낚시를 갔다. 한창 하고 있는데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육지와 달리 바다는 비가 오면 온 세상이 어둑어둑해지고 평화롭지 못한 분위기로 변하는 게 한눈에 다 들어온다. 불안정하게 변해버린 천지가 통째로 나에게 엄습한 것만 같다. 숨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돌아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갑자기 가녀린 여자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덜컹,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갯바위와 소나무 숲, 비 오는 바다뿐인데 여자아이는 무언가를 달라고 애처롭게 호소하고 있었다. 소름이 돋아오르고 손끝이 떨렸다. ‘드디어 나에게도 귀신이 찾아왔구나, 그것도 불쌍하게 죽은 어린 귀신이’ 싶었던 것이다. 돌아가긴 해야겠는데 몸을 움직여 닻 올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같은 말을 계속 걸어왔다. 되풀이되다보니 비로소 그 말이 귀에 들어왔다. ‘밥 주세요’, 그러니까 이틀 전 최신형 휴대폰으로 바꾸었는데 배터리 떨어져간다는 신호였던 것이다. 흐흐. 사람 겁먹는 방법도 여러 가지이다.

다시 맑은 가을 날씨로. 역시 여러 해 전, 이처럼 햇살 화사하고 바다가 과하게 푸른 날이 있었다. 나는 견디지 못하고 산책을 나갔다. 내 거처가 속해 있는 행정구역은 덕촌리다. 예전 이름으로는 쇠끼미이다. 쇠는 억새를 뜻한다. 그러니까 억새가 많은 마을이라는 소리다. 그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 해수욕장 뒤편 약간 경사진 억새밭이었다. 거기를 지날 때 느닷없이 까르르 여자들 웃음소리가 들렸다. 서너 명은 된 듯했는데 비 오는 바다에서 여자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한 사람처럼 나도 어디서 소리가 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억새밭을 천천히 돌아다녔고 그리고 찾았다. 네 명의 중년 여성들이 억새밭 안에 들어간 것도 부족해 숫제 드러누워 있었던 것이다. 하긴, 누우면 파란 하늘과 햇살을 만나고 있는 억새가 더 잘 보이기는 한다. 여행객 차림의 그들은 제멋대로 누워 뭔가를 종알거리며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장면이 너무 평화로워 보여서 숫제 섬의 가을 풍경을 게이트로 해서 소녀 시절로 돌아가버린 것만 같았다. 그렇게 모든 걸 잊고 푸른 바다와 가을 햇살을 배경으로 마음껏 까르륵거릴 수 있는 기회가 평생 몇 번이나 있을까. 도시의 공원이나 약수터라면 이런 분위기가 났을까.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이 햇살에 산다이를 할 수밖에

나는 훼방꾼이 되기 싫어서 조심스럽게 걸어나왔는데 먼 곳까지 그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풍경을 볼 수 없다. 딱 그 자리에 모 종교단체에서 거대한 콘크리트 호텔을 지어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좋은 날이면 먼 곳의 섬들이 가까워 보인다. 백도(白島)만 하더라도 이십팔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손에 잡힐 듯하여 헤엄을 쳐서 갈 수도 있어 보인다. 제주도도 잘 보인다. 우뚝 솟은 한라산과 아슬아슬하게 떨어져 있는 우도도 확연하게 보인다. 심지어 육지와 연결되어 있는 나로도와 고흥반도도 보인다. 이웃들이 잘 보인다는 건 좋은 일이다. 이곳 거문도는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 어디 한번 가는 게 일인데, 이렇게 그런 곳들과 가깝게 만들어주는 게 가을 날씨이다.

이렇게 날씨가 좋으면 행복해진다. 우리의 행성이 참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으니까. 오늘도 날이 좋아서 쓰고 있는 모든 원고를 밀어두고, 낚시도 가지 않고 섬 이곳저곳을 싸돌아다녔다. 등대를 다녀오고 갯바위를 걸었다. 배가 지나가면 푸른색과 흰 파도가 뚜렷하게 갈리면서 각각이 분명했다. 물이 워낙 푸르니 파도가 더욱 희다. 두보의 강벽조유백(江碧鳥逾白·강이 푸르니 새가 더욱 희고)을 그대로 따오면 해벽파유백(海碧波逾白)이 되겠다. 그리고 뒷산도 타 올랐다. 혼자 산다이를 하고 논 것이다. 춤만 안 췄지 노래도 불렀으니까.

하지만 좋기만 한 것은 세상에 없다는 거 아닌가.

뒷산 능선 길은 마을이 있는 이쪽과 깎아지른 절벽이 있는 저쪽이 만나는 곳으로 동서남북 바다가 모두 훤히 보인다. 그곳을 걷다가 내려오는데 발 옆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어린 새 한 마리가 바닥에서 바들거리고 있었다. 날개깃은 다 나와 있지만 날지는 못하는 그런 상태였다.

하는 모양이 아마도 둥지에서 떨어진 것 같은데 나무가 울울창창해서 둥지는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모자에 넣어 데리고 왔다. 이곳은 솔개가 여러 마리 있어 어미가 그 애들에게 죽은 듯도 하고 날갯짓 연습하는 도중이라고 해도 살모사가 돌아다니는 곳이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둥지에서 떨어진 어린 박새 한 마리

자, 이제 어떡하지? 바야흐로 고민은 시작되었다. 먼저 사진 찍어 이런 거 잘 알고 있는 박남준 시인에게 보냈더니 박새로 보인다는 답이 왔다. 검색해서 찾아보니 과연 박새 새끼였다. 녀석을 화장지 깐 종이 상자에 담아놓고 나서 벌레를 잡으러 나가고, 젓가락으로 집어 억지로 먹여보려는데 안 먹는 모습을 보며 주사기로 물이라도 먹여볼까, 아니 어미가 물을 직접 먹이지는 않았겠지, 예전에 동박새 키우는 사람이 했던 대로 쌀이라도 씹어서 먹여볼까, 가을 햇살이고 뭐고 나는 혼자 끙끙댔다.

그 사이 어린 새는 간간이 울어댔다. 이거, 졸지에 병든 시엄씨 하나 생긴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결국 마을로 나가 이런 경험 있는 사람한테 물어서 작은 풀여치 같은 것을 잡아 쪼개서 먹여보라는 답을 들은 다음 먹이 집어줄 핀셋 하나 얻어 돌아왔더니 그새 죽어 있었다.

그래서 호미 들고 다시 뒷산으로 올라가야 했다. 하루에 뒷산을 두 번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양지바른 곳에 그 애를 묻어준 다음, 죽는다는 것에 대해 잠시 동안 생각해보고, 그리고 내려와 음복이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소주를 마셨다. 하긴 산다이에는 꼭 술이 필요한 법이기는 하지만 이 좋은 가을날 끝이 새의 장례식이 되고 말았다.

한창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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