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엉덩이까지 치렁치렁 땋아 내린 옥선이가 2학년에 갑자기 들어와 내 짝궁이 되었습니다.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14살의 처녀였습니다. 긴 치마저고리를 입었습니다. 선생님은 머리도 단발머리로 자르고 치마도 무릎 밑까지 잘라 입고 오라고 합니다. 한국전쟁 직후라 정상적으로 학교 입학이 어려운 때였습니다. 옥선이 오빠들은 난리 직후 곧바로 학교를 오고 옥선이는 여자고 막내딸이라고 시집만 잘 가면 되지 하고 미루다가, 남들이 다 학교를 다니니 늦게라도 한글은 배우라고 보냈습니다. 옥선이는 한글을 모르는 채 2학년에 온데다 집도 멀어서 학교가 아주 재미없다고 합니다. 시험 볼 때 내 것을 보고 베끼는 것도 어려워합니다. 선생님도 옥선이가 커닝하는 것을 눈감아줬습니다.
옥선이는 원당 꼭대기 신선골에 산다고 자랑합니다. 저들 집은 아무리 삼복더위라도 신선탕에서 목욕하고 느릅나무 밑에서 놀다보면 여름에도 이불을 덮을 정도라고 합니다. 순예 너, 우리 어머니가 시험문제 보여줘서 빵점을 면하게 해줘 고맙다며 방학하면 데리고 오라고 했다고, 너가 오면 아주 시원하고 맛있는 강냉이 냉죽을 해준다고 했답니다. 즈네 아버지는 수염이 길고 퉁소를 잘 불어 신선 같다고 자랑합니다.
우리 집도 학교가 가까운 것은 아니었지만 옥선이네 집은 가도 가도 끝이 없습니다. 옥선아, 너희 집이 어디야? 조금만 더 가면 돼. 한참을 가다가 아직도 멀었나? 아니야, 요 산모롱이까지만 돌면 돼. 반복하며 몇 시간을 걸어서야 겨우 옥선이네 집에 도착했습니다.
키가 훤칠한 아주머니는 보면 옥선이 엄마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신선 같다고 자랑하던 옥선이 아버지는 수염이 덥수룩하고 앞니가 빠지고 아주 꾀죄죄해 보였습니다. 뭐를 먹으면 그릇에 수염이 닿습니다. 옥선이 아버지가 먹던 그릇에 먹을 걸 줄까봐 걱정되고 옥선이 아버지가 드시던 수저를 내줄까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옥선이 어머니는 강냉이 냉죽을 만드느라 분주합니다. 아직 여물지 않은 강냉이를 삶아 그릇에 세워놓고 칼로 깎아서 맷돌에 갑니다. 여문 강냉이는 맛이 없고 덜 여문 강냉이라야 맛이 있다고 합니다. 콩도 한 홉 삶아 참깨와 함께 맷돌에 갈아 체에 걸러냅니다. 훌훌한 죽처럼 한 동이 만들어 이고 가서 폭포 밑 웅덩이 옆에 담가놓습니다.
옥선이네 집 바로 옆에는 벼랑 위에서 폭포가 겁 없이 뛰어내려 맑고 깨끗한 웅덩이를 만들어 목욕하고 놀기에 아주 좋습니다. 넓은 물웅덩이 이름은 신선탕입니다. 옛날에 신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하고 놀던 곳이라고 합니다. 정말일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물이 너무 차서 오래 들어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큰 열목어들이 쫓겨갈 줄도 모르고 함께 목욕을 하고 놉니다. 발을 담그고 있으면 열목어들이 나와서 발을 간질이고 발가락을 물어당깁니다. 희한하다, 옥선아 느네 물고기는 어째 사람을 안 무서워하나? 물어보니 처음부터 절대 건드리지 않고 먹이도 가끔씩 주면서 같이 살고 있답니다.
옥선이 어머니는 특별히 강냉이 냉죽에 꿀을 타줍니다. 평소에는 소금 약간과 사카린을 타는데 오늘은 특별하답니다. 옥선이 어머니는 강냉이 냉죽 한 사발에 됫병에 솔은 꿀을 손가락 같은 긴 싸리가지를 집어넣어 꿀이 묻어 나오면 이 그릇 저 그릇에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쓱 훑어 넣습니다. 마지막엔 싸리가지로 휘휘 저어 먹으라고 합니다. 달착지근하고 고소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옥선이가 자랑할 만합니다.
옥선이네 식구들은 신선탕에서 목욕을 하고 강냉이 냉죽을 먹고 쉽니다. 옥선이 아버지는 일을 마치고 옥선이 어머니가 직접 삼아 만든 풀 먹인 삼베 중우 적삼을 입고 폭포가 떨어지는 바위 위에서 퉁소를 붑니다. 느네 아버지는 어디서 퉁소를 배웠나? 옥선이가 말하기를 아버지는 퉁소를 배운 적이 없고, 퉁소도 대나무에 송곳을 불에 달궈 구멍을 뚫어 직접 만들었다고 합니다. 혼자서 자꾸만 불다보니 지금처럼 잘하게 되었답니다. 무슨 곡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마음이 점점 숙연해집니다. 꾀죄죄하던 옥선이 아버지가 정말로 신선같이 보입니다. 폭포 소리와 퉁소 소리가 조화를 이루어 정말로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갈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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