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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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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내라, 주인아

나는야 한밤의 드러머
등록 2015-04-04 17:27 수정 2020-05-03 04:27

내 이름은 만세, 고양이다.
늘 그렇듯 검은 밤. 고양이는 야행성이므로. 집 안의 모든 불이 꺼지고 나면 공기의 무게가 달라진다. 가라앉은 공기를 가르며 창밖에서 흐리게 새어 들어오는 도시의 불빛에 의지해 우아하고 유연하게 집 안 곳곳을 누빈다. 언젠가 이야기했듯 낮의 소란이 사라진 지금이야말로 고양이들의 시간. 고양이가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걷는 이유는 밤의 고요를 헝클어트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처럼 어둠 속에서 발에 채는 무언가에 걸려 우당탕 수선을 피우지 않는다. 항상 말하지만 고양이들은 이렇게 깨알 같은 이유로 인간보다 우월하다.

신소윤 기자

신소윤 기자

집 안을 한 바퀴 순찰하고 나면 가만히 들여다본다. 쌔근거리며 자는 아기를, 코를 골며 자는 제리 형님을, 늘 피곤해 보이는 우리 집주인들을. 어디 보자, 그런데 우리 집주인이 악몽을 꾸는 것 같다. 굉장한 것에 온몸이 깔린 듯 답답한 모양이다. 무슨 꿈을 꾸는 걸까. 주인 얼굴을 골똘히 들여다보며 해몽해본다. 주인, 너란 존재의 심연과 본질을 들여다보자. 엄청난 무게에 짓눌린 꿈을 꾸는 당신은 현재 본인이 지탱하기 힘든 삶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듯합니다. 당신의 깊은 무의식에 자리잡은 이 크고 무거운 것의 존재는… 이런, 갑자기 집주인이 점점 숨을 가쁘게 쉰다.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옆으로 몸을 움직여보려다 실패한다. 가위라도 눌렸나. 힘을 내라, 주인아. 드디어 사력을 다해 번쩍, 눈을 뜬다. 그리고 자기 가슴팍에 올라 앉아 있는 나와 눈을 마주친… 무거웠냥. 미안하다옹. 다음 수순은 늘 그렇듯 원망스러운 손짓으로 나를 침대 아래로 휙 밀쳐낸다. 하지만 우리 고양이들은 결코 모양 빠지게 떨어지지 않는다. 마치 내 의지로 아래로 내려가듯 기품 있게 바닥으로 살포시 안착한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상함을 유지한다. 다시 말하지만 고양이는 이렇게 멋진 존재인 것이다.

고양이는 혼자 지내길 좋아하는 동물이라 알려져 있다. 그렇다. 우리가 낮에 그렇게 죽기 살기로 자고 밤에 깨어 있는 이유는 오로지 우리만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인간들 집에서 하숙하는 우리 같은 집고양이들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렇게 기다려온 모두 잠든 밤이지만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면 이상하게 누구라도 깨우고 싶다. 그런 이유로 집주인의 가슴팍에 올라앉는 것은 일상이요, 이런저런 방법으로 수면을 방해하는 것이 다반사다.

오늘밤처럼 집주인의 가슴을 짓눌렀는데도 꿈쩍없이 자는 날에는 앞발로 툭툭, 주인의 콧구멍을 후벼보고 턱이며 볼도 건드려보고. 그러다보면 나는야 한밤의 드러머. 주인의 들숨 날숨에 박자를 맞춰 영화 주인공의 광기에 버금가는 내 안의 열정과 집념과 리듬감이 발동한다. 앞발이 아픈 것도 모르고 하염없이 주인의 얼굴을 두드린다. 그런 다음 어떻게 되냐고? 당연히 주인이 성질을 내며 일어나, 야 이놈의 만세야! 삐…(잠결 욕설 주의) 방언을 터트리는 거다.

발소리를 내고 걷는 법이 없는 이 밤의 무법자들은 고요하게 당신 옆에 깃들 것이다. 오늘밤은 내가 원고 쓰느라 좀 늦었지? 조금만 기다리시라. 깨어나라, 인간이여. 수면 훼방꾼이 간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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